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을 보다] 그해 여름의 선물 《그해 여름, 에스더 앤더슨》
[그림책을 보다] 그해 여름의 선물 《그해 여름, 에스더 앤더슨》
  • 송지나 기자
  • 승인 2023.03.29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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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모테 드 퐁벨 글, 이렌 보나시나 그림, 최혜진 옮김, 길벗어린이, 2023년 3월. (사진=길벗어린이 제공)
그해 여름, 에스더 앤더슨 / 티모테 드 퐁벨 글, 이렌 보나시나 그림, 최혜진 옮김, 길벗어린이, 2023년 3월. (사진=길벗어린이 제공)

방학이 시작되자 나는 혼자 기차를 타고 삼촌네 집으로 향했다. 무엇이든 모으기 좋아하는 삼촌은 자전거를 빌려주었고 나는 자전거를 타고 시골 바람을 가로지르며 달렸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길고 긴 여름날의 자전거 일주는 나를 우연한 곳으로 데려다주었다. 거기에는 눈부시게 파란 바다가 있었다. 나는 단번에 바다에 사로잡혀 버려 숨이 가쁠 정도로 뭔가 벅차오르는 걸 느꼈다. 그러느냐고 그해 여름 내게 다가온 가장 큰 파도를 보지 못할뻔했다.

소녀였다. 헤엄치던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 애는 곧 누군가가 부르는 이름 속으로 사라졌다. 나는 반쯤 넋이 나간 채로 한밤중이 되어서야 집에 돌아왔고, 그 애를 만나기 위해 몇 번이고 다시 바다를 찾아갔지만 만날 수는 없었다.

그해 여름, 에스더 앤더슨 / 티모테 드 퐁벨 글, 이렌 보나시나 그림, 최혜진 옮김, 길벗어린이, 2023년 3월.
그해 여름, 에스더 앤더슨 / 티모테 드 퐁벨 글, 이렌 보나시나 그림, 최혜진 옮김, 길벗어린이, 2023년 3월.

여름 방학이 끝나기 하루 전날 마침내 그날이 찾아왔다. 그 애는 머리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을 고스란히 맞으며 내게 강아지를 잃어버렸다며 말을 건넸다. 어디서 말할 용기가 났는지 모르지만 난 같이 찾아보자며 그 애를 자전거 뒤에 태우고 달렸다.

그 애와 처음 만났던 해변에 자전거를 눕혀놓고선 강아지 이름을 부르며 찾아다녔다. 내일이면 부모님이 계시는 영국으로 돌아간다는 그 애는 바다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수영하고 싶다며 바다로 뛰어들었다. 나도 같이 뛰어들었다.

우리가 한마음이어서일까. 간절한 기다림에서일까. 아니면 만나자마자 헤어져야 하는 아쉬움 때문이었을까. 삼촌과 함께 강아지는 곧 우리 앞에 나타났고, 우리의 여름 방학은 그렇게 끝이 났다. 그해 여름의 눈부신 기억은 그렇게 내 가슴속에 깊이 새겨졌다.

그해 여름, 에스더 앤더슨 / 티모테 드 퐁벨 글, 이렌 보나시나 그림, 최혜진 옮김, 길벗어린이, 2023년 3월.
그해 여름, 에스더 앤더슨 / 티모테 드 퐁벨 글, 이렌 보나시나 그림, 최혜진 옮김, 길벗어린이, 2023년 3월.

‘그리워하는 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피천득의 수필 ‘인연’이 생각나는 그림책입니다. 학창 시절 교과서에서 이 수필을 배웠을 때는 사람 간의 만남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하기만 했습니다. 친구 만나면 그저 좋기만 한 사춘기 청소년들에게 만남과 헤어짐을 이해하기란 참 어려웠습니다. 만나면 좋은데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라는 마지막 문구가 마음에 와닿기 힘들었습니다. 이제는 지나간 세월만큼이나 만남과 헤어짐이 많아지니 작가의 마음을 조금 헤아릴 정도는 되었다고나 할까요.

그해 여름, 에스더 앤더슨 / 티모테 드 퐁벨 글, 이렌 보나시나 그림, 최혜진 옮김, 길벗어린이.
그해 여름, 에스더 앤더슨 / 티모테 드 퐁벨 글, 이렌 보나시나 그림, 최혜진 옮김, 길벗어린이.

서부 영화 같은 기차역, 넓은 옥수수밭, 황금빛 출렁이는 밀밭, 빨간 자전거, 파란 바다, 별이 반짝이는 여름밤의 맑은 수채화는 독자에게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꼭 소년이나 소녀가 된 것처럼 책으로 들어가 같이 설레고 기뻐하며 그리워하고 가슴 벅차오르며 둘의 만남을 행복해합니다. 소년의 추억이 나의 추억이 된 것 같습니다. 이 세상 어딘가 그 애가 있다는 사실은 나와 소년만 아는 비밀이 되었습니다. 누구에게나 가슴속엔 그해 여름이 있는 것처럼요.

나에게는 어떤 만남이 있었더라, 그 친구를 만났을 때는 어땠지? 친구와 만나서 행복했던 기억은 무엇이 있을까 되새기게 됩니다. 덕분에 어릴 때로 되돌아가 맘껏 뛰어놀던 동네 풍경 속 친구들을 생각하니 슬그머니 미소가 지어지네요. 삶이란 이런 아름다운 기억의 조각이 모여서 이루어지나 봅니다. 찰나의 아름다운 순간들을 새기고 추억하고 새로운 만남을 찾아 떠나기도 하니까요. 헤어짐이 있어 만남이 더 아름답다는 말이 선물처럼 다가옵니다.

 

 

 

글쓴이·김선아

그림책씨앗교육연구소 대표

그림책을 좋아하여 여러 사람들과 그림책을 나누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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