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이 시작되자 나는 혼자 기차를 타고 삼촌네 집으로 향했다. 무엇이든 모으기 좋아하는 삼촌은 자전거를 빌려주었고 나는 자전거를 타고 시골 바람을 가로지르며 달렸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길고 긴 여름날의 자전거 일주는 나를 우연한 곳으로 데려다주었다. 거기에는 눈부시게 파란 바다가 있었다. 나는 단번에 바다에 사로잡혀 버려 숨이 가쁠 정도로 뭔가 벅차오르는 걸 느꼈다. 그러느냐고 그해 여름 내게 다가온 가장 큰 파도를 보지 못할뻔했다.
소녀였다. 헤엄치던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 애는 곧 누군가가 부르는 이름 속으로 사라졌다. 나는 반쯤 넋이 나간 채로 한밤중이 되어서야 집에 돌아왔고, 그 애를 만나기 위해 몇 번이고 다시 바다를 찾아갔지만 만날 수는 없었다.
여름 방학이 끝나기 하루 전날 마침내 그날이 찾아왔다. 그 애는 머리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을 고스란히 맞으며 내게 강아지를 잃어버렸다며 말을 건넸다. 어디서 말할 용기가 났는지 모르지만 난 같이 찾아보자며 그 애를 자전거 뒤에 태우고 달렸다.
그 애와 처음 만났던 해변에 자전거를 눕혀놓고선 강아지 이름을 부르며 찾아다녔다. 내일이면 부모님이 계시는 영국으로 돌아간다는 그 애는 바다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수영하고 싶다며 바다로 뛰어들었다. 나도 같이 뛰어들었다.
우리가 한마음이어서일까. 간절한 기다림에서일까. 아니면 만나자마자 헤어져야 하는 아쉬움 때문이었을까. 삼촌과 함께 강아지는 곧 우리 앞에 나타났고, 우리의 여름 방학은 그렇게 끝이 났다. 그해 여름의 눈부신 기억은 그렇게 내 가슴속에 깊이 새겨졌다.
‘그리워하는 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피천득의 수필 ‘인연’이 생각나는 그림책입니다. 학창 시절 교과서에서 이 수필을 배웠을 때는 사람 간의 만남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하기만 했습니다. 친구 만나면 그저 좋기만 한 사춘기 청소년들에게 만남과 헤어짐을 이해하기란 참 어려웠습니다. 만나면 좋은데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라는 마지막 문구가 마음에 와닿기 힘들었습니다. 이제는 지나간 세월만큼이나 만남과 헤어짐이 많아지니 작가의 마음을 조금 헤아릴 정도는 되었다고나 할까요.
서부 영화 같은 기차역, 넓은 옥수수밭, 황금빛 출렁이는 밀밭, 빨간 자전거, 파란 바다, 별이 반짝이는 여름밤의 맑은 수채화는 독자에게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꼭 소년이나 소녀가 된 것처럼 책으로 들어가 같이 설레고 기뻐하며 그리워하고 가슴 벅차오르며 둘의 만남을 행복해합니다. 소년의 추억이 나의 추억이 된 것 같습니다. 이 세상 어딘가 그 애가 있다는 사실은 나와 소년만 아는 비밀이 되었습니다. 누구에게나 가슴속엔 그해 여름이 있는 것처럼요.
나에게는 어떤 만남이 있었더라, 그 친구를 만났을 때는 어땠지? 친구와 만나서 행복했던 기억은 무엇이 있을까 되새기게 됩니다. 덕분에 어릴 때로 되돌아가 맘껏 뛰어놀던 동네 풍경 속 친구들을 생각하니 슬그머니 미소가 지어지네요. 삶이란 이런 아름다운 기억의 조각이 모여서 이루어지나 봅니다. 찰나의 아름다운 순간들을 새기고 추억하고 새로운 만남을 찾아 떠나기도 하니까요. 헤어짐이 있어 만남이 더 아름답다는 말이 선물처럼 다가옵니다.
글쓴이·김선아
그림책씨앗교육연구소 대표
그림책을 좋아하여 여러 사람들과 그림책을 나누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