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을 보다] 고마워요, 고비 씨! 《자린고비》
[그림책을 보다] 고마워요, 고비 씨! 《자린고비》
  • 송지나 기자
  • 승인 2022.12.07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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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린고비 / 노인경 지음 / 문학동네 출간
자린고비, 노인경 지음, 문학동네 출간, 2022년 9월. (사진=문학동네 제공)

미역을 박박 씻어 불려 참기름에 볶다가 물과 소금을 넣고 한 솥 끓이면 오래오래 먹을 수 있었다. 밥과 김치만 있으면 든든한 한 끼가 되었고 계란 후라이라도 하나 있으면 임금님 수라상이 부럽지 않은 진수성찬이 되어 물리도록 먹었다. 딱히 음식을 조리할 도구도 양념도 재주도 없던 학창 시절 자취방 최고 메뉴였던 미역국은 그렇게 해서 지금은 좋아하지 않는 음식이 되었다.

별안간 그 시절 미역국이 생각났다. 지금은 소고기를 듬뿍 넣거나 갖가지 좋은 재료를 넣어 끓이는 미역국을 별미로 먹지만, 먹을 때마다 참기름과 소금만으로 끓인 미역국이 겹쳐 떠오른다.

앞이 보이지 않게 어둠만 가득한 시절, 추운 자취방에서 먹던 미역국의 맛은 잊을 수 없다. 따로 맛이 있겠느냐만, 단지 허기진 배를 채워주던 미역국의 기억만은 선명하다. 다행히 어렵고 힘들었던 시절 같이 공부하던 친구들이 나눠주던 따뜻한 자판기 커피 한 잔, 말 한마디에 잘 견뎌냈다.

(사진=문학동네 제공)
(사진=문학동네 제공)

그녀의 이름은 고비 씨, 자린고비이다. 어려서부터 가난과 한 식구처럼 살아 어떻게 사는 것이 돈을 들이지 않고 잘 사는 것인지 잘 알고 있다.

최대한 얇게 썰어 달라고 한 김밥을 오래오래 씹어 먹는 것이 하루 두 끼의 식사이며, 시장의 떨이 바구니 속 채소나 과일도 그 정도면 괜찮다고 생각한다. 여름엔 시원한 도서관에서 책을 보고 그림을 그리고, 겨울엔 난방 텐트 속에서 잠을 청한다. 버스나 지하철을 타지 않아 아낀 돈이 고스란히 남았다는 생각에 걷는 것쯤은 하나도 힘들지 않다.

그림을 잘 그리는 고비 씨가 유일하게 만나는 사람은 그림을 의뢰한 편집자이다. 간소하게 일에 대한 이야기만 주고받던 편집자가 어느 날 방울토마토 한 팩을 건넨다. 고비 씨는 괜찮다고 손사래를 치지만 편집자는 토마토를 받는 대신 그림 한 장 그려달라고 한다. ‘돈 드는 거 아니니까 작게 그리면 될 거야.’

토마토는 이제까지 먹었던 그 어떤 것과도 맛이 달랐다. 작은 토마토 그림과 함께 달콤하고 시큼하고 단단한 토마토의 맛에 대해 이야기하자 편집자가 빙긋 웃는다. 그 후로 편집자는 오미자청과 배 한 알, 아버지 제사 음식을 나눠준다. 그렇게 고비 씨의 마음속에는 누군가 건네는 따뜻한 정이 자리 잡는다.

긴 겨울이 끝나고 늘 먹던 김밥 대신 떡볶이를 주문한 고비 씨는 그 푸짐함에 행복하다. 여전히 예전과 똑같은 삶을 살아가는 고비 씨이지만 조금 달라진 게 보인다. 무채색의 공간 속에 혼자였던 고비 씨는 타인이 나누어준 따뜻한 온기로 더이상 어깨가 굽어 보이지 않는다. 푸른 세상 속으로 내딛는 고비 씨의 발걸음이 무척 힘차 보여 내 마음도 편안해진다.

(사진=문학동네 제공)
(사진=문학동네 제공)

옛이야기 속 구두쇠의 대명사 자린고비는 근검절약하여 큰 부자가 된 뒤 어려운 백성을 도와 임금님에게 상까지 받았다고 한다. 옛이야기 속 자린고비는 타인의 어려움을 헤아려 베풀어서 따뜻한 사람이고, 노인경 작가의 자린고비는 편집자의 마음을 받아들여 자신이 마음을 열어 따뜻해지는 사람이다.

고비 씨가 그린 그림에도 분명 변화가 있을 것이다. 편집자가 나누어준 오미자차를 마시니, 마시기 전에 그린 그림은 아무래도 정직해 보이지 않아 다시 그린 것처럼 고비 씨의 그림은 이젠 좀 더 밝고 선명하고 진실할 것이다.

고비 씨 때문에 미역국이 생각나 한동안 머리가 몹시 복잡했다. 고비 씨 생각에 잠겨 있는 것이 분명한 그때 화장실에 다녀오다 복도에서 넘어졌다. 아주 보기 좋게 큰 대자로 뻗었다. 다행히 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창피함은 지나갔지만 무릎이 몹시 아팠다. 바지를 툭툭 터는데 ‘배 좀 고프면 어때? 그래도 건강하게 잘 지냈잖아. 어려움을 헤치고 바르게 살려고 노력 많이 한 거 알아. 그때처럼 그렇게만 하면 돼. 잘하고 있는 거야.’하고 고비 씨가 말을 건네 오는 것이 느껴졌다.

아, 고비 씨가 내게 손을 내밀어 일으켜 주었구나. 지난날의 나를 위로하고 앞날을 나를 응원해주는구나. 잘 지낼게요. 고마워요, 고비 씨. 고비 씨도 잘 지내기 바라요.

 

 

 

글쓴이·김선아

그림책씨앗교육연구소 대표

그림책을 좋아하여 여러 사람들과 그림책을 나누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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