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수의 유머학개론] 주변 환경 때문에 유머를 잃는 이들을 위한 유머전략
[이정수의 유머학개론] 주변 환경 때문에 유머를 잃는 이들을 위한 유머전략
  • 송지나 기자
  • 승인 2019.11.02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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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수 개그맨 겸 주부작가
개그맨 겸 주부작가 이정수

유머교습을 위해 일찍부터 강의실에 나와서 강의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강의 시작 전에 신청자의 강의 신청서도 살펴보고요. 신청서엔 직업을 적는 칸이 있습니다. 유머를 배우는데 직업이 중요하냐고 생각할 수 있는데, 직업은 그 사람의 생활 패턴과 관심사, 사회적 위치 등을 알 수 있는 좋은 수단입니다.

그날 오실 분은 프리랜서 패션디자이너셨습니다. 제가 가져보지 못한 패션 감각을 가지고 계신 분이리라 기대했습니다.

저는 옷 믹스매치를 진짜 못합니다. 색깔이 조금이라도 튀는 소재가 한 곳이라도 들어가면 나머지를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모르겠어요. 다행히 신은 이런 저를 불쌍히 여기시어 아내를 보내주셨죠. 그래서 그냥 시키는 대로 입으면 됩니다. 혹시나 혼자 결정해서 입어야 하는 상황이 오면 슈트 같이 딱 정해져 있는 옷을 고르죠. 고민 없이 멋지게 입을 수 있으니까요.

어쨌든 그분은 딱 강의 10분 전에, 정말 당연히 있어야 하는 것처럼 조용히 강의실 문 앞에 서 있었습니다.

역시 패션디자이너. 체크바지에 어깨엔 체크 숄니트가 딱! 사실 저도 여기까지는 할 수 있습니다. 바지가 체크면 위에 또 체크를 입는 거죠. 그런데 문제는 양말과 신발이 되겠죠. 이런 위아래 착장이라면 저는 고민하지 않고 양말 없이 흰 운동화를 골랐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의 패션디자이너는 역시 다르더라고요. 녹색 반짝이 양말과 은회색 운동화를 딱! 역시 패션의 세계는 진짜 모르겠습니다.

수업을 진행하기 위해 서로 마주보고 앉았습니다. 강의실에는 강의 상황을 녹화하기 위해 카메라가 두 대, 조명도 켜져 있습니다. 방송국 같은 느낌이죠. 그런데 이 분은 전혀 어수선한 느낌이 없었습니다. 원래 사람은 긴장되거나 흥분되면 어수선해지는 경향이 있거든요. 약간 느린 느낌이 차분하게 보였습니다. 특유의 느림. 황소자리였습니다.

이 인내심이 강하고 고집이 센 황소자리의 살아온 이야기를 듣고 싶었습니다. 어렸을 때 미술을 했었답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순수미술은 절대 하지 않겠다며 선생님께 선포를 했더니 선생님께서 그러셨답니다. ‘너 같은 애들이 꼭 순수미술 하더라!’

선생님의 예언은 적중했습니다. 결국 순수미술로 대학을 가게 되었던 겁니다. 그러던 중에 프랑스로 유학을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프랑스도 그녀의 특유의 고집 덕에 결정한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 친구들은 거의 미국으로 유학을 갔답니다. 그래서 본인은 다른 곳을 가고 싶은 마음에 프랑스에 가기로 결정한 거죠.

프랑스? 뭔가 예술의 도시냄새가 나지만 패·알·못(패션을 알지 못함)인 저는 ‘패션은 이탈리아 아닌가?’하는 생각에 프랑스엔 무슨 명품이 있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분의 입에서 ‘루이비통, 샤넬, 에르메스…’ 브랜드명이 줄줄이 나왔습니다. 역시 패·알·못은 그저 명품이라면 대단한 줄 알고 끄덕입니다.

아무튼 그녀는 패션디자이너가 되기 위해 홀로 말도 잘 안 통하는 프랑스로 훌쩍 떠나 12년간 공부를 했답니다.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온 거죠. 한국에 돌아와서 디자인도 하고 연애도 하면서 잘 지내오다가 최근에 충격적인 일을 겪었답니다. 연인이 카카오톡으로 이별을 통보한 것이죠. 매너 없는 이별 방식에 화가 나서 얼굴을 좀 보려고 이런 저런 메시지를 보냈으나, 그 답변들이 너무 어이없는 단답형이라 정나미가 뚝 떨어져서 그냥 말았답니다.

이런 이야기도 초면인 저에게 잘 꺼내는 것을 보니 유머 재능 중 용기는 가지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이야기를 별 두려움 없이 꺼내는 것은 용기가 있어야 가능한 부분이거든요. 블랙코미디처럼 소화하더라고요. 나름 그 스타일이 재미가 있었습니다.

주변 이야기를 하다보니 남동생 이야기도 나왔습니다. 남동생은 지금 대학로에서 연극을 하고 있습니다. 남동생은 얼굴에 자신이 있어서 연기 판에서 얼굴로 먹고 살 거라고 자신하며 살았답니다. 그런데 막상 연기를 시작하고 보니 자신은 그럴 수 있는 수준의 얼굴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답니다. 연기를 갈고 닦기 위해 배고픈 대학로 연극판에서 활동을 하며, 생활비를 벌기 위해 각종 알바를 하며 지낸답니다.

점점 이야기에 빠져듭니다. 기본적으로 이야기의 소재가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용기도 있고 소재도 많은데 왜 유머를 하기 어려울까?’ 고민을 하던 중에 드디어 유머하기 어려운 이유를 발견합니다. 주변 환경 때문이었습니다.

친구들은 이제 거의 결혼도 했고, 아이도 있습니다. 그녀는 37세니까요. 그러니 친구들을 만나면 거의 다 남편, 아이 얘기가 주 이야깃거리일 겁니다. 그녀는 그게 듣기 힘들고 재미없겠죠. 반대로 그녀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친구들이 재미없을 것이고요.

이처럼 주변의 관심사가 나와 달라져서 유머능력을 잃은 것 같이 느끼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유머는 들어주는 사람으로 인해 완성되기도 하니까요. 누군가 재미있게 들어줘야 그것이 유머가 된다는 말이죠.

이런 외부적 요소를 배제한 채 자신의 유머를 평가한다면 자신은 재미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고 내면이 어두워질 수 있습니다. 주변 환경 때문에 자신을 저평가하면 안 됩니다. 그렇다고 주변을 자기 뜻대로 구성하긴 쉬운 일이 아니니 이런 경우의 분들은 스스로를 웃기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저는 본의 아니게 스스로를 웃기는 연습을 했었는데요. 그 방법이 ‘셀카’였습니다. 잘 생긴 모습을 찍기 위해 찍었던 것이 아니라 그 상황이 황당하거나 부끄럽거나 화가 나고, 급할 때 찍었던 거죠.

그런 상황 속에서도 사진을 찍고 있는 제 자신이 웃겼습니다. 얼마나 웃깁니까? 정신도 없는데 셀카라니?! 그리고 촬영이라는 것이 조건반사처럼 미소가 지어지잖아요? 그래서 저는 사진을 찍을 때마다 자연스럽게 웃게 되었죠. 그렇게 저는 셀카 한번으로 2번의 웃음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제 삶을 즐겁게 바꿔 놓을 수 있었고요.

이렇게 저처럼 셀카를 이용하셔도 되고, 스스로 자신이 재미있을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찾으셔도 됩니다. 중요한 것은 주변 환경이 유머하기 힘든 환경이라고 유머 자체를 잃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겠죠. 누굴 웃겨야만 유머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스스로 즐거운 상태가 될 수 있는 것도 훌륭한 유머입니다. 자신을 웃겨보세요.

 

<개그맨 이정수 프로필>
- 현) 네이버 칼럼니스트
- 현) EBS 라디오 행복한 교육세상(라행세) 출연
- 이리예 주양육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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