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철칼럼] 조선의 탕평책(蕩平策)
[김동철칼럼] 조선의 탕평책(蕩平策)
  • 김동철
  • 승인 2017.05.31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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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동철 베이비타임즈 주필·교육학 박사 / ‘환생 이순신, 다시 쓰는 징비록’ 저자

 

영조의 탕평책(蕩平策)은 1727년 탕평교서를 반포하고, 1742년 성균관에 탕평비를 건립하는 것으로 구체화됐다. 성균관에 탕평비를 세운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앞으로 관료가 되더라도 선배들의 ‘망국적(亡國的) 당습(黨習)’에 물들지 말라는 경계의 뜻이었다.

다음은 영조가 탕평비에 쓴 탕평비문이다. 

 주이불비(周而弗比) 두루 원만하여 치우쳐 편을 가르지 않음이
 내군자지공심(乃君子之公心) 군자의 공평한 마음이요
 비이불주(比而弗周) 한 곳으로 편을 가르고 공평하지 못한 것은 
 식소인지사의(寔小人之私意) 이것이야말로 소인의 사사로운 마음이다

‘탕평(蕩平)’이란 상서(尙書)의 홍범구주(洪範九疇) 제5조인 황극설(皇極說)의 “무편무당(無偏無黨) 왕도탕탕(王道蕩蕩) 무당무편(無黨無偏) 왕도평평(王道平平)”에서 나온 말이다. 즉, 인군(人君)의 정치가 편사(偏私)가 없고 아당(阿黨)이 없는 대공지정(大公至正)의 지경(皇極)에 이름을 말한다.

송대(宋代)의 주자(朱子) 또한 그의 붕당관(朋黨觀)을 피력한 여유승상서(與留丞相書)에서 붕당 간 논쟁의 시비(是非)를 명변(明辨)함에 의한 조정의 탕평을 말했다. 따라서 탕평이라는 말은 인군정치의 지공무사(至公無私)를 강조하는 말이다.    

물론 당리당략과 사리사욕으로 어지러운 현실정치에서 탕평책이야말로 사람이 다다를 수 없는 이상적 권력구조를 말하는 것이리라.    
 
조선 21대 영조(1694~1776년)하면 그의 손자인 정조와 더불어 조선 후기 정치와 문화의 중흥(中興)을 이룩한 군주라는 생각이 먼저 떠오른다. 

숙종 후반은 노론과 소론, 남인 간의 치열한 당쟁으로 영조가 왕위에 오르는 과정이 순탄하지 못했다. 장희빈(張禧嬪) 소생의 이복형인 경종이 소론의 지원에 의해 왕위에 오른 뒤 영조는 노론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았지만 왕세제 위치는 늘 살얼음판 같았다. 

그런데 경종이 갑자기 죽자 1724년 왕위에 오른 영조는 뼈저리게 느꼈던 당쟁의 참상(慘狀)을 없애고자 취임 일성으로 탕평(蕩平)을 내세웠다.

1724년 영조가 즉위한 때는 자신의 세제책립과 대리청정을 바라지 않던 소론의 영수 이광좌(李光佐)가 정권을 잡고 있었다. 영조는 즉위하자마자 바로 소론의 거두인 김일경(金一鏡), 남인의 목호룡(睦虎龍) 등 신임옥사를 일으킨 자들을 숙청했다.

그리고 1725년(영조 1) 을사처분(乙巳處分)으로 자신의 지원세력인 노론을 다시 조정에 포진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주도하는 탕평정국(蕩平政局)의 앞날은 불투명했다. 노론의 강경파들이 소론을 공격하는 등 노론과 소론의 파쟁이 다시 시작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1727년에는 노론의 강경파들을 축출했다. 이어 1729년에는 기유처분(己酉處分)으로 노론과 소론 내 온건파들을 고르게 등용해 탕평책의 기초를 마련했다. 

영조 4년인 1728년 이인좌, 정희량, 박필몽 등 소론과 남인 급진파 등이 무신난(武臣亂)을 일으켰다. 반란의 주도층은 선왕 경종의 억울한 죽음을 천명하면서 ‘의거(義擧)’, 즉 정의를 위해 궐기한다고 선포했다. 반군 지도자 이인좌는 한 때 청주성을 점령하면서 위세를 떨쳤으나 소론 출신 오명항(吳命恒)이 이끄는 정부 토벌군에 의해 진압됐다. 

무신난은 소론과 남인 급진파가 주도해 일으켰기 때문에 영조는 반란 토벌 후 다시 노론 중심의 정치체제를 끌고 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영조는 반란의 원인을 ‘조정에서 붕당(朋黨)만을 일삼아 재능 있는 자를 등용하지 않은 데 있다’고 파악하고 무신난을 통해 탕평책을 더욱 공고히 추진하는 계기로 삼았다. 

 “내가 덕이 부족한 탓으로 국가가 판탕(板蕩 국가가 어지러움)한 때를 당해 안으로는 조정의 모습을 평화롭게 하지 못하고, 밖으로는 우리 백성들을 구제하지 못해 간신이 흉악한 뜻을 함부로 행해 호남과 경기에서 창궐하게 만들었으니, 통탄함을 금할 수 없다. (중략) 그 하나는 조정에서 오직 붕당만을 일삼아 재능 있는 자의 등용을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색목(色目)만을 추중하고 권장하는 데 있다. (중략) 백성이 적도(賊徒)에게 합류한 것은 그들의 죄가 아니요, 실로 조정의 허물이니 이 역시 당의(黨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이른바 하나도 붕당이요, 둘도 붕당이라는 것이다.”

무신난 이듬해인 1729년 영조는 기유처분(己酉處分), 즉 당파 간 의리를 가리지 않고 인재를 쓰겠다는 탕평을 반포했다.

 “오늘의 역변은 당론에서 비롯된 것이니, 지금 당론을 말하는 자는 누구든 역적으로 처단하겠다.”   

그래서 영조는 재능에 따라 인재를 등용하는 유재시용(惟才是用)의 인사정책을 시행했다. 노론, 소론, 남인, 소북 등 사색(四色)을 고루 등용했다. 그리고 영조는 당쟁의 뿌리를 제거하기 위해 사림(士林) 등 유학자 집단의 정치 관여를 계속 견제했다. 은둔한 산림(山林)의 ‘훈수 두기식’ 공론(公論)을 일절 인정하지 않았고, 사림 세력의 본거지인 서원을 대폭 정리했다. 

1742년(영조 18)에는 ‘붕당이 대개 홍문관의 관원을 뽑는 데 한 원인이 있다’하여 그 전선(銓選)의 방법을 고치기도 하였다. 종래 이조전랑이 행사하던 언관(言官)의 통청권은 이조판서에게 돌아가고, 한천법(翰薦法, 후임자를 뽑을 수 있는 권리)은 회권(會圈)으로 변해 재상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이와 같은 이조전랑 통청권의 폐지와 한천법의 개혁은 결과적으로 선조 대 이래 지속되어온 파당정치의 사실상의 붕괴를 의미하였다. 

영조는 탕평책을 펼치는 자리에서 탕평채(蕩平菜)라는 음식을 내놓아 탕평 의지를 보여주었다. 1849년에 편찬된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따르면 탕평채(蕩平菜)는 채 썬 청포묵, 쇠고기, 숙주나물, 미나리, 물쑥 등이 주재료인데 들어가는 재료의 색은 각 붕당을 상징했다. 

즉 청포묵의 흰색은 서인을, 쇠고기의 붉은 색은 남인을, 미나리의 푸른색은 동인을, 김의 검은 색은 북인을 각각 상징했다. 각각 다른 색깔과 향의 재료들이 서로 섞여 조화로운 맛을 이뤄내는 탕평채는 영조의 탕평책을 상징한 은유였던 것이다. 

영조 대 중반부터 후반까지 척신(戚臣)으로 당을 이룬 남당과 북당, 그리고 청류(淸流)를 자처하는 동당이 정국 구도를 이룬 가운데 즉위한 정조는 노론의 우위 여부를 문제 삼는 기존의 두 척신당의 틈바구니에서 왕정체제 확립의 한계를 절감했다. 

이 같은 심각한 상황을 인식한 정조는 그 동안 두 척신당에 비판을 가해온 청류를 조정의 중심부로 끌어들여 이른바 청류(淸流) 탕평(蕩平)을 펼쳤다. 

그러나 다른 당색도 배제하지 않은 채 정조 스스로 규장각 및 초계문신제도(抄啓文臣制度, 정3품 이하 당하관 문신을 뽑아 규장각에서 왕명에 따른 특별연구를 시킴)를 통해 비노론계의 진출을 활성화시켜갔다.

1788년(정조 12)에는 채제공(蔡濟恭)을 비롯한 남인세력을 본격적으로 등용해 노론과 남인의 보합(保合)을 도모하였다. 정조는 조제(調制), 보합의 인재 등용을 골자로 하는 탕평책을 계승하면서 사대부의 의리와 명절(名節)을 중시해온 청류들을 대폭 기용했던 것이다. 

한편, 1788년에서 1795년 사이에 시파(時派, 사도세자 지지파)와 벽파(僻派 사도세자 반대파)가 표면화된 뒤 사색(四色)은 명색만 남고 정국은 완전히 이 두 파로 재편됐다. 특히 정조의 정책을 지지하는 시파의 부각에 위기를 느낀 벽파의 결집 및 공세가 두드러졌다. 

정조는 고육책(苦肉策)으로 선왕 영조의 뜻을 이어 받아 탕평의 조화에 힘썼다. 그는 침실을 ‘탕탕평평실(蕩蕩平平室)’이라 이름 짓고 사색을 고르게 등용해 당론의 융화에 심혈을 기울였다.

영정조 대에 꾀해진 탕평정책은 전제왕조 대에 격렬한 파당간의 갈등을 어느 정도 해소시켜 정국을 이끌어 나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왕권 강화를 위한 척족 세력을 이용하면서 또 다른 문제를 발생시켰다. 

더욱이 사색등용정책에 따라 배제된 구 정치세력을 다시 불러들여 새로운 정쟁(政爭)을 낳게 하였다. 정조 이후 순조, 헌종, 철종, 고종, 순종 등의 시대에 외척의 세도정치(勢道政治)가 등장하는 빌미를 제공한 점은 커다란 과(過)로 남는다. 안동 김씨 김조순(金祖淳)을 비롯해 풍양 조씨, 전의 이씨, 여흥 민씨 등 외척세력이 구한말 정국을 좌지우지했기 때문이다. 

나라 안에서는 부패한 외척들의 세도가 극성을 부리는 가운데 프랑스, 미국, 청나라, 러시아, 일본, 독일, 영국 등 외세(外勢)는 망조(亡兆)가 든 조선을 집어삼킬 궁리를 하면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어쩜 그리 같을 수 있단 말인가. 오호! 통재(痛哉)라.

<김동철 주필 약력>

- 교육학 박사
- 이순신 인성리더십 포럼 대표
- 성결대 파이데이아 칼리지 겸임교수
- 문화체육관광부 인생멘토 1기 (부모교육, 청소년상담)
- 전 중앙일보 기자, 전 월간중앙 기획위원
- 저서 : ‘이순신이 다시 쓰는 징비록’ ‘무너진 학교’ ‘밥상머리 부모교육’ ‘환생 이순신, 다시 쓰는 징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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