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철칼럼] 고질적인 병역비리
[김동철칼럼] 고질적인 병역비리
  • 김동철
  • 승인 2016.10.13 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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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동철 베이비타임즈 주필·교육학 박사 / ‘환생 이순신, 다시 쓰는 징비록’ 저자

 

병역비리가 도를 한참 넘어섰다. 병역 의무 대상자 가운데 대한민국 국적을 포기하는 남성이 연간 3,400명을 웃도는 것으로 나타났다.

국회 국방위원회 소속인 국민의당 김중로 의원이 밝힌 자료에 따르면 지난 2012년부터 지난 7월까지 대한민국 국적을 상실 또는 이탈한 병역대상자는 1만7,229명으로 집계됐다. 장기 거주 등으로 외국 국적을 취득하고 한국 국적을 ‘상실’한 남성이 1만5,569명으로 대다수를 차지했고, 이중국적 남성이 18세 이전에 외국 국적을 선택하는 ‘이탈’에 해당하는 남성은 1,660명이었다.

이들이 선택한 국적은 미국 8,747명으로 가장 많았고, 일본 3,077명, 캐나다 3,007명 등이었다. 특히 이들 국적 포기자 가운데 31명은 4급 이상 고위공직자 27명의 직계 비속으로 드러났으며, 대부분 이중국적자였다가 한국 국적을 버렸다고 김 의원은 설명했다.

김 의원은 “흙수저는 원하는 시기에 입대하지 못해 줄을 서는데 금수저는 외국 국적을 앞세워 병역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 양극화가 나타나고 있다”면서 “병역 의무를 안 마친 ‘검은 머리 외국인’에 대한 국내 경제활동 제재, 입국 요건 강화 등이 시급하다”고 밝혔다.

병역 이행을 앞두고 국적을 포기했다가 사회적 논란에 휘말렸던 대표적 인물은 가수 유승준씨이다. 현재 국내 입국이 금지된 가운데 최근 입국 허가를 위해 낸 ‘비자발급 소송’에서 패소했다.

국민의 4대 의무인 병역은 회피하고 온갖 국가적 혜택은 고스란히 받으려는 처사는 양심불량에 해당한다. 아들에게 병역면제를 물려준 고위공직자에는 국회의원, 부장판사, 검사장, 외교부 영사, 교육장, 대학 총장 등 사회지도층이다.

공무원은 국민의 세금으로 국가의 녹봉을 받고 국민의 심부름을 하는 공복(公僕)이다. 하지만 이들의 간 큰 행위는 도를 넘어서고 있다. 북핵(北核) 위협으로 나라의 안위(安危)가 엄중한 가운데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망종(亡種)들의 망동은 엄단되어야할 것이다. 그 아비와 아들은 모두 ‘공공의 적(敵)’으로 지목받아도 싸다.

대한민국 지도층의 민낯은 400여년 전 임진왜란 때보다도 더 못하다는 생각이 든다.

임진왜란 때 각 진영(鎭營)은 병력부족으로 병사를 징발하는 데 애로(隘路)가 많았다. 관군은 아니고 보충병인 사색제방군(四色除防軍)이 있었는데 이들은 유사시 겨울에 동원되어 해상과 육상에 배치되고 각 지역의 방위를 맡았다.

그러나 이 병력 역시 부족하자 제방군의 친척이나 이웃에게도 병역을 부과하다가 불합리하다는 지적에 제도가 폐지됐다. 그 결과 더욱 병사가 부족해 각 지방의 진영에서는 전쟁을 수행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남쪽 왜구를 방어하는 해상방위병이 북쪽 여진족 방어에 투입되자 백성들의 원성이 커져 갔다. 장정들이 모자라자 노약자들이 동원되기도 했다.

이에 이순신 장군은 임진년 1592년 12월 10일 조정에 장계를 올렸다. 임진장초(壬辰狀草) 내용이다.

“모병관이 내려와 내륙과 연안을 구분하지 않은 채 군사 수만을 결정하여 심하게 독촉하여 각 고을에서는 변방군사를 빼다가 충원하고, 남은 장정을 징용하였으며 복수의장(復讐義將) 고종후(高從厚)가 내노비와 사노비를 남김없이 빼갔습니다. 백성들의 근심과 원망 소리가 귀에서 떠나지 않습니다. (중략) 전선은 비변사의 공문이 도착하기 전에 이미 본영과 여러 진포에 명령하여 많은 수를 만들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한 척의 전선에 사부(射夫, 사수)와 격군(格軍, 노꾼)을 포함하여 130여명의 군사를 충원해야 하는데 그 방법이 없어 외로운 신하는 북쪽을 바라보고 통탄하며 마음은 죽고 형체만 남았습니다. 따라서 ‘병사의 친족에게만 징용하는 일’을 전과 같이 시행하되 차츰 가려내어 백성의 원망을 풀어주는 것이 지금 급선무입니다. 조정에서 더욱 헤아려 주십시오.”

당장 적을 눈앞에 두고 있는 상황에서 징용대상자가 대부분 흩어지거나 도망하는 일이 빈번했다. 이순신 장군은 도망병을 특히 무관용(無寬容)으로 무섭게 다뤘다. 군영의 군기를 엄정하게 잡기 위해서였다. 전시에 한 명이 탈영하면 두 명, 세 명이 잇달아 탈영하게 되고 진영은 곧 무너지게 된다. 깨진 유리창 한 장이 방치되어 있으면 그 건물은 끝내 모두 폐허가 된다는 ‘깨진 유리창의 법칙(broken window theory)’이 적용되는 대목이다.

 


계사년 1593년 2월 3일 맑음

“이날 영남에서 옮겨온 귀화인 김호걸과 나장 김수남 등이 명부에 오른 격군 80여명이 도망갔다고 보고하면서 뇌물을 많이 받고 붙잡아오지 않았다. 군관 이봉수, 정사립 등을 몰래 파견하여 70여명을 찾아서 잡아다가 각 배에 나누어주고 김호걸, 김수남 등은 그날로 처형했다.”

갑오년 1594년 7월 26일 맑음

“늦게 녹도만호 송여종이 도망간 군사 8명을 잡아왔기에 그중 주모자 3명은 처형하고 나머지는 곤장을 쳤다.”

갑오년 1594년 8월 26일 맑음

“흥양의 포작(어부) 막동이 장흥의 군사 30명을 몰래 배에 싣고 도망간 죄로 목을 베어 효수(梟首)했다.”

조선 전기부터 수군은 힘든 고역(苦役), 천역(賤役)으로 인식돼 신양역천(身良役賤), 즉 신분은 양인(良人)이지만 하는 일은 천민(賤民)의 일과 같이 힘들어 기피대상이었다.

백성들은 가난보다도 불평등한 차별에 분노했다. 양반들은 군역을 지지 않고 평민들에게 덮어씌웠기 때문이었다. 류성룡(柳成龍)은 1594년 군역을 지지 않는 양인(良人)과 양반을 골라서 천민과 합친 속오군(束伍軍)제도를 도입했다.

속오군은 지방군으로 임진왜란 중 기효신서(紀效新書)의 속오법에 따라 조직된 군대다. 황해도부터 시작해 1596년 말에는 거의 전국적으로 조직이 완성되었다. 훈련된 관군이 아닌 병농일치(兵農一致)의 농민군 수준이었지만 1597년 정유재란 때는 실전에 투입되었다. 류성룡은 또 노비도 공을 세우면 신분을 면해주는 ‘면천법(免賤法)’을 시행했다. 류성룡은 애민(愛民)사상을 가진 개혁적 경세가였다.

전투 중 도망병이 나온다는 것은 일단 ‘진 전쟁’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1597년 7월 15일 삼도수군통제사 원균(元均)의 조선함대는 칠천량 해전에서 왜수군에 의해 궤멸당했다. 판옥선, 거북선 등 100여척이 대파됐고 2만여명의 수군이 전사했다. 왜군은 그동안 이순신의 견제를 받던 수세적 상황을 만회하려는 듯 작심하고 대규모 수륙양동작전을 펼쳤다.

이 패전과 관련, 도체찰사 이원익(李元翼)은 파발보고서인 치계(馳啓)를 통해서 “임진 난 이후 도망간 장수들 중 한 사람도 군법에 따라 치죄(治罪)되지 않아 이것이 관습이 되어 모두들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습니다. 이번에도 왜적이 공격해 오자 수군이 처음부터 힘을 겨루어 싸우다가 패한 것이 아니라 산 자나 죽은 자나 모두 자기 살 길을 찾아 도망가기에 바빴습니다”라고 선조에게 보고했다.

병조판서 김명원(金命元)도 조정회의에서 “왜적이 우리 배에 접근하여 올라타자 우리 장졸들은 손 한번 써보지도 못하고 패했다”고 말했다.

오늘날 국적을 바꾸고 무릎과 어깨를 망치로 깨트리고 눈에 이물질을 넣고 급기야 정신병자 행세를 하면서 병역을 기피하는 자들이 늘어섰다. 이들에게 2015년 8월 4일 북한 목함지뢰도발로 일촉즉발(一觸卽發)의 상황이 전개됐을 때 스스로 전역을 미룬 병사들과 ‘국가가 부르면 언제든지 달려가겠다’는 젊은 예비역들의 당당한 모습이 어떻게 비쳐질까 궁금하다.

<김동철 주필 약력>

- 교육학 박사
- 이순신 인성리더십 포럼 대표
- 성결대 파이데이아 칼리지 겸임교수
- 문화체육관광부 인생멘토 1기 (부모교육, 청소년상담)
- 전 중앙일보 기자, 전 월간중앙 기획위원
- 저서 : ‘이순신이 다시 쓰는 징비록’ ‘무너진 학교’ ‘밥상머리 부모교육’ ‘환생 이순신, 다시 쓰는 징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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