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철칼럼] 이순신과 원균의 리더십
[김동철칼럼] 이순신과 원균의 리더십
  • 김동철
  • 승인 2017.07.25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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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동철 베이비타임즈 주필·교육학 박사 / ‘환생 이순신, 다시 쓰는 징비록’ 저자

 

이순신(李舜臣)과 원균(元均)은 동시대, 같은 무대에서 활동한 장군들이다. 그런데 역사는 이들 두 사람의 운명을 하늘과 땅처럼 머나먼 대척점에 머물게 한다. 한 사람은 승장(勝將)으로서 또 한 사람은 패장(敗將)으로 기억될 뿐이다.

‘용장(勇將)’ 원균은 포호빙하(暴虎馮河), 범을 맨손으로 때려잡고 황하를 배도 없이 건너간다는 무모함을 가졌다. 또 손자병법의 부지피부지기 매전필패(不知彼不知己 每戰必敗), 적을 모르고 자신도 모르기 때문에 매번 전투에서 질 수밖에 없는 상황을 스스로 만들었다.

게다가 용장으로서 분기충천함이 지나쳐 그의 분노는 자신의 발등을 찧는 결과를 만들었다. 1597년 7월 16일 칠천량 패전이 그 대표적인 예다.  

원균의 칠천량패전 이전의 난중일기를 살펴본다. 

<1597년 5월 8일> “元(원균)이 온갖 계략을 다 써서 나를 모함하려 하니 이 역시 운수인가. 뇌물짐이 서울로 가는 길을 연잇고 있으며, 그러면서 날이 갈수록 나를 헐뜯으니, 그저 때를 못 만난 것이 한스러울 따름이다.”
이순신은 이때 경상도 합천 초계 도원수 권율(權慄) 진영에서 백의종군을 할 때였다. 무등병이었으니 아무런 권한도 발언도 할 수 없었다.

<1597년 5월 20일> 도체찰사 이원익(李元翼)은 말한다. “원균이 무고(誣告)하는 소행이 극심한데 임금이 굽어 살피지 못하니 나라가 어찌될꼬?”

권율은 원균의 부적절한 행태를 고하는 장계를 선조와 조정에 올렸다.
“통제사 원균이 전진하려 하지 않고, 우선 안골포의 적을 먼저 쳐야 한다고 말한다. 또 그는 운주당 안으로 들어가 나오지 않으니, 절대로 여러 장수들과 합의하여 꾀하지 못할 것이므로 일을 그르칠 것이 뻔하다.”

부산포 진격명령을 차일피일 미루던 원균은 마침내 1597년 7월 11일 도원수 권율(權慄)의 호출을 받고 곤장형에 처해졌다. 도원수(현역 군최고봉인 합참의장)가 삼도수군통제사(해군참모총장)에게 곤장형을 가했다. 그러니 원균의 정신이 온전할 리가 없었다. 

그 후 정유년 1597년 7월 16일, 견내량에서 이순신의 학익진(鶴翼陣) 전법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고 후퇴했던 와키자카 야스하루 등 왜수군 함대가 절치부심(切齒腐心)하여 견내량에서 멀지 않은 칠천도 부근에서 원균의 조선수군함대와 전투를 벌였다.

이날 원균의 조선수군함대는 왜수군 함대의 설욕전(雪辱戰)의 제물이 되고 말았다. 볼기에 장을 맞아 화가 머리끝까지 오른 원균은 그야말로 실성한 상태에서 전투에 임했다. 치밀한 작전이 있을 리 만무했다. 

그 결과, 1,000여척을 동원한 왜수군에 의해 조선 수군 160척은 겹겹이 포위됐다. 야간 기습에 치열한 혼전을 벌였지만 조선전함은 모두 격침됐다. 전라우수사 이억기(李億祺), 충청수사 최호(崔湖) 등 지휘관도 전사하고 1만여 조선수군은 죽거나 흩어지고 말았다. 

원균은 아들 원사웅(元士雄)을 데리고 참전했다가 아들마저 잃었다. 패전 후 도망가다 고성 추원포(秋原浦) 뭍에 올라 왜군에 의해 참살당해 시체마저도 찾지 못했다. 분별심을 잃은 화(anger)가 조선수군의 궤멸이라는 치명적인 위험(danger)을 초래한 것이다.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기 하루 전날 경상우수사 배설(裵楔)은 12척의 판옥선을 몰고 전장을 떠나 장흥 회령포에 숨겨놓았고, 이순신 장군은 이 12척의 판옥선으로 명량해전을 치루게 된다. 

칠천량해전에 앞서 임진년 1592년 7월 8일 이순신 장군이 이끈 견내량 한산도 대첩은 왜수군 73척 가운데 59척을 분멸한 역사에 빛나는 전투였다. 견내량 부근에서 벌어졌던 이순신의 한산대첩은 세계 해전사에 기록되었다. 

견내량은 거제도와 통영만 사이에 있는 긴 수로로 길이 약 4km에 폭이 넓은 곳도 600m를 넘지 않고 암초가 많아 판옥선이 운신하고 전투를 벌이기에 좁은 해협이었다. 그러나 한산도는 거제도와 통영 사이에 있어 사방으로 툭 터져 외양으로 나아가기 용이했다. 그래서 유인(誘引)전술을 세웠다. 대여섯 척의 조선 함대를 발견한 일본 수군은 그들을 뒤쫓아 한산도 앞까지 왔다가 학익진법에 걸려 대패하고 말았다. 

이순신은 이기는 환경을 만들어 놓고 전투를 벌이는 선승구전(先勝求戰)의 전략을 활용했다. “승리하는 군대는 먼저 이길 수 있는 상황을 만들고서 싸우기를 구한다(勝兵先勝而後求戰)”는 손자병법에 따른 전략이었다. 

그 선승구전의 전략에는 적의 동태를 미리 파악하는 탐망을 적극 활용했다. 이순신에게 정보는 지가이전여 불가이전자승(知可以戰與 不可以戰者勝), 즉 싸워야할 상황과 안 될 상황을 판단하는 기준이었다. 그래서 매전완승을 기약할 수 있었다.  

다음은 1592년 7월 15일 선조와 조정에 올린 장계인 견내량파왜병장(見乃梁破倭兵狀)의 내용이다.

‘7일 고성땅 당포에 이르자 피난하여 산으로 올랐던 그 섬의 목동(牧童) 김천손(金千孫)이 신 등의 함대를 바라보고 급히 달려와서 보고하는데 적의 대중소선을 합하여 70여척이 오늘 하오 2시쯤 영등포(거제도) 앞바다로부터 거제와 고성의 경계인 견내량에 이르러 머무르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8일 이른 아침에 적선이 머루는 곳으로 배를 띄웠습니다.’ 

정유년 1597년 윤11월 17일 장계 내용이다.

‘견내량의 중요한 곳에 장소를 정하여 매복시켰는데 이달 윤 11월 3일 복병장(伏兵將0 나대용(羅大用)이 정찰 나온 왜군 1명을 사로잡았기에 심문한 내용입니다. 왜인의 이름은 망고지(마고시치 孫七) 나이는 35세입니다. 이 포로를 잡는데 공을 세운 가난한 백성인 세금(世今), 금대(今代), 덕지(德只) 등 3명의 여인들이 다른 사람들과 달리 피신하지 않고 오히려 협력하여 포로를 잡았으니 양식을 지급하여 포상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에게도 권장해야할 것입니다.’

이순신은 망산(望山)에서 보초를 서는 망군(望軍)의 정보를 적극 활용했다. 한산도의 망산, 고동을 불어 알렸다는 고동산, 전라좌수영의 뒷산인 망마산, 진도 벽파진의 망산 등이다. 또한 탐망선(探望船)을 운영했다.

<갑오년 1594년 3월 3일> ‘벽방의 망장(望將)이 보고한 내용에 왜선 6척이 오리량, 당항포 등지에 들어와 흩어져 정박해 있다고 한다. 바로 우조방장 어영담(魚泳潭)이 거느리고 적을 무찌르도록 했다.’

<정유년 1597년 9월 7일> ‘탐망군관 임준영이 와서 보고하기를 적선 55척 가운데 13척이 이미 어란 앞바다에 도착했는데 그 목적이 필시 우리 수군에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선용병자 선위불측 패적괴기소지(善用兵者 先爲不測. 敗敵乖其所之). 즉 “용병을 잘 하는 자가 먼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들면 적이 가는 방향을 어그러뜨릴 수 있다.” 당나라 때 이정(李靖)이 지은 병법서 이위공문대(李衛公問對)에 나오는 말이다. 무경칠서(武經七書) 중의 하나로 이순신 장군은 무과시험 공부를 할 때 본 병법을 적절히 활용했다.

원균의 칠천량해전에서의 패전 이후, 이순신 장군은 명량해전에서도 지형지물을 잘 이용해 중과부적(衆寡不敵)의 상황을 역전시켰다.  

원균을 칠천량에서 궤멸시킨 일본수군은 2개월 후 그 여세를 몰아 조선수군의 씨를 말리려고 전라도 끝까지 밀고 들어왔다. 이순신 장군이 확보한 전선은 판옥선 13척과 초탐선(哨探船) 32척이 전부였다. 나중에 민간 어선 100여척이 후방에서 지원세력처럼 가장하고 나타났다. 이른바 군세를 과시하는 의병(疑兵) 전술이다. 

9월 16일 이른 아침 와키자카 야스히로, 가토 요시아키, 도도 다카도라, 쿠루시마 미치후사 등 내로라하는 쟁쟁한 일본 수군장수들이 이끄는 함대 300여 척이 명량 협수로로 접근했다.

여기에 혼슈(本州) 남부 제1 항로인 세토내해(內海) 지역을 장악한 전국 다이묘(戰國大名)인 모리 테루모토(毛利輝元)도 참전했다. 모리는 임진왜란 때 제7군(직속 병력 3만명) 대장으로 참전했다가 정유재란 때 또 다시 바다를 건너왔다.

일본 수군은 선발대 31척을 먼저 보냈다. 명량수로는 길이가 약 2km, 가장 좁은 곳은 폭이 300m, 최저수심은 1.9m, 시속은 11노트(초속 6m)로 장군은 지형지세와 조류를 이용해서 진을 쳤다. 10대 1의 초라한 전력인 이순신 함대의 맨 앞에는 기함인 이순신 장군이 위치했다. 장군은 태산 같은 자세로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가장 먼저 공격에 가담했다. 이른바 솔선수범, 임전무퇴의 리더십이었다.

이러한 리더십으로 이끈 명량해전은 왜수군의 133척과 맞서 판옥선 13척과 초탐선(哨探船) 32척 중 단 1척의 피해도 없이 적선 31척을 격파해 세계 해전사에 길이 남을 승리를 거뒀다.

<김동철 주필 약력>

- 교육학 박사
- 이순신 인성리더십 포럼 대표
- 성결대 파이데이아 칼리지 겸임교수
- 문화체육관광부 인생멘토 1기 (부모교육, 청소년상담)
- 전 중앙일보 기자, 전 월간중앙 기획위원
- 저서 : ‘이순신이 다시 쓰는 징비록’ ‘무너진 학교’ ‘밥상머리 부모교육’ ‘환생 이순신, 다시 쓰는 징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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