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철칼럼] 이순신의 애민(愛民) 정신
[김동철칼럼] 이순신의 애민(愛民) 정신
  • 김동철 주필
  • 승인 2018.09.12 11:03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김동철 베이비타임즈 주필·교육학 박사 / ‘환생 이순신, 다시 쓰는 징비록’ 저자
/ 김동철 베이비타임즈 주필·교육학 박사 / ‘환생 이순신, 다시 쓰는 징비록’ 저자

갑오년 1594년(선조 27)은 흉작으로 더욱 기근(饑饉)이 심해졌고 전염병이 창궐했다. 곡물이 귀한 나머지 소 한 마리 값이 쌀 3말에 불과했고, 고급 무명 베 한 필이 쌀 서너 되밖에 안 될 정도였다. 백성들 사이에서는 사람을 서로 잡아먹는 인상식(人相食)의 지옥도가 펼쳐졌다. 급기야 사헌부는 선조에게 식인(食人)의 풍조를 단속해달라고 상소를 올렸다.

기아와 전염병이 극심했던 그해 초겨울 사간원에서 올린 상소는 수군이 처한 처절한 상황을 말해준다. 선조실록 10월의 기록이다.

“호남에서는 주사(舟師 수군)에 소속된 지방 수군은 모두 흩어지고 없어 수령이 결복(結卜 토지)에 따라 인부를 차출해 스스로 식량을 준비하도록 하여 격군(格軍, 노 젓는 수부)에 충당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 번 배에 오르기만 하면 교대할 기약도 없고, 계속 지탱할 군량도 없어 굶어죽도록 내버려 두고 시체를 바다에 던져 한산도에는 백골이 쌓여 보기에 참혹하다 합니다.”

1594년은 명나라와 왜와의 강화교섭으로 휴전상황이었다. 장군은 전쟁이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든 때 전장에서 고생하는 부하들을 위한 위로잔치를 베풀었다.

1594년 1월 21일 기록이다.

“한산도 본영의 격군 742명에게 잔치를 베풀어 술을 먹였다. 판옥선과 거북선의 대형 노를 저어야 하는 격군들은 고생이 무척 심했다. 갑판 위에서 전투를 하는 병사들과 달리 이들은 선장의 명령에 따라 동서남북, 전후좌우로 방향을 틀면서 노를 계속 저어가야 했다. 이날 저녁에는 녹도 만호 송여종(宋汝悰)이 와서 전염병으로 죽은 병사 274구의 시체를 묻어주었다는 보고를 했다.”

또 4월 20일, “삼도수군 1만 7천명 가운데 사망자가 1천 904명, 감염자는 3천 759명으로 도합 5천 663명의 전력손실이 있었다.”라고 기록됐다. 조선수군이 전염병에 의해 궤멸될 처참한 상황에 놓여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상황이 심각하게 돌아가자 장군은 의원(醫員)을 보내어 전염병을 구호해 주기를 청하는 장계를 올렸다.

4월 24일자 청송의구려장(請送醫救癘狀)이다.

“3도 수군이 한 진에 모여 있는 상태에서 봄부터 여름까지 전염병이 크게 돌았는데 약품을 많이 준비하여 백방으로 치료해보았지만 병이 나은 자는 적고 사망자는 극히 많습니다. 무고한 군사들과 백성들이 나날이 줄어들어 많은 전선을 움직이기 어렵게 되었는데 위태롭고 급한 때를 당하여 참으로 답답하고 걱정됩니다. 조정에서는 사정을 십분 참작하시어 유능한 의원을 특명으로 내려 보내어 구호하도록 해주시기를 바라나이다.”

장군 역시 전염병으로 사경(死境)을 헤맸다. 4월 25일자 기록이다. “새벽에 몸이 몹시 불편하여 하루 종일 앓았다. 보성군수 김득광(金得光)이 와서 보았다.”

4월 26일 기록. “병세가 극히 중해져서 거의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게 되었다. 곤양군수 이광악(李光岳)은 돌아갔다.”

5월 1일 기록. “하루 종일 땀이 퍼붓듯이 흘렀다. 기운이 쾌해진 것 같다. 아침에 아들 면(葂)이 들어왔다.”

7월 29일. “종일 실비가 왔다. 몸이 몹시 불편하여 끙끙 앓느라 밤을 새웠다.”

이같이 몸이 불편하다는 내용을 기록한 것은 7년의 난중일기 가운데 180여회나 나온다.

조선강토는 치열한 공방전으로 인해 시산혈해(屍山血海)가 되어버렸다. 백성과 군사들의 시체와 말의 사체가 여기저기서 썩어갔고 마땅한 소독약이 있을 리 없었던 상황에서 전염병은 급속도로 빨리 퍼져나갔다. 게다가 피죽도 못 먹어 영양실조에 걸린 백성들은 전염병에 약할 수밖에 없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훨씬 전인 1577년(선조 10)에는 백성이 462만 명으로 호적수에 나왔는데 임진왜란이 끝나고 조사를 하였을 때는 153만 명으로 엄청 줄었다. 전사자와 병사자들이 부지기수(不知其數)였음을 알 수 있는 자료다.

1595년 7월 14일 기록이다.

“늦게 개었다. 군사들에게 휴가를 주었다. 녹도만호 송여종(宋汝悰)에게 죽은 군졸들에게 제사를 지내주도록 하고 쌀 두 섬을 내어주었다.”

이날 장군은 죽은 군졸들에게 제사지낼 제문(祭文)을 지었다.

친상사장(親上事長)   윗사람을 따르고 상관을 섬기며
이진기직(爾盡其職)   그대들은 맡은 직책 다하였건만
투료윤저(投醪吮疽)   부하를 위로하고 사랑하는 일
아핍기덕(我乏其德)   나는 그런 덕이 모자랐노라
초혼동탑(招魂同榻)   그대들의 혼을 한 자리에 부르니
설전공향(設奠共享)   여기에 차린 제물을 누리시게나

여기서 투료윤저(投醪吮疽)는 ‘술을 강물에 쏟아 붓고 종기를 빨았다.’는 뜻이다. 투료(投醪)는 적은 양의 술을 많은 군사와 백성들이 다 같이 마시기 위해서 강의 상류에 쏟아서 같이 마시게 했다는 춘추전국시대 월왕(越王) 구천(勾踐)이 오왕(吳王) 부차(夫差)에게 패한 후 와신상담(臥薪嘗膽) 과정에서 나온 고사(故事)다.

또 윤저(吮疽)는 부하 병사들의 종기를 자기 입으로 직접 빨아줌으로써 부하들이 목숨을 아끼지 않고 싸우게 했다는 중국 장수 오기(吳起)의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장군은 제문을 지을 때 이 두 가지 고사를 빌려와 인용했다.

그중에 장군이 술을 강물에 쏟았다는 투료(投醪)의 일화가 전해진다. 조선 야사(野史)를 기록한 이긍익(李肯翊 1736~1806)의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이다.

1597년 9월 16일 정유재란 때 해남과 진도 사이 울돌목에서 명량해전이 벌어졌다. 조선은 군선 13척으로 왜함선 133척을 맞아 싸워야 했다. 조선 수군이 없다고 판단한 왜 수군은 명량 해협에 도착했을 때 조선군선 300여 척이 전투태세를 갖추고 있는 것에 당황했다.

왜군이 조선 군선으로 오인(誤認)한 선박이 바로 피란선(避亂船)이었다. 피란선의 일반적인 행동은 혼란스러운 것이었으나 장군의 지시에 따라 ‘배후에서 질서 정연히 바다를 오감으로써 왜군은 그들을 조선 군선으로 오인했다.’고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은 기술하고 있다.

피란선을 지휘한 사람은 오익창(吳益昌)이라는 보성의 촌로였다. 그와 장군 간의 굳건한 인간관계가 맺어진 사연은 다음과 같다.

“이순신이 병사들을 집합시켜 훈시하고 있을 때였다. 한 노인이 다가와 ‘감사합니다. 장군님이 오신 이후 왜적의 약탈이 없어져 고마움의 표시로 겨우 술 한 통을 마련해 왔으니 작은 정성으로 여겨 받아주십시오.’라고 간청했다. 노인의 청에 이순신은 훈시를 중단하고 ‘오늘은 술 마시는 날이다. 모두 술잔을 들고 다시 모여라.’라고 외쳤다. 이순신은 냇가로 내려가 병사들이 보는 앞에서 술통의 술을 냇물에 부었다. 병사들은 냇물에 흘러가는 술을 보고 못내 아쉬워했다. 이순신이 술잔에 냇물을 채운 후 잔을 들어 올리며 크게 외쳤다. ‘모두 술잔에 냇물을 채워라. 이 물은 맹물이 아니라 노인이 우리를 믿고 승리를 당부하는 술이다. 자, 모두 술을 마시자.’ 병사들 모두 술잔에 냇물을 채웠다. 그때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 잔을 쳐든 병사들은 모두 ‘승리! 승리!’를 목이 터져라 외쳤다.”

다음 날 벌어진 명량 해전에서 기적(奇蹟) 같은 승리는 장군과 휘하 장졸들과의 끈끈한 인간관계가 뒷받침됐기 때문이었다.

장군은 또 고생하는 군사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1595년 8월 27일 기록이다.

“군사 5천 480명에게 음식을 먹였다. 저녁에 상봉(上峯)으로 올라가서 적진과 적선들의 왕래하는 길을 체찰사 이원익(李元翼) 일행에게 가리켜 주었다. 바람이 몹시 사나워 저녁이 되기에 도로 내려왔다.”

5천 480명의 군사들에게 음식을 먹인 일에 대해서 좀 더 살펴본다.

한산도 삼도수군통제영으로 찾아온 체찰사(군총사령관) 이원익이 진중에 들렀을 때 장군이 체찰사에게 “여기까지 오셨다가 그냥 가시면 군사들이 많이 실망하게 될 터이니 음식을 내려 사기를 올려주십시오.”라고 청했다. 그러자 체찰사는 “내가 미처 준비를 해오지 못했으니 어쩌겠소.”라며 난처해했다. 그때 장군이 “음식은 제가 준비해 놓았으니 체찰사 대감의 이름으로 주시면 되지 않습니까.”라고 했다.

체찰사 이원익은 장군의 세심한 배려에 너무나 고마워했다. 장군과 체찰사 이원익과의 인간관계는 왜란 내내 끈끈해졌다.

장군은 또 병사들의 노고를 풀어주었다. 1596년 5월 5일 기록이다.

“이날 새벽에 제(祭)를 지냈다. 일찍 아침밥을 먹고 나가 공무를 보았다. 회령포 만호가 교서(敎書)에 숙배(肅拜)한 뒤에 여러 장수들이 와서 모이고 그대로 들어가 앉아서 위로주(慰勞酒)를 네 순배 돌렸다. 경상 수사는 술잔 돌리기가 한창일 때쯤 씨름을 시켰는데 낙안 군수 임계형이 일등이었다. 밤이 깊도록 이들을 즐겁게 뛰놀게 한 것은 굳이 즐겁게만 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만 오랫동안 고생하는 장병들에게 노고를 풀어주고자 한 계획이었다.”

장군의 자는 여해(汝諧)다. 너, ‘여(汝)’ 자에 화합하여 조화롭게 하라는 ‘해(諧)’ 자가 들어있다. ‘동네형’ 류성룡(柳成龍)이 지어준 이름답게 장군은 화합과 조화를 끊임없이 실천했다. 지휘관의 솔선수범, 선공후사, 임전무퇴 정신 등은 모두 애민(愛民) 정신의 발로다. 23전 23승의 불패의 기록은 이같은 애민 정신의 바탕 위에서 세워진 것이다.

장군의 자는 여해(汝諧)다. 너, ‘여(汝)’ 자에 화합하여 조화롭게 하라는 ‘해(諧)’ 자가 들어있다. 동네형이었던 류성룡(柳成龍)이 지어준 이름답게 장군은 화합과 조화를 끊임없이 실천했다. 지휘관의 솔선수범, 선공후사, 임전무퇴 정신 등은 모두 애민(愛民) 정신의 발로다. 23전 23승의 불패의 기록은 이같은 애민 정신의 바탕 위에서 세워진 것이다.

 

<김동철 주필 약력> 
- 교육학 박사
- 이순신 인성리더십 포럼 대표
- 성결대 교양학부 교수
- 이순신리더십국제센터 운영자문위원장, 석좌교수
- (사)대한민국 해군협회 연구위원
- 전 중앙일보 기자, 전 월간중앙 기획위원
- 저서 : ‘환생 이순신, 다시 쓰는 징비록’ ‘우리가 꼭 한번 만나야 하는 이순신’ ‘국민멘토 이순신 유적답사기1’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