[변요한목사 시론] 시기와 질투, 분노의 해악
[변요한목사 시론] 시기와 질투, 분노의 해악
  • 임지영 기자
  • 승인 2025.07.30 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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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요한 경찰청교회 목사
변요한 경찰청교회 목사
변요한 경찰청교회 목사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 즉 사두개인의 당파가 다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여 일어나서 사도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었더니”(사도행전 5:17~18)

머리글 사도행전 말씀은 ‘핍박’일까요? ‘핍박’이라면 이 핍박은 누구에게서 온 것일까요? 오늘 본문에서 ‘핍박’하는 사람들이 좀 이상합니다. ‘대제사장과 사두개인 당파’라고 합니다.

이들은 ‘종교지도자’들 아닙니까? 그렇다면 이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사도’들을 축복해 주어야 옳았던 것이 아닙니까? 거기다 그 당시 대제사장은 ‘바리새파’들이 중심이었고, 사제직을 독점하며 유대의 최고 정치기구인 산헤드린을 장악한 귀족인 사두개파 사람들과 서로 ‘원수지간’이라 할 만큼 관계가 좋지 않았던 자들인데 그들이 연합했다고요?

바리새파와 사두개파는 ‘신앙생활’을 하는 패턴이 달라서 사두개파 사람들은 바리새파 사람들을 향해 ‘저 꼴통보수들, 저 답답한 친구들, 저 법밖에 모르는 융통성 없는 친구들’이라고 비아냥을 했고, 바리새파 사람들은 사두개파 사람들을 향해 ‘겉만 유대인이지 속은 로마사람들과 결탁한 자’들이라고 비난했습니다.

그리고 성경에 보면 사두개파 사람들은 ‘부활과 천사’의 존재를 부정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나름대로 ‘식자층’이요 종교지도자로 여겼기 때문에 이런 광명천지에 무슨 ‘부활’이 있으며, 무슨 ‘천사’가 있을 수 있느냐고 했습니다. 이처럼 단순 비교했을 때, 바리새파와 사두개파 사람들은 ‘물과 기름’입니다.

그런데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못 박아 죽일 때도 뜻을 같이했으며, 오늘 예수님의 제자들을 감옥을 집어넣는데도 합작을 했습니다.

왜일까요? 오늘 본문은 ‘시기’라고 했습니다. ‘시기’는 헬라어로 ‘젤로스’(ζῆλος)인데 여기서 영어의 ‘질투(jealousy)’라는 표현이 나온 것입니다.

사두개파는 ‘시기’를 넘어 ‘분노’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부활이 없다’고 공공연하게 말해왔고, ‘천사’가 없다고도 공공연하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이 있었고, ‘성전 미문에서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기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청중들을 향하여 베드로와 요한이 서서 기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합니다. ‘충격’이었습니다.

아니 베드로와 요한 등 예수의 제자들은 정식으로 ‘신학’을 공부한 자들이 아니지 않은가? 그런데 어떻게 저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기탄없이 증거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무엇이 ‘군중’들을 따르게 하는 ‘부흥’이 있다는 말인가?

그래서 4장에 보면 ‘베드로와 요한’을 잡아 감옥에 가두었다가 자신들이 그렇게 부정했던 ‘부활’에 대하여 함구할 것을 ‘조건’으로 하여 베드로와 요한을 풀어주었습니다.(사도행전 4:13~21)

그런데 제자들이 오히려 ‘열심히 기도하니’ ‘터가 움직이고 성령이 임하는 역사’가 일어나 ‘꿈같은 공동체’를 이루고,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그들의 죄로 인하여 3시간 간격으로 죽어 나가는데도 불구하고 떠나는 사람들보다 더 많은 사람이 그러한 광경을 직접 목격하기도 하고 듣기도 하면서 ‘사도’에게 몰려들자 ‘분노’가 치밀어 오른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더 많은 ‘사도’들을 옥에 가두었습니다. 왜요? ‘밥그릇’을 지켜야 했기 때문입니다. ‘기득권 상실’에 대한 두려움 때문입니다. 바리새파와 사두개파 사람들은 ‘자기가 손해 보고, 소외되고, 그 이익에서 벗어나는 것’을 견디지 못했습니다.

바리새파와 사두개파 사람들은 ‘이익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그 중심 세력에서부터 벗어나지 않기 위해서 상대방을 공격’했던 것입니다. 거룩하게 말하려 하고, 합리적으로 말하고 신앙적으로 말하지만, 그 뒤에는 ‘시기와 질투’가 있는 이가 있습니다.

‘시기와 질투’는 왜 생길까요? ‘비교’ 때문입니다. 물론 ‘물건이 크다 작다. 좋다 나쁘다’라고 비교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인격의 대상’은 ‘비교’ 대상이 아니라 ‘창조의 대상’입니다.

‘인격’은 ‘인격’ 그대로가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비교’하면 어떤 일이 생길까요? 나보다 못났다면 우월감이 생기고, 나보다 잘났다고 생각하면 ‘질투’를 하게 됩니다. 특히 ‘우월감’은 남을 ‘지배’하려는 ‘교만’에 빠지고, ‘자기 이론과 자기 생각이 가장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남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을 우리는 ’가르칠 수 없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행복한 사람’은 ‘비교’하지 않고 ‘불평’하지 않고 감사합니다. 말씀과 기도로 주안에서 늘 평안 하십시오.

<변요한 목사 약력>

- 경찰청교회 시무
- 극동방송 운영위원
-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자문위원
- 대한민국국가조찬기도회 경찰자문위원
- 서울대학교 동창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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