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가부 폐지 논쟁, 재차 점화...여성계 반발 거세
여가부 폐지 논쟁, 재차 점화...여성계 반발 거세
  • 황예찬 기자
  • 승인 2022.10.24 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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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당역 살인사건’...다시 거리로 나온 여성들
“정부조직 개편방안, 성평등 정책 강화 아냐”
지난 15일 열린 '성평등 민주주의 후퇴, 우리가 막는다' 집회에서 참가자들이 행진하고 있다. (사진=한국여성의전화 제공)
지난 15일 열린 '성평등 민주주의 후퇴, 우리가 막는다' 집회에서 참가자들이 행진하고 있다. (사진=한국여성의전화 제공)

[베이비타임즈=황예찬 기자] 여성가족부 폐지를 반대하는 목소리에 다시금 불이 붙었다. 최근 일어났던 신당역 살인사건 이후, 행정안전부에서 내놓은 정부조직 개편방안이 불씨가 된 것으로 보인다. 정부는 여성계 주요 단체 및 전문가와 협의해 여성가족부 폐지 및 보건복지부 산하 편제를 추진하겠다는 입장이지만 여성계의 반발이 거세 쉽지 않을 전망이다.

◆ “어디도 안전하지 않았다” 여전한 공포

지난달 14일, 서울 지하철 신당역 여자화장실에서 31세 남성이 서울교통공사 입사 동기였던 28세 여성 역무원을 흉기로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지난 2016년 강남역 인근 주점 남녀 공용 화장실에서 여성을 대상으로 한 이른바 ‘묻지마 살인’이 일어난 지 6년 만이다.

각계에서는 즉각 “6년 동안 변한 게 없다”며 분노를 표했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은 “여성을 존엄한 인격체가 아닌 성적 객체로 여기는 여성혐오가 먼지처럼 떠다니는 우리 사회의 문제”라고 지적했고 서울교통공사 노동조합은 “공사는 각성하고 책임져야 하며 서울시 역시 실질적인 사용자로서 사고 진단과 재발 방지, 대처 방안 마련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같은 달 22일에는 종로 보신각 앞에서 여성노동연대회의가 주최하는 대규모 추모 집회가 열렸다. ‘어디도 안전하지 않았다. 우리는 끝까지 싸울 것이다’라는 이름으로 열린 집회에는 약 600명의 시민이 모여 추모의 뜻을 나누고, 여성이 일터에서조차 안전하지 못한 현실에 대해 분노의 의견을 내기도 했다.

노헬레나 한국여성노동자회 연대사업국장은 “서울교통공사는 여성 숙소가 마련되지 않았다고 채용에서 불합격시킨 회사”라면서 “피해자의 용감한 싸움에 사회는 응답하지 않았고, 우리는 이를 구조적 성차별이라 부른다”고 지적했다.

황연주 젠더정치연구소 ‘여세연’ 사무국장은 “여성가족부 장관은 ‘피해자가 충분히 상담받았어야 한다’고 하는데, 도대체 얼마나 더 대응했어야 하는지 모르겠다”며 “무책임한 발언”이라고 지적했다.

앞서 지난 3월 윤석열 대통령은 당선인 신분으로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인선을 발표하면서 여성가족부에 대해 “부처의 역사적 소명을 다하지 않았나. 불공정과 인권침해, 권리구제를 위해 효과적인 정부 조직을 구상해야 한다”며 사실상 여성가족부 폐지를 정책 방향으로 공식화한 바 있다.

그러나 이처럼 여성이 일터에서조차 안전하게 보호받지 못하고 또다시 사망 사건이 발생했다는 점에서 이러한 방향성이 얼마나 설득력을 얻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지난 11일 '여성가족부 폐지 저지 공동행동' 주최로 용산 대통령실 앞에서 정부의 조직 개편방안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이 열렸다. (사진=진보당 인권위원회 제공)
지난 11일 '여성가족부 폐지 저지 공동행동' 주최로 용산 대통령실 앞에서 정부의 조직 개편방안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이 열렸다. (사진=진보당 인권위원회 제공)

◆ 여가부 폐지, 보건복지부 산하로...“그런다고 지지율 안 올라”

이러한 상황에서 정부는 조직 개편안을 발표하며 여가부를 폐지하겠다는 입장을 공식화했다. 지난 6일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은 정부조직 개편 방안을 발표하면서 여가부를 폐지하고 보건복지부 산하에 ‘인구가족양성평등본부’를 신설하겠다고 밝혔다.

여가부가 여성·청소년 등 특정 대상 업무를 수행하기 때문에 전 생애 주기에 걸친 종합적 사회정책을 추진하기 곤란하고 부처 간 기능이 중복되는 등 정부 운영의 비효율을 초래한다는 것이 이유다.

이 장관은 “개별 구체적인 불공정 이슈는 이제는 성별이 아닌 사회적 약자 보호 측면에서 대응해야 하며 더 종합적인 사회정책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며 “여가부 기능이나 조직은 축소·쇠퇴하지 않고 오히려 사회복지·보건체계와 여성·가족 업무가 융합돼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그러나 여성계의 입장은 다르다. 여성가족부 폐지 저지 공동행동은 개편안 발표 5일 후였던 지난 11일 용산 대통령실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정부의 여가부 폐지 시도를 규탄하고 나섰다.

이날 기자회견에 참여한 인권운동네크 ‘바람’의 명숙 활동가는 “여성 살해 사건과 성폭력이 끊이지 않는 현실에서 성평등전담기구의 기능을 강화해야 한다는 시민의 목소리가 크다”며 “김현숙 여가부장관은 여가부가 폐지돼도 여성가족부 정책이 현재보다 더욱 확대, 강화될 것이라고 확신한다는 앞뒤 안 맞는 발언만 반복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김예지 한국YWCA연합회 이사는 “대통령 공약 사항이기 때문에 지켜야 한다는 이유는 여가부 폐지를 정당화할 수 없다”며 “(정부가) 지키지 않은 공약이 이뿐만이 아님에도 굳이 여가부 폐지 공약을 지지율이 크게 떨어져 있는 이 시점에 실행하겠다고 한 의도를 모든 국민이 모르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이어 15일에는 서울 종각역 부근에서 정부의 여가부 폐지안에 반대하는 ‘성평등 민주주의 후퇴, 우리가 막는다’ 집회가 열렸다. 한국여성노동자회가 주축이 돼 진행한 이날 집회에는 약 3000여명(주최 즉 추산)의 참여자가 모였다.

이날 발언자로 나선 송란희 한국여성의전화 상임대표는 “정부는 여가부를 폐지하고 보건복지부 산하 본부로 기능을 수행하게 하는 것이 기능 강화라고 한다”며 “백번 양보해 그것이 가능하게 하려면 9급 공무원부터 국가원수까지 모든 정부 종사자들이 성평등한 시각과 태도를 보여야 하는데, 국가원수조차 성차별을 부정하고 있으면서 대체 이게 무슨 소리냐”고 비판했다.

정부가 추진하는 ‘인구가족양성평등본부’에 대한 비판도 이어졌다.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의 나영 대표는 “한국 정부는 과거 국가가 원하는 인구정책에 따라 언제든 처벌과 통제, 관리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려고 한편으로는 낙태죄를 유지하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가족계획 정책을 실행하며 불임시술에 경제적 혜택을 주었다”며 “여가부를 폐지하고 보건복지부 산하에 본부를 만들겠다는 계획은 그저 한 부처가 사라지는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삶을 다시 이러한 통제와 관리하에 놓겠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지난 20일 김현숙 여성가족부 장관은 진보 성향 여성단체 대표들과 만나 간담회를 진행했다. 이날 여가부 청사 앞에서는 형식적 간담회를 비판하는 기자회견이 열렸다. (사진=한국여성민우회 제공)
지난 20일 김현숙 여성가족부 장관은 진보 성향 여성단체 대표들과 만나 간담회를 진행했다. 이날 여가부 청사 앞에서는 형식적 간담회를 비판하는 기자회견이 열렸다. (사진=한국여성민우회 제공)

◆ “형식적 간담회보다 성평등 정책 강화 중요”

그러나 정부는 윤석열 대통령의 핵심 공약 중 하나였던 여가부 폐지를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지난 20일 김현숙 여가부 장관은 한국여성민우회를 비롯한 주요 진보 성향 여성단체 대표들과 만나 간담회를 진행했다. 김 장관은 이날 간담회에서 “보건복지부와의 통합으로 보건복지분야 전반에 걸쳐 양성평등정책의 집행력이 강화되고, 영유아부터 노인까지 생애 전반에 걸친 정책 지원에 양성평등 관점이 반영될 기회가 될 것”이라고 재차 강조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여성민우회는 간담회 이후 즉각 논평을 냈다. 형식적 간담회보다 성평등 정책 강화가 더 중요하다는 취지다. 한국여성민우회 관계자는 “국회 여성가족위원회에 따르면 행안부, 보건복지부, 고용노동부와의 구체적 협의 과정이 보이지 않고 여가부와 보건복지부 사이의 업무협의는 단 1회만 있었다”고 지적했다.

이어 “이날 진행한 ‘여성단체장 간담회’는 의견 수렴의 자리라기보다 편파 논란을 잠재우기 위한 면피성 공간에 불과”하다면서 “지금 필요한 것은 형식적 의견 수렴이 아니라 여성가족부 축소·개편안의 철회, 성평등정책의 확대·강화”라고 전했다.

이처럼 정부와 여성계가 여성가족부 폐지안을 두고 첨예하게 대립하는 가운데, 정부가 해당 사안을 돌파하기 위해 어떤 전략을 택할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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