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요한목사 시론] 일어나 승리하는 삶

/ 변요한 경찰청교회 목사

2025-03-11     임지영 기자
변요한

“그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그의 손으로 붙드심이로다”(시편 37:24)

경제에서 탄력성(elasticity)은 가격이나 수요의 변화에 대한 시장의 반응 정도를 나타내는 지표로, 가격 탄력성(Price elasticity)과 수요 탄력성(Demand elasticity)으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리질리언스(resilience)라고 불리는 ‘탄성’, ‘회복 탄력성’은 오뚝이와 같은 탄력성의 개념으로, 어려움이 있어도 그 기능 수준의 회복과 복귀하는 능력을 말합니다.

특히 가족의 내재된 힘, 가족 극복력, 가족 회복력 등으로 불리는 ‘가족 탄력성’은 역경으로부터 되돌아와서 더 강해지고 자원을 더 풍부하게 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하며, 위기와 도전에 반응하여 인내하고 스스로 회복하고, 성장하는 역동적 과정을 의미합니다.

수많은 고난과 역경을 당한 사도 바울의 이야기를 떠올립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고린도후서 4:8~9)

‘빙점’이라는 소설을 쓴 일본의 여류 작가 미우라 아야코를 아실 것입니다. 그녀는 수없이 자살을 시도했던 지독한 회의주의자였고 아주 병적인 허무주의자, 염세주의자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병상에서 친구가 놓고 간 성경을 뒤적이다가 우연히 구약의 전도서를 보게 되었습니다. 전도서에서 처음부터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다’고 기록된 말씀에 그녀는 꽂혔습니다.

자신은 지금까지 성경을 그저 서양 사람들의 가치관이나 서양 사람들의 윤리나 도덕을 가르치는 종교 서적 중 하나라고 생각했는데, 놀랍게도 성경에 자기가 품고 있는 절망보다 오히려 더 무섭고 더 철저한 허물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은 절대로 인간을 미화하거나 인간의 삶을 그럴듯하게 포장하지 않습니다. 가차 없이 모든 것을 드러내고 인간 허무의 진상을 적나라하게 다 폭로합니다. 그뿐 아니라 예수를 믿으면 혹 욱여쌈을 당할 일이 있어도 주님이 사전에 그런 일을 당하지 않도록 해 주시고, 답답한 일 같은 것도 주님이 미리미리 손을 쓰사 아예 그런 일이 없게 해 주실 것이라는 ‘기대’ 조차 무너지게 할 때가 있습니다.

이때 우리는 ‘왜요? 왜요?’라는 질문을 던지곤 합니다. 오히려 예수를 믿지 않은 자가 더 잘되는데, 우리 가운데 절체절명의 위기를 만나게 하시고 사면초가와 같은 절망감을 왜 주시는 것입니까? 라고 부르짖다 보면,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다 보면, 이러함이 다가 아니라는 말씀을 주십니다. 그리고 세상이 나에게, 우리에게 할 수 있는 일은 정확히 거기까지라는 말씀을 주십니다.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지느니라”(잠언 24:16)

여기서 ‘일곱 번 넘어진다’라는 말은 꼭 횟수로 일곱 번을 말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이는 넘어질 만큼 다 넘어지고 쓰러질 만큼 다 쓰러져 이제는 더 쓰러질 것도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이며, 이제는 죽음밖에 없는 상황을 말하는 것이며, 실패할 만큼 실패하고 약할 만큼 약해졌다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이제는 더 이상의 기회나 희망이 없는, 한 번 더 넘어질 여유도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기도가 나옵니다. 그래 이제는 하나님밖에 할 수가 없구나. 하나님이 하십니다. 오늘 머리글을 다시 보겠습니다. 여기서 ‘넘어진다’는 것은 ‘눕다’라는 뜻의 ‘나팔’(נפל)이라는 말로, ‘복싱경기’에서 미끄러져 넘어졌다가 일어나므로 심판이 보기에 경기를 계속해도 되겠다고 판단되는 경우이고, ‘엎드러지다’는 ‘내동댕이치다’로 ‘유탈’(יוטל)이란 말의 수동형을 번역한 말로 ‘KO’입니다. 혹 일어나도 더이상 경기할 수 없는 ‘종료’를 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일어나야 합니다. 삶이 너무나 힘들고 도대체 이러한 일이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 숨을 쉬지 못할 정도로 가슴이 아프고 견디기 힘들어 세계적 화가 반 고흐가 ‘참전 후유증으로 평생 고통 가운데 지내며 그 고통으로 두 손을 꽉 움켜쥔 채 얼굴을 가리고 울고 있는 노인을 연필’로 8년 전에 그렸던 ‘울고 있는 노인’을 유화로 다시 그리며 ‘고통 속의 노인처럼 울고 싶었던 자신을 표현한 뒤 세상을 등졌던 것’과 달라야 합니다.

우리는 포기하지 말고 일어나야 합니다. 주님의 손을 잡고, 일어나 세상에 우뚝 서야 합니다. 하나님이 내밀어 주신 손을 잡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이사야 60:1)

새싹을 보면 이렇게 연약해 보이는 것이 어떻게 모든 어려움을 이기고 비집고 나올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가집니다. 3월의 시샘하는 강풍도, 눈도, 어둠도 솟아 나는, 일어서려는 의지를 꺾지 못하듯 우리는 반드시 이깁니다. 승리합니다.

말씀과 기도로 주안에서 늘 평안하시길 축원합니다.

<변요한 목사 약력>

- 경찰청교회 시무
- 극동방송 운영위원
-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자문위원
- 대한민국국가조찬기도회 경찰자문위원
- 서울대학교 동창회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