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건교사 전희정 칼럼] 보건교사는 “휴가 중”
[보건교사 전희정 칼럼] 보건교사는 “휴가 중”
  • 송지나 기자
  • 승인 2021.12.02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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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희정 전국보건교사회 학술이사
전희정 전국보건교사회 학술이사

우리나라 「어린이헌장」에 나와 있는 ‘어린이는 나라와 겨레의 앞날을 이어나갈 새 사람이므로 그들의 몸과 마음을 귀히 여겨 옳고 아름답고 씩씩하게 자라도록 힘써야 한다’는 말이 보건교사인 나에게는 더욱 특별히 다가온다. 특히 ‘그들의 몸과 마음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은 초등학교 보건교사로 첫 발령을 받았을 때의 첫 마음으로, 지금까지 변치 않는 마음이기도 하다.

보건교사는 ‘소명(calling)’이자 ‘사명(mission)’

1994년 나는 120년의 역사를 지닌 이대 동대문병원 간호사 소아과에 어린이를 위한 간호사로 사회의 첫발을 내디뎠다. 아파서 병동이 쩌렁쩌렁할 정도로 울며 들어왔던 아이가 다시 건강을 되찾아 천사처럼 아름다운 미소로 인사하고 퇴원할 때면 그동안 간호를 하며 힘들었던 모든 일이 한순간에 사라지고 ‘간호사 하길 참 잘했다’는 마음과 보람을 느꼈다.

어느 날은 병실마다 돌아다니며 점심 약을 나눠주는데 한 아이가 계속해서 뒤따라오다 내가 병실 안으로 들어가면 병실 문 밖에 숨어버리고, 또 다음 병실로 가면 또 병실 문 밖에 숨어버리기를 몇 번을 반복했다. 나는 그 아이에게 먼저 웃으며 다가가 “선생님에게 무슨 할 말 있니? 선생님이 도와줄까?”라고 물었다. 그러자 아이는 자그마한 두 손으로 초콜릿을 수줍게 건네며 “저 오늘 퇴원하는데 선생님이 생각이 나서요.”라고 말하고는 씨익 웃으며 얼른 자기 병실로 우당탕 달려갔다. 그때의 우당탕 소리가 내 귀에는 세상에서 제일 행복하고 건강한 소리로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있다.

그렇게 3년 가까이 근무하면서 아픈 어린이들을 보기만 해도 늘 마음이 아팠던지라 아이들이 아파서 병원에 오지 않도록 건강할 때 건강의 소중함을 지킬 수 있게 가르쳐주는 보건교사의 꿈을 갖게 됐다. 그리고 그 꿈을 이뤄 나라의 미래와 희망인 어린이들의 건강관리와 보건교육을 하는 보건교사로 근무한 지 벌써 23년차가 됐다.

첫 번째 사명(mission), 수다쟁이 보건교사

한번은 멀리 있는 친구가 보고 싶다고 불쑥 보건실에 찾아온 적이 있다. 정말 오랜만에 만나 너무 반가웠는데 보건실에 쉴 새 없이 찾아오는 학생들로 인해 이야기를 나눌 수가 없어 잠시 상담실에 앉아있도록 했다.

학생들의 건강 문제들을 하나하나 해결해주고 드디어 반가운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는데 친구의 첫마디가 “와, 너 이렇게 수다쟁이였니?”였다. 건강 문제의 원인을 찾기 위해 아이들마다 묻고 답하는 과정에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들로 쉴 새 없이 말을 하고 듣는 내 모습이 친구가 평소에 알던 조용한 내 모습과는 많이 달라 놀랐다고 했다. 정말 놀라는 표정이 친구의 얼굴에 역력해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었다.

보건교사는 수다쟁이여야 한다. 특히 초등학교 보건교사가 더 수다쟁이여야 하는 이유는 정확한 건강사정을 위해서이다. 학생의 건강 문제를 사정할 때 문진, 시진, 청진, 촉진, 타진 등 다양한 자료수집 방법으로 능숙하게 해내야 한다. 그중 문진할 때 수다쟁이 보건교사가 빛을 발한다. 아픈 증상이 몸이 아파서인지 마음이 아파서인지 문진으로 구별해내야 적절한 처치로 도움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어느 날 1학년을 맡은 한 담임교사에게 전화가 왔다. 반 학생이 얼굴 전체가 빨개지는데 한 교시가 지나도록 빨간 얼굴이 계속되면서 조금 어지럼증까지 있어 걱정된다고 다급한 목소리로 보건실로 보내겠다고 하셨다.

보건실 문을 스르르 열고 들어오는 학생의 모습은 한눈에 알아볼 정도로 빨갰다. 이유를 찾기 위해 평소와 같이 수다쟁이처럼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으로 확인한 결과 엄마가 소화에 도움 되라고 싸주신 매실차가 원인인 것을 알아냈다. 담임교사를 통해 학생의 엄마와 연락해 확인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아이가 학교에 늦을까 봐 급하게 챙겨 보내느라 매실청 원액에 물을 탄다는 것을 깜빡하고 아이의 책가방 안에 넣어두었다는 것이다.

또 어느 날은 머리가 아프다며 온 1학년 학생이 “선생님 교실 벽시계가 고장이 났나 봐요. 시간이 안 가요”라고 말했다. 아이와 대화해보니 실제로 시계가 멈춘 것은 아니었다. 그 순간 나는 아이가 지금 배우는 내용이 어렵거나, 흥미가 없어 자리에 앉아있는 시간이 불편해 머리가 아픈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에 여러 가지를 되물었더니 아이는 공부하면서 시간이 지났을까 하고 시계를 자꾸 쳐다봐도 시계가 계속 멈춰있는 것만 같았고 그렇게 생각되니 머리가 더 아팠다고 했다.

이와 같이 보건교사가 수다쟁이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때 아파서 보건실에 오는 학생들의 건강 문제를 정확하게 알아봐 주고, 경청해주며, 공감해주고 있다는 메시지가 덤으로 전해져 학교에서 최고의 친구가 될 수 있다.

사실 내가 수다쟁이 보건교사가 되는 또 다른 이유는 아픈 학생들에게 건강관리 지도에 대한 대화를 많이 할수록 학생의 건강관리를 위한 인지 능력 향상에 도움을 줄 수 있어서이다.

2019년 영국 오크대학교 연구진은 수다쟁이 부모가 자녀의 인지 능력 발달에 도움이 된다는 연구 결과를 과학 전문지 ‘사이언스 데일리’에 발표했다. 즉 부모와 더 많은 대화를 한 아이들이 인지발달이 높다는 것이다. 그래서 난 부모의 마음으로 마음껏 수다쟁이 보건교사 역할을 자처한다.

두 번째 사명(mission), 뇌과학과 친구가 되고 싶은 보건교사

학생들에게 보건교육 마지막 시간에 그동안 배운 내용을 떠올려보며 보건교육에 대한 가치사전 만들기를 한 적이 있다. 보건교육에 자기만의 소중한 가치를 부여해 사전적 의미를 만들어내는 학생들을 보면서 보건교사의 사명을 잘 감당하고 있는지 뒤돌아보게 됐다.

한 학생이 ‘보건이란 내 머리 안에 있는 휴대용 의사다’라고 발표했다. 그 이유를 묻자 머릿속에서 저장해 둔 보건교육 내용을 건강을 지켜야 하는 순간 언제든지 소환해낼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평상시 내가 했던 보건교육의 효과성을 뇌과학적으로 검증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는데, 이 학생의 말을 듣는 순간 진짜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한국교원대학교 교육대학원 뇌기반교육 석사과정에 도전하게 됐다. 그리고 흡연 청소년의 금연교육 내용에 따라 금연의 효과성을 검증해보는 연구로 뇌 영역의 차이가 있는 논문을 발표하고 인준을 받아 올해 졸업하면서 뇌과학과 친구가 됐다.

뇌과학은 보건교육뿐만 아니라 학생 건강관리에서도 많은 도움이 된다. 처음 학기 때 ‘사회적 뇌’ 과목에서 기존 해외 논문을 발표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이때 논문을 통해 몸의 고통과 마음의 고통을 해석하는 뇌의 영역이 같다는 내용을 배우게 됐다.

이를 통해 몸의 상처를 보호하기 위해 정성을 다해 처치하듯 마음의 상처 또한 마음보호밴드를 항상 준비하고 있어야 하는 이유를 뇌과학적으로 알게 됐다.

또한 첫 번째 사명으로 여겼던 수다쟁이 보건교사로 학생들의 마음에 공감해주며 건강을 돌보는 것이 옳은 선택이었다는 것도 함께 알게 되었다.

그 순간 매일 보건실을 다녀갈 때마다 보건실 문 앞 안내판을 ‘휴가중’으로 돌려놓으며 “보건샘, 오늘은 제주도 갔다 오세요!” 외치던 학생이 문득 떠올랐다. 하루는 그 친구에게 왜 보건실 문을 나갈 때 안내판을 ‘휴가중’으로 바꾸는지 물었다. 그랬더니 아픈 학생 돌보느라 쉴 수 없는 보건 선생님께 상상 속 휴가라도 보내드리고 싶어서란다. 어쩜 이런 창의적이고 기특한 생각을 하는지…. 나는 ‘보건교사 하길 참 잘했다’고 속으로 되뇌며 아이의 말처럼 잠시 눈을 감고 제주도에서 휴가 중인 나를 상상했다.

몸과 마음의 아픔 구분 없이 뇌에서는 같은 아픔으로 느낀다는 뇌과학 연구를 알게 된 후 초능력 수다쟁이 보건교사가 되어가는 것 같다. 그리고 나와 같이 학생들의 몸과 마음을 귀하게 여기는 수많은 보건교사들에게 뇌과학과 꼭 친구가 되길 권하고 싶다.

 

<전희정 보건교사 프로필>
- 한국교원대학교 교육대학원 뇌기반교육 석사 졸업
- 現) 전국 보건교사회 학술이사
- 現) 서울특별시보건교사회 학술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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