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철칼럼] 호국보훈의 달에 찾은 인성 멘토
[김동철칼럼] 호국보훈의 달에 찾은 인성 멘토
  • 김동철
  • 승인 2016.07.01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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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동철 베이비타임즈 주필/교육학 박사

 

채명신 장군 “나를 부하 사병들 곁에 묻어달라”
사병묘역에 묻힌 영원한 이 시대의 인성 멘토

떠날 때를 아는 사람의 뒷모습은 아름답다.

우리는 누구나 한번 태어나면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운명을 가졌다. 인생을 살면서 자신이 목표로 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 때로는 동지를 얻어 협동하고 때론 홀로 고군분투하기도 한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고 한다. 사람이 떠나고 난 뒤에 그 사람에 대한 평가는 있게 마련이다. 이왕 태어나서 한 평생을 살았다면 홀로 호의호식하면서 살다 가는 것보다 주변인 또는 사회, 국가에 좋은 영향을 남기고 가는 사람이 더 아름다울 것이다.

하지만 평범한 우리네들이 쉽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이 대목에서 떠오르는 역사적 인물은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 풍전등화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한 충무공 이순신 장군,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 의사(義士) 등이다.


6월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을 찾았다. 인성교육을 하는 사람으로서 서울 시내에서 쉽게 갈 수 있는 곳이 바로 그곳이기 때문이다.

국립현충원에는 일제시대 때 독립운동을 한 애국지사, 6·25 한국전쟁에서 자유를 수호하기위해 산화(散華)한 수많은 군인과 학도병들, 그리고 오로지 나라사랑 충(忠)과 올곧은 의(義)를 지키려다 순국한 애국영령들이 묻혀 있다. 그들이 누워있는 곳곳을 둘러보면서 나라사랑 충(忠)에 대한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당신이라면 저들과 같이 목숨을 초개(草芥)처럼 버릴 수 있었겠는가.'

이 물음에 대답은 즉시 안 나왔다. 하지만 나라의 안위를 위해서 산화한 많은 영령들 앞에서 옷깃을 여미고 숙연하게 예의를 표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내 곁에 있던 분으로부터 깜짝 놀랄만한 말을 들었다.

초대 주월 한국군사령관(1965~69년)을 지낸 ‘월남전의 영웅’ 최명신 장군(예비역 중장)이 사병묘역에 묻혀 계신다는 것이었다. 순간 기자 출신인 나는 무지함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채명신 장군은 2013년 11월 25일 향년 88세로 별세했다.

채 장군은 돌아가시기 전에 “나와 함께 싸운 병사들 곁에 나를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장군이 장군묘역에 묻히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으나 그 분은 “내 앞에서 죽어가던 병사들을 잊을 수 없다”고 해서 월남전 전우들과 함께 한 것이다.

그는 1926년 황해도 곡산에서 항일운동가의 아들로 태어나 1947년 월남(越南)해 조선경비사관학교(육군사관학교) 5기로 입학했다. 1949년 육사를 졸업한 뒤 이듬해 6·25 전쟁 때에는 소위로 참전해 육군 5사단장,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을 거쳤다. 1965년 8월~1969년 4월까지 초대 주월 한국군사령관과 맹호부대장을 맡아 4년 동안 베트남전쟁에 참가했다. 그는 베트남전 당시 100명의 베트콩을 놓치더라도 1명의 양민을 보호하라고 지시하는 등 덕장(德將)으로 존경을 받았다.

국군 장성이 사병 묘역에 묻힌 것은 채 장군이 처음이다. 그는 국립 현충원 2번 병사 묘역에 묻혔다. 화장한 유골을 모시는 한 평짜리 사병 묘지다. 장군들이 묻히는 장군 묘지는 봉분을 쓰는 8평이다. 그는 서울 이촌동 집에서 늘 동작동 현충원을 바라보며 “부하들 곁에 묻히고 싶다”고 말했다고 한다. 거기 잠들어 있는 1,033명 가운데 971명이 베트남전에서 숨진 병사다.

그의 묘비명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다.

“그대들 여기 있기에 조국이 있다.” “Because you soldiers rest here, our country stands tall with pride.”

그의 삶의 좌표는 ‘군인의 본분은 위국헌신(爲國獻身)’이라는 안중근 의사의 뜻을 따랐다. 채 장군은 자신의 전공(戰功)이 부하들의 희생 위에서 이룬 것이라는 사실도 잊지 않았다. 그래서 언제나 그를 치켜세우는 자리에서 한발 물러서 있었다. 그를 20년 넘게 모셨던 보좌관은 “채 장군이 병사들의 죽음에 괴로워하며 막사에서 남몰래 통곡하곤 했다”고 기억했다.

채 장군은 부하들 목숨을 지키는 일에 앞장 섰고 자신의 안위(安危)는 뒤로 미뤘다. 생(生)과 사(死)를 넘어선 사생관(死生觀)은 그가 웬만해선 철모를 쓰지 않으려 했다는 데서도 드러난다. 병사들은 이역만리 전쟁터에서 그런 채 장군을 마음 속으로 믿고 따랐을 것이다.

채 장군은 88세를 일기로 ‘위대한’ 삶을 마감했다.

망구(望九)는 아흔을 바라보는 팔십 줄의 맨 처음인 여든 한 살을 말한다. 인간 발달단계로 보면 이 나이는 황혼(黃昏)의 완성기이다. 아침에 떠오른 태양이 뜨거운 대낮 하늘 가운데 정점(頂點)에 섰다가 서산 너머로 지려는 순간, 그 붉디붉은 장엄한 빛을 발하는 엄숙한 순간이기도 하다.

인본주의 심리학자 매슬로우(Maslow)에 따르면 그 나이는 인간 욕구의 마지막 5단계에 해당된다. 이 시기는 자아실현의 시기이다. 인생 대단원의 막을 장식하는 자아완성의 시기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 귀중한 마감 시간에 “아직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어림도 없지”를 되뇌이면서 젊은이들과 다투면서 한 푼이라도, 하나의 직함이라도 더 차지하려는 노인들이 많은 게 사실이다.

채명신 장군이 보여준 사생관(死生觀)은 이순신 장군의 “필히 죽고자 하면 영원히 살 것”이라는 필사즉생(必死卽生)의 그것과 꼭 닮아 있다.

그리고 멋있게 물러서는 겸양지덕(謙讓之德) 또한 황혼의 황홀한 빛처럼 빛난다.

인성교육자로서 이순신 장군의 살신성인(殺身成仁) 정신과 안중근 의사(義士)의 애국헌신 정신, 채명신 장군의 부하사랑 애민정신을 후세에 전해야 한다는 책임감에 어깨가 부쩍 무거워진다. 세 분은 모두들 죽고자 하는 결연한 의지를 보임으로써 영원히 사는 필사즉생(必死卽生)의 철학을 가진 게 공통점이다.

모두들 “이 나라의 인성이 무너졌다”며 혀를 끌끌차지만 인성교육을 어떻게 후생(後生)들에게 전해줄지에 대해서는 그 방법을 잘 모르고 있는 것 같다.

우선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하는 역지사지(易地思之)의 배려심이 가장 시급하다. ‘나의 노욕이 젊은이들의 일자리에 지장을 끼치는 것은 아닌지?’ 또 ‘내 것만 지키려다 조직에 더 큰 손해를 끼치는 것은 아닌지?’ ‘내 꽃자리가 더 유능한 후배의 앞길에 방해가 되는지?’ 등을 곰곰 생각해보면 답은 절로 나온다.

그 다음으로 측은지심(惻隱之心)이다. 나보다 못한 후생(後生)들을 가엽게 여기는 마음이다.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라는 시인 윤동주의 서시 구절처럼 ‘생명이 있는 것은 슬픈 존재’라는 인간 본연을 직시한다면 측은지심이 안 들래야 안 들 수 없을 것이다. ‘이태백(이십대 태반이 백수)’과 비정규직으로 힘든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에 대한 새로운 시선과 인식의 재발견, 그것이 어른이 가져야 할 태도가 아닌가 감히 생각해본다.

‘세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속담이 있다. 이 시대 노인들이 후생(後生)을 위하여 예, 효, 정직, 책임, 존중, 배려, 소통, 협동 같은 인성씨앗을 뿌리기 시작한다면 그 열매는 언젠가 열리고 꽃피울 것이다. 그 때 가서 우리는 제2의 이순신, 안중근, 채명신 같은 나라사랑 충(忠)과 올곧은 의(義)를 실천하는 ‘영웅’들을 더 많이 만나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대한민국은 부국강병(富國强兵)의 선진화된 나라로 변해있을 것이다. / 김동철 베이비타임즈 주필·교육학 박사

<김동철 교육학 박사 약력>

- 베이비타임즈 주필
- 이순신 인성리더십 포럼 대표
- 성결대 파이데이아 칼리지 겸임교수
- 문화체육관광부 인생멘토 1기 (부모교육, 청소년상담)
- 전 중앙일보 기자, 전 월간중앙 기획위원
- 저서 : ‘이순신이 다시 쓰는 징비록’ ‘무너진 학교’ ‘밥상머리 부모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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