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요한목사 시론] ‘자기중심’ 요셉의 변화와 용서
/ 변요한 경찰청교회 목사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창세기 45:5)
우리가 사는 이 시대,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이 시대에 ‘본질’을 붙들면, 하나님과 관계를 붙들면, 기도를 붙들면, 예배를 붙들면, 말씀을 붙들면, 모든 것이 새로워집니다.
길이 열립니다. 새 역사, 새 기적이 일어남을 믿습니다.
오늘 머리글 말씀처럼 요셉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어떤 본질(本質)을 발견했기에 ‘콜로 삐브키’ ‘방성대곡’(放聲大哭, 창세기 45:2)할 만큼 그간의 사정들이 녹녹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형들을 용서할 수 있었을까요?
‘놀라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창세기 45:3)’ 두려워 떨고 있는 형제들에게 ‘당신들 스스로 한탄하지 마소서’ ‘당신들에게 스스로 화를 내지 마소서’(NIV, And do not be angry yourselves)라고 오히려 형들을 위로할 수 있었을까요? (창 45:2~5)
이런 경우 ‘나’라면 이것이 가능했을까? 나에게도 이런 경우가 닥쳤다면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물론 ‘총리’가 되었으니, 성공했으니 ‘여유’라기 보다는 ‘체면’으로라도 그럴 수 있지 않았을까?
그렇지만 ‘교통체증’으로 꽉 막힌 서울 길 한복판에 ‘서’ 있노라면, 이런 ‘체면’마저도 ‘차 유리창’에 가두어 버리고 옆 차선으로 ‘깜빡이를 켜고’ 비집고 들어가고픈 저를 봅니다. 왜냐하면, 옆 차선은 잘 빠져나가는 것 같은데 제가 가는 방향만 ‘머피의 법칙’이 적용된다고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난 목사인데’ ‘먼 훗날 나는 어디선 가 한숨을 쉬며 이야기할 것이다. 숲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고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다고 그리고 그것이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고.’ 그래서 ’응집 물질 물리학(condensed matter physics)자들이나, 교통전문가들의 조언대로 ‘한 눈 팔지 않고 제 속도를 유지하며 침착’하게 운전함으로 겨우 ‘체면’을 유지할 수 있었기에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나 이는 죽음도 불사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다시 말하여 ‘아버지께 사랑을 독차지한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고, 자신만 채색 옷을 입은 것을 자랑했으며, 소외당한 형제들의 입장은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꿈을 입에 거품을 물고 이야기할 때 형제들이 받을 허탈감이나 절망감을 아예 고려조차 하지 않았던’ 요셉이 어떻게 이렇게 모든 것을 쉽게 용서할 수 있었던 그 본질은 무엇이었을까요?
작은 정치적 상황에도 요동치는 주식시장처럼 ‘불균형과 불완전성’ 및 ‘끊임없이 변화하는 현실 경제’ 패턴 가운데 ‘공급 균형’을 ‘복음’처럼 받아드리는 애덤 스미스(Adam Smith)의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처럼, ‘한계 효용에 체감하는 효용 함수(utility function)와 한계 비용이 체증하는 비용 함수(cost function)를 최적화하여 시장 경제를 안정시키는 방법처럼, 제 가운데도 요동치는 이 ‘감정의 선’을 안정시키고, ‘여유와 감동’을 전할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태복음 5:16)를 ‘요셉’을 통해 가능하게 한, 멋진 영적 시야(靈的視野)를 넓힐 수 있었던 그 ‘본질(本質)’은 무엇일까? 하는 것입니다.
오늘 머리글 말씀 “... 한탄하지 마소서”와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창세기 45:5) 사이에 ‘원어나 영어 성경’에는 있지만, 번역 성경에는 없는 ‘왜냐하면’이라는 뜻을 갖는 ‘키’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요셉은 당장이라도 형들에게 왜 그때 그렇게 사정했는데도 불구하고 저를 죽이려고 했으며, 상인들에게 팔아야 했는지 따지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그 후 몇 차례나 죽을 고비를 넘겨야 했으며, 어떻게 ‘살얼음판’ 같은 삶을 견뎌 왔는지, 다 이야기하고 형들도 내가 당한 만큼 당하게 하고 싶다는 생각이 조금이라도 없다면 그것이 오히려 거짓말일 것입니다.
요셉과 똑같지는 않지만, 필자에게도 따지고 싶은 사람들과 당한 만큼 돌려주고 싶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때마다 하나님은 저를 포근히 안아 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너를 통해 내가 이룰 계획이 있다’고 말입니다.
요셉이 형들을 용서하고 형들에게 근심하지 말고, 한탄하지 말라고 할 수 있었던 진짜 이유, ‘키’(because)는 하나님께서 “하나님 백성들의 멸망을 막기 위하여”(창세기 45:5)입니다. 그것도 가뭄으로 양식이 없어서 굶어 죽을까 봐서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생명의 구원’은 ‘예솨’가 아니라 ‘미호야’로, 우리의 ‘생명을 보전’(NIV, to save lives)시키시려고 ‘요셉을 형들’보다, ‘저를 형들’보다 먼저 보내신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대한민국을 용서해 주십시오. 대한민국을 살려 주십시오. 우리 대한민국이 하나님 뜻을 이루는 데 쓰임 받게 하옵소서. 우리 자녀들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서고 부강한 대한민국에서 살아갈 수 있게 해 주시길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변요한 목사 약력>
- 경찰청교회 시무
- 극동방송 운영위원
-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자문위원
- 대한민국국가조찬기도회 경찰자문위원
- 서울대학교 동창회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