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을 보다] 아빠, 우리 곁에 조금만 더 머물러 주세요 《우리 아빠는 위대한 해적》
[그림책을 보다] 아빠, 우리 곁에 조금만 더 머물러 주세요 《우리 아빠는 위대한 해적》
  • 송지나 기자
  • 승인 2023.09.15 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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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비드 칼리 글, 마우리치오 A.C. 콰렐로 그림, 박우숙 옮김, 현북스 출판, 2016년 5월. (이미지=현북스 제공)
다비드 칼리 글, 마우리치오 A.C. 콰렐로 그림, 박우숙 옮김, 현북스 출판, 2016년 5월. (이미지=현북스 제공)

아버지께서 할 말이 있다며 좀 보자고 전화를 하셨습니다. 엄마가 먼 곳으로 떠나신 지 이제 겨우 넉 달이 지났습니다. 혹시 아빠 혼자 지내시기에 집이 너무 커서 집 이야기를 하시려나 싶었어요. 다음날 아침 일찍 아빠를 찾아뵈러 갔습니다.

1월에 종합 검진을 받을 때까지만 해도 크게 이상이 없어 건강에 대해 걱정은 안 하고 지내셨는데, 요 근래 부쩍 명치 끝이 아프고 소화가 안 되어 여러 병원을 다니셨답니다. 그러다 알게 된 것은 별다른 증상이 없어 발견하기 힘든 췌장암이라는 이야기였습니다. 남은 생은 길면 육 개월 정도. 머릿속은 하얘졌고 할 말은 잊어버렸습니다.

엄마는 교통사고로 삼 년을 병원에 계시다 회복을 못 하고 돌아가셨습니다. 아마 그때부터 아빠의 병이 시작되었겠지요. 엄마의 병수발을 아빠가 다 하셨으니까요. 얼마나 고달프셨을까요. 사고의 후유증으로 몸을 전혀 움직이지 못하는 엄마가 서서히 정신을 놓아가는 과정을 지켜보았지만 정작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어 매우 힘드셨을 거예요. 미련한 자식은 미처 그걸 보지 못했습니다.

아, 무슨 말을 해야 할까요. 며칠을 정신없이 그렇게 보냈습니다.

 

《우리 아빠는 위대한 해적》 본문 이미지. (이미지=현북스 제공)
《우리 아빠는 위대한 해적》 본문 이미지. (이미지=현북스 제공)

소년의 아빠는 멋진 해적입니다. 매년 여름 집에 오실 때면 늘 아빠에게서 바다 냄새가 났기 때문입니다. 아빠는 소년을 무릎에 올려놓고 그동안을 활약상을 이야기해 주셨지요. 같이 일하는 동료 해적들에 대해서도 상세히 알려주셔서 소년은 아빠와 함께 일하는 해적들의 이름을 모두 다 알고 있을 정도였어요.

아빠는 항상 선물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한 번은 해적 깃발을 주시면서 아빠가 타고 다니는 해적선의 이름은 희망이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집에 돌아간다는 희망을 뜻한다면서요.

두 해 뒤 여름, 아빠는 집에 오시지 않았습니다. 소년과 엄마는 기차를 타고 아빠가 계신 곳을 찾아갔습니다. 그곳은 바다가 아닌 벨기에라는 곳이었어요. 아빠는 온몸에 붕대를 감고 병원에 계셨습니다.

《우리 아빠는 위대한 해적》 본문 이미지. (이미지=현북스 제공)

아빠가 일하던 곳은 해적선이 아니라 땅 밑으로 수백 미터를 내려가 석탄을 캐던 광산이었습니다. 며칠 전 광산이 무너져 많이 다친 모습으로 소년 앞에 계신 것입니다.

소년은 해적인 아빠가 아닌, 어두운 땅속에서 석탄을 캐는 용감한 아빠를 새로 만났지만 아빠가 왜 거짓말을 했는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석탄이 남아 있지 않아 광산이 문을 닫는다는 편지를 받고 아빠는 함께 일했던 광부들과 마지막 인사를 하기 위해 벨기에로 소년을 데리고 갔습니다. 문 닫힌 광산 앞, 어린애처럼 울고 있는 후줄근한 한 떼의 사람들이 늘 아빠에게 이야기를 들었던 용감한 해적들이라 걸 알게 됐습니다.

소년은 해적이 아닌 적이 한 번도 없었던 모든 위대한 해적들을 위해서 아빠가 선물로 주었던 깃발을 힘껏 흔들었습니다. 바다를 항해하는 멋진 선원이 되고 싶었지만, 가족을 위해 꿈을 접었던 세상 모든 위대한 해적, 아니 위대한 모든 아빠를 위해서요.

《우리 아빠는 위대한 해적》 본문 이미지. (이미지=현북스 제공)
《우리 아빠는 위대한 해적》 본문 이미지. (이미지=현북스 제공)

이 이야기는 1956년 벨기에 마흑씨넬로 광산에서 일어났던 화재 사고를 바탕으로 합니다. 당시 지하에 있던 광부 중 13명만이 살아남았고 262명의 사망자가 나올 정도의 큰 사고였습니다. 사망자 중 136명이 이탈리아에서 이주한 광부들이었습니다. 이 사고의 여파로 이탈리아 이민은 중단되었고 유럽 전역에서는 광산 안전 규정이 개정됐습니다.

이탈리아에서 활동 중인 글 작가와 그림작가는 고된 삶의 현장에서 최선을 다한 우리들의 아버지를 해적이라는 멋진 칭호로 추억합니다. 가족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꿈을 접어두고 묵묵히 주어진 삶을 살아낸 그들은 이 세상 누구보다 멋진 해적이 분명하니까요.

소년의 아버지도, 같이 광산에서 일하던 동료 해적들도 모두 누군가의 아들로, 남편으로, 아버지로 우리 곁에 오래 있어 주기를 바랍니다. 불의의 사고로 생을 달리했지만, 글과 그림으로 남겨져 오래도록 기억되기를 바라는 또 다른 아버지들도 잊지 않겠습니다.

 

아빠, 우리 곁에 조금만 더 오래 머물러 주세요. 힘드시겠지만 기운을 내주세요. 일 년도 안 되어 엄마 아빠를 모두 떠나보낼 수는 없어요. 당신을 위대한 해적으로 바라보는 철없는 자식이 이렇게 간곡히 부탁드려요. 아빠 앞에서 ‘우리 아빠는 위대한 해적’이라고 외칠 수 있도록요.

 

 

 

<글쓴이·김선아>
그림책씨앗교육연구소 대표
그림책을 좋아하여 여러 사람들과 그림책을 나누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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