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화 원장의 우울증 특강] ‘묻지마 범죄’ 뒤에 숨은 ‘분노조절장애’
[김영화 원장의 우울증 특강] ‘묻지마 범죄’ 뒤에 숨은 ‘분노조절장애’
  • 송지나 기자
  • 승인 2023.09.20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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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화 강동소아정신과의원 원장
김영화 강동소아정신과의원 원장

최근 수도권에서 묻지마 흉악 범죄가 이어지고 있어 많은 사람들이 불안에 떨고 있다. 최근 경찰에서는 사람들이 이유 없이 폭행당하는 ‘무차별 범죄’를 ‘이상동기 범죄’로 용어 통일을 했다고 한다.

자신과 아무런 원한 관계가 없는 상대를 무차별적으로 폭행하는 등 동기를 찾기 힘든 범죄는 최근에야 급격히 발생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 통계를 보면 지난 수년간 모르는 사람에게 또는 길거리에서 이유 없이 당하는 ‘묻지마 폭행’은 하루 평균 3건씩 발생했다고 한다.

이런 이상 동기 범죄는 대부분 사회에 대한 적대감을 가지고 화를 참지 못한 사람들이 제3자를 대상으로 충동적인 범죄행동을 저지르는 것이다.

분노조절장애는 화병(Hwa-byung)이다

그렇다면 화를 참지 못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나라는 오래전부터 분을 제대로 삭이지 못해 화가 가슴을 치고 올라와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을 ‘화병’이라고 칭했다. 이 화병(Hwa-byung)은 1995년 세계정신의학계에서 한국인에게만 나타나는 독특한 정신질환으로 인정받기도 했다.

화병은 한국 사람들, 특히 가정주부들에게 나타나는 ‘이유 없이 가슴이 답답하고 한숨이 나는’ 심인성 증상을 설명할 수 있는 병명이다. 한국여성들은 결혼 후 눈 막고 3년, 귀 닫고 3년, 입 다물고 3년을 지나면서 남편과 시집 식구들에게 억울한 일을 당하고도 분노감정을 드러내지 못하고 꾹 누르기만 해 독특한 문화적 정신질환이 생긴 것이다.

그로부터 28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감정을 지나치게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고 분노를 너무 자주 폭발시키는 또 다른 얼굴의 울화병을 앓고 있다. 예전의 화병은 주로 가정주부들에게 나타났지만, 최근의 분노 폭발로 인한 ‘분노조절장애’는 10대 학생들뿐 아니라 직장인, 남성들에게 더 자주 나타나고 있다.

특히 은둔형 외톨이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치열한 경쟁 속에서 느끼는 상대적 좌절감과 박탈감, 열등감에 시달리며 속으로 사회와 세상에 대한 분노를 감추고 있다. 이들은 언제든 분노조절장애를 드러낼 수 있는 잠재적인 환자들로 봐야 한다.

정서적인 스트레스로 인한 우울증이 원인이다

사회적으로 고립된 외톨이들의 ‘이상동기 범죄’의 잠재적 원인은 ‘화 조절 장애’이다. 화 조절 장애는 기분장애의 일종으로 분노조절이 되지 않아 충동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적대감을 드러낸다. 감정 조절이 어렵고 비정상적 기분이 장시간 지속되는 것으로, 이면에는 우울증과 조울증이 대부분 있다.

기분장애가 있으면 사소한 일에도 분노를 느끼고 충동조절장애를 겪을 수 있다. 충동조절이 되지 않아 과격한 행동을 보이게 된다. 최근에 보이는 무차별 폭행사건은 전형적인 분노폭발형 ‘화 조절장애’ 범죄다.

사회 일각에 고립되어 있던 이들이 스트레스를 받고도 마땅히 풀 방법을 찾지 못한 상태에서 사소한 일에 자극받아 발생한 폭발이 강력 범죄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대부분 사회와 단절된 은둔형 외톨이는 집에서 게임이나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자신과 비슷한 성향의 사람들과 교류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온라인 커뮤니티를 통해 자신의 왜곡된 사고방식을 정당화하기도 한다.

디지털 기술과 소셜 미디어의 보급으로 인해 언론과 인터넷을 통해 폭력적인 행동이 더 쉽게 전파되고 확산된다. 소셜 미디어의 영향으로 인해 무차별 폭행 사례가 미디어를 통해 더 많이 보도되면서 익명 커뮤니티에 폭행, 살인 예고 글들을 올리고 이들 중 10%는 실행에 옮기기도 한다. 최근 흉기 난동사건이 일어난 직후로 온라인에 살인예고 글들이 급증하는 것도 은둔형 외톨이의 범죄 충동을 부추기고 있다.

정신장애 환자에 대한 적절한 치료가 필요하다

우리나라의 기분장애 환자들은 4년 전에 비해 30% 이상 증가했다. 코로나19로 활동범위가 제약되면서 발생하는 스트레스 현상인 ‘코로나 블루’로 인한 우울증도 증가했다.

우울증은 자아 존중감을 낮추는데, 이는 자기와 주변세계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을 갖게 하고 사회적 활동과 관심을 잃게 만든다. 이로 인해 사회적 고립이나 외로움이 심화될 수 있다. 우울증으로 인해 다른 사람들과의 의사소통이 어려워지다 보니 갈등 상황에서 감정이 폭발하게 된다.

우울증뿐 아니라 더 심각한 정신건강 문제를 가진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해치려 한다는 피해망상으로 인해 폭력적인 행동을 할 가능성이 높다.

2019년 방화로 이웃 5명을 살해하고 17명을 다치게 한 ‘안인득 방화사건’ 이후로 경찰에 의한 응급입원이 가능해졌지만 피해망상으로 인한 범죄 가능성이 있는 환자들은 본인 동의 없이도 즉시 입원하고 제대로 치료받도록 하는 시스템도 필요하다.

자살은 화병의 또 다른 얼굴

무차별 폭행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은 상당히 심각하다. 폭력적인 행동이 증가하면 모방범죄가 증가하고 사회적 안정성이 약화되어 우리 모두 불안에 떨며 살아가야 한다. 사회 내 서로에 대한 불신감이 높아지고 개개인의 정신건강에도 악영향을 끼치는 악순환이 시작된다.

좌절된 욕구는 분노를 만든다. 이때 발생하는 공격성이 다른 사람을 향하면 폭력이 되고, 타인과 세상을 향하던 공격성이 자신을 향하게 되면 자살로 이어지게 된다. 우리나라가 13년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요지부동의 자살률 1위인 것은 울화를 조절하지 못해 발생한 것이다. 무차별 범죄와 자살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현상이다.

사회에 만연한 분노조절장애를 치유하는 대책은?

“굶주린 사람들의 눈에는 분노가 서리고, 포도송이처럼 주렁주렁 매달린 분노가 알알이 영글어 간다.” 1920년대 말 미국 대공황기를 배경으로 한 존 스타인벡의 장편소설 ‘분노의 포도’에 나오는 구절이다.

한강의 기적이라는 경제발전을 이룬 지금, 우리 주변에는 많은 사람이 가난과 굶주림 때문이 아니라 좌절감과 무력감, 상대적 박탈감 때문에 분노를 느끼고 있다. 유엔이 발표한 ‘2023 세계행복보고서’에 의하면 한국의 행복지수는 57위로 OECD 국가 중 최하위이다.

이는 우리 사회의 정신건강이 위기에 처해있다는 증거다. 물질적 풍요로 채울 수 없는 좌절감, 무력감을 털어내고, 젊은이들이 자기 삶의 목표를 이룰 수 있다는 자신감을 찾을 수 있는 사회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어떤 일부터 시작해야 할지 고민할 때이다.

 

<김영화 원장 프로필>
- 現 강동소아정신과의원 원장
- 現 서울시 강동구 의사회 부회장
- 現 대한 정신건강의학과 의사회 부회장
- 現 강동구 자살예방협의회 부회장
- 現 서울시교육청 위센터 자문의
- 現 국가인권위원회 아동인권 자문위원
- 前 여성가족부 정책자문위원 
- 前 한국 양성평등교육진흥원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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