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철칼럼] 의병(義兵)의 봉기
[김동철칼럼] 의병(義兵)의 봉기
  • 김동철
  • 승인 2017.12.04 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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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동철 베이비타임즈 주필·교육학 박사 / ‘환생 이순신, 다시 쓰는 징비록’ 저자

 

6월 호국보훈의 달 첫째 날인 1일은 의병의 날이다. 홍의장군 곽재우(郭再祐)가 4월 22일 경남 의령에서 의병을 모집, 파죽지세로 밀려오는 일본군을 맞아 적을 교란시킨 것을 기념하기 위한 날이다. 

1592년 4월 13일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이끄는 왜군 선봉대 1만8,700명이 700여 척의 병선에 나눠 타고 쓰시마 섬 오우라항을 출항해 부산포로 쳐들어왔다. 부산진 첨사 정발(鄭撥)은 적과 싸우다 전사했고, 부산성은 함락됐다. 다음날 일본군이 동래성을 공격하자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은 군민과 더불어 항전하다 전사했다.

그 후 18일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제2번대가 부산에, 구로다 나가마사(黒田長政)의 제3번대가 다대포를 거쳐 김해에 상륙했다. 개전 초기 4~5월에 걸쳐 제4~9번대에 이르는 후속부대가 속속 상륙하여 조선 땅에 상륙한 왜군의 총 병력은 약 20만 여명에 달했다. 여기에는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 安治) 등 왜수군 병력 약 9천명이 포함된다.

부산진과 동래성을 함락한 일본군은 세 갈래로 나뉘어 한성을 향해 북진했다. 상륙한 지 20 만인 5월 3일 한성을 무혈점령하고, 군대를 재편하여 고니시는 평안도, 가토는 함경도, 구로다는 황해도로 진격했다. 6월 14일 고니시의 평양성 함락과 가토의 함경도 점령 등 왜군이 부산에 상륙한 후 2개월만에 조선 강토는 거의 유린됐다.

태풍 앞의 촛불신세가 된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선조는 6월 22일 북쪽 압록강변 의주로 파천했다. 당대 명장이라던 신립(申砬)과 참모장 김여물(金汝岉) 장군은 충주 탄금대 전투에서 고니시 군에게 궤멸된 뒤 강물로 뛰어들었다. 이보다 며칠 앞서 이일(李鎰)은 상주 전투에서 대패하고 민간인 복장을 한 채 어디론가 달아나 버렸다. 

조선강토가 시체로 산을 이루고 핏물이 강을 만드는 시산혈해의 현장이 됐을 때, 어디선가 난데없이 커다란 함성이 들리기 시작했다. 의병(義兵)이었다. 낫과 도끼, 쇠스랑, 죽창을 든 의병이 일어난 것이다. 

왜군이 조선을 침략한 후 가장 놀란 것은 첫째 왕이 한성을 버리고 피난 갔다는 사실과 둘째 전혀 예상치 못했던 하얀 옷을 입은 농부들이 떼를 지어 나타나 왜군을 괴롭힌 것이었다.

왜군은 북상 속도가 빨랐던 만큼, 병참 보급선이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주요 지점에 겨우 소규모의 왜군을 배치하는 일점일로(一點一路)의 형세를 띠었는데 의병들은 그 기다란 보급선을 쑤시고 찌르고 치고 빠지는 게릴라전으로 대응했다. 

누란(累卵)의 위기를 맞아 나라를 지키겠다고 일어난 의병들은 죽고자하면 살 것이라는 사즉생(死卽生)의 사생관으로 똘똘 뭉쳐 있었다.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모르는 의병들 때문에 일본군 수뇌부는 골머리를 앓았다.

조선의 억불숭유(抑佛崇儒) 정책으로 천민대우를 받던 승려 영규(靈圭)와 서산대사(西山大師), 사명당(四溟堂) 같은 승병 지휘부도 움직여 호국불교의 전통을 세웠다. 특히 과거시험 등용에서 소외당하고 푸대접 받던 함경도에서 정문부(鄭文孚)가 의병을 일으켜 두 왕자(임해군, 순화군)를 가토 기요마사에게 넘겨준 국경인(鞠景仁)과 국세필(世弼)을 처단하고 가토 군사와 전투도 벌였다.

정문부 의병 200여명은 가토의 2만 2천명과 붙어 북관대첩에서 크게 승리했다. 그래서 북관대첩비를 세웠는데 1905년 러일전쟁 때 북진하던 일본군이 함북 길주에서 북관대첩비를 발견, 일본으로 가져가 군국주의의 상징인 도쿄 야스쿠니 신사 구석에 방치했다. 우연히 발견된 북관대첩비는 우리 정부와 민간단체의 꾸준한 반환요구로 2006년 북한 땅 원래의 자리로 되돌려 주었다. 현재 경복궁 뜰에 있는 북관대첩비는 모조품이다.

퇴계 이황(李滉)과 남명 조식(曺植)은 모두 현실정치를 비판했지만, 성리학에 대한 견해는 달랐다. 이황은 주자학을 받아들이고 그 이론에 천착했다. 그러나 조식은 성리학 외에도 노장사상(무위자연을 도덕으로 삼고 허무를 우주의 근본으로 생각함)을 포용하고 그 실천에 주안점을 두었다. 즉 이황이 ‘이론의 대가’였다면 조식은 ‘실천의 달인’이었다.

남명 조식은 “성인의 뜻은 이미 앞서 간 학자들이 다 밝혀 놓았다. 그러니 지금 학자들은 모르는 것을 걱정할 것이 아니라, 알고 있는 것을 실천하지 못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야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즉 지행합일(知行合一)을 가르친 것이다.

그런 이유로 조식의 제자들은 의병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 조식의 제자 가운데 임진왜란 때 괄목할만한 활약을 한 의병장으로는 ‘홍의장군(紅衣將軍)’ 곽재우와 정인홍(鄭仁弘)이 있었다.

백척간두의 위기상황에서 붉은 옷의 곽재우는 4월 22일 경상도 의령에서 제일 먼저 의병을 일으켰다. 그는 영남에서 호남으로 들어가는 길목인 정암진(鼎巖津 의령과 함안 사이 남강 나루)을 지키는 데 성공했다. 또 10월 진주성 전투 때 외곽에서 치고 빠지는 게릴라 전술로 왜군을 교란시켰다.

정인홍은 합천에서 58세의 나이에 직접 의병을 일으켰다. 의병장 정인홍 휘하에는 수천 명의 군사가 몰려들었다. 관군은 이미 몰락했고 여타 군소 의병장들과 다르게 그 위세가 당당했다. 정인홍은 낙동강 수로를 막고 일본군의 병참 보급 물자의 왕래를 차단 또는 교란했다. 정인홍과 곽재우의 활약으로 경상우도는 비교적 피해가 적었다. 그리고 바다에서 이순신이 왜군의 남해 및 서해진출을 막았기 때문에 전라도가 온전할 수 있었다.

5월 7일 이순신 수군이 옥포해전에서 승리했다는 장계가 피난 조정에 도착했다. 그날은 선조가 평양성에 도착한 날이었다. 6월 11일 선조는 평양성을 떠나 의주로 향하고 있었다. 이순신의 연전연승 장계가 속속 도착하자, 선조와 조정은 기쁨에 환호했다. 그러나 승전 분위기도 잠시, 선조는 처량한 신세였다. 

전라도를 방어하기 위한 전투는 치열했다. 6월 27일 의병장 고경명(高敬命)이 금산전투에서 전사했다. 7월 7일에는 웅치 전투에서 조선관군과 의병이 전원 전사했다.  

이즈음 세자 광해군의 분조(分朝 임시조정)가 생겨났다. 선조는 여차하면 명나라 요동으로 건너갈 셈이었으니 조선 땅에 남아 전쟁을 치를 광해군의 분조가 필요했다. 광해군은 분조를 이끌면서 평안도, 황해도, 함경도, 강원도 지역을 옮겨 다니면서 군대와 백성을 위무(慰撫)하고 의병활동을 격려했다.

또 강원도 이천에 머물던 7월에는 전라도 의병장 김천일(金千鎰)에게 항전(抗戰)을 독려하는 격문(檄文)을 보냈다. 전라도 나주에서 의병을 일으킨 김천일은 수백 명의 의병을 이끌고 강화로 들어가 조정과 호남 사이의 연락을 맡았다. 그는 진주성 전투에서 전사했다.

광해군은 또 이조 참의 이정암(李廷馣)에게 황해도 연안읍성을 사수하라는 명을 내렸고 여기서 의병 500여명을 모집, 8월 27일부터 9월 2일까지 구로다 나가마사(黒田長政)가 이끄는 왜군 5,000명의 공격을 막아냈다.

호남 의병장 김덕령(金德齡)은 억울하게 죽었다. 20대 혈기 방장한 김덕령은 김천일과 최경회의 의병군이 전멸한 뒤 담양에서 의병을 조직했다. 서인(西人)인 우계 성혼(成渾)의 문인이었던 김덕령은 1596년(선조 29) 7월 6일 충청도 홍주(홍성)에서 이몽학(李夢鶴)이 난을 일으키자 진압하러 가다가 난이 평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되돌아갔다. 그 일로 반란수괴 이몽학과 내통했다는 무고(誣告)로 끝내 죽어야 했다.

선조수정실록에 따르면, 류성룡(柳成龍)은 김덕령의 치죄를 신중히 따져가며 하도록 간했으나 윤근수(尹根壽)의 형이기도 했던 서인인 판중추부사 윤두수(尹斗壽)는 엄벌을 주장했다. 김덕령은 수백 번의 형장 심문으로 마침내 정강이뼈가 모두 부러질 정도로 혹독한 고문을 받아 결국 장독(杖毒)을 견디지 못해 죽고 말았다. 향년 30세였다.
죽음을 직감한 김덕령은 ‘춘산곡(春山曲)’이라는 시조를 지어 자신의 답답하고 억울 심정을 토해냈다. 

  춘산에 불이 나니 못다 핀 꽃 다 붙는다.
  저 뫼 저 불은 끌 물이나 있거니와
  이 몸에 내 없는 불이 나니 끌 물 없어 하노라


김덕령의 죽음으로 의병(義兵)에 나서면 집안이 망한다는 인식이 퍼졌고 이로 인해 1597년 정유재란 때에는 의병의 씨를 찾아볼 수 없었다.

<김동철 주필 약력>  

- 교육학 박사
- 이순신 인성리더십 포럼 대표
- 성결대 파이데이아 칼리지 겸임교수
- 문화체육관광부 인생멘토 1기 (부모교육, 청소년상담)
- 전 중앙일보 기자, 전 월간중앙 기획위원
- 저서 : ‘이순신이 다시 쓰는 징비록’ ‘무너진 학교’ ‘밥상머리 부모교육’ ‘환생 이순신, 다시 쓰는 징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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