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건교사 강류교 칼럼] 나는 아무도 모르게 남을 돕는 운명을 갖고 태어났다
[보건교사 강류교 칼럼] 나는 아무도 모르게 남을 돕는 운명을 갖고 태어났다
  • 김은교 기자
  • 승인 2020.10.28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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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류교 서울시보건교사회장.
강류교 서울시보건교사회장.

“나는 아무도 모르게 남을 돕는 운명을 갖고 태어났다.”

판타지 드라마 ‘보건교사 안은영’ 첫 회에서 내용 시작과 동시에 주인공인 보건교사 안은영이 내뱉는 독백이다.

이 짧은 독백에 격하게 공감했다. 돕기 싫어도 도와야 하고, 딱히 의도적이지 않아도 누군가에게 노출되지 않도록 도와야 하는 보건교사.

처음 발령을 받고 보건교사를 하면서는 ‘원래 누굴 도울만큼 착하지 않은 것’에 대한 고민과 어색함이 컸다.

하지만 지금은 착하든 그렇지 않든, 학생이 다른 사람들에게 노출되지 않도록(설사 그분이 담임교사일지라도) 돕거나 지지하는 것이 보건교사의 중요한 업무 중 하나임을 받아들인다.

보건교사는 학교에서 가장 열악하고 어려운 학생들을 케어하게 되며, 자의든 타의든 그들의 오롯한 편이 되어 준다. 누군가 한 사람은 그들의 무조건적인 편이 돼 주어야 함에 따라, 그 역할을 보건교사가 하고 있는 것이다.

이 뿐만이 아니다. 보건교사는 담임교사와 감정의 골이 깊어진 학생들의 상담을 하기도 한다.

이 경우 학생들은 비밀을 요한다. 그러므로 아무리 상담 시간이 길어지고 반복돼도 보건교사는 정작 업무 수행의 결과물을 실질적으로 제시하기가 어렵다. 오히려 상담이 노출돼 담임교사가 섭섭해 하는 상황도 감내해야 한다.

더욱이 관리자에게 상담 내용을 노출하게 되면 담임교사의 입장이 곤란해질 수 있으니 비밀유지는 필수다.

예전에 학교 담벼락에서 장난을 치다가 손가락을 꿰매야 할 만큼 큰 상처를 입은 ‘2학년 지호’를 데리고 학교 근처 병원에 다녀온 적이 있다.

엄마없이 아빠·할머니와 살고 있는 어린 지호. 당시 아이는 상처를 꿰매자는 의사의 말을 듣고 병원이 떠나가라 울기만 했다. 그칠 줄을 몰랐다.

‘아빠는 지방에 계셔서 할머니가 병원으로 온다’는 담임교사의 전화를 받으면서도 나는 아이의 진정을 위해 애썼다.

그리고 그렇게 계속 달래며 안아줬음에도 불구하고 지호는 울음을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결국 “엄마는 나가 있어요”라는 의사의 말만 전해올 뿐이었다.

치료를 다하고 집에 가려 해도 할머니는 오지 않았다. 그런데 치료비를 계산하고 병원 밖으로 나가자, 저 멀리 아이의 할머니가 어쩔 줄을 몰라하며 계신 것이었다.

“왜 안 들어 오셨어요? 지호 많이 울었는데요...”하고 여쭤보니 치료비가 없어서 못 들어오셨단다.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다.

나는 곧 “할머니, 치료비는 학교에서 낼게요. 걱정 마세요”라고 말한 후, 약국에 들러 약을 사가지고 와 아이랑 할머니를 집으로 보냈다.

물론 그때 학교에는 이러한 명분의 치료비는 없었다. 바쁜 학교 관리자들은 택시비나 치료비에 대해 묻지 않는다. 돈 때문이 아니라 나를 엄마처럼 안고 우는 지호가 안쓰러웠다. 마음이 아팠다. 그리고 이 역시 보건교사의 몫이다.

매년 3월2일 첫 개학일이 되면 보건실로 등교하는 여학생이 있다.

지능이 조금 낮은 수진이는 3월 개학 첫날이 되면 “우리 교실에 담임선생님이 없어요. 모르는 사람이 있어요”라며 가방을 메고 보건실로 들어온다.

나는 수진이와 이것저것 일상적인 대화를 나눈다. 학년이 바뀐 것, 담임선생님이 바뀐 것에 대해 이야기를 하며 교실로 데려다주기를 반복한다.

그렇게 몇 주를 반복하다 보면, 그새 보건선생님 보다 더 친해진 담임선생님의 품에 안겨 더 이상 아침에 보건실로 오지 않는다. 수진이는 4학년까지 그랬다.

보건교사는 해마다 바뀌지 않는 이들의 오랜 담임교사이기도 하다. 물론 아무도 알아주지 않지만.

과거, 성희롱·성폭력과 관련해 시 교육청의 높은 분을 만난 적이 있다. 당시 그분은 학교 교직원의 성폭력 사안과 관련해 “보건교사들이 학교에서 뭘 하는지 모르겠다”며 서운함을 토로해냈다.

이에 나는 “몇몇 학교에서 성폭력이 발생했지만, 더 이상 같은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부단히 고민하고 있다. 단위 학교 내 보건교사들이 애써 고군분투하고 있다”는 말을 전했다. 또 “나머지 98%의 학교를 성폭력으로부터 안전하게 지키느라 노력 중”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학교에서 성폭력이 발생하지 않도록 학생과 교직원을 교육하는 일은 그나마 수월하다. 하지만 성폭력이 발생할 것 같은 조짐이 보이고 더 이상 진행되지 않도록 대처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그 때마다 피해자와 행위자는 모두 성 고충 업무를 담당하는 보건교사를 원망하기 일쑤다. 때로는 협박을 받을 수도 있다.

물론 모든 교직원이 함께 노력한 덕분이기도 하겠지만. 이와 같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98%의 학교가 성폭력으로부터 안전한 이유는 바로 ‘보건교사’라는 ‘지킴이’가 있기 때문이다.

입시 위주의 교육 환경 속에서 들여다 보면 보건교사의 존재는 너무나 작고 미미해서 누구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보건교사들은 “학생 건강을 위해서는 보건교육이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홀로 주장한다.

앞서 교육부는 “2015 개정 교육과정의 초등 보건교육을 관련 교과(군)와 창의적 체험활동 시간을 활용해 지도하라”며 애매모호한 고시를 내린 바 있다. 이는 마치 학교 형편에 따라 “보건수업 해라” 또는 “하지 마라”라고 말하는 상황과도 같다.

그럼에도 나는 평생의 건강 습관을 좌우하는 보건교육의 중요성을 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하지말라고 해도 해야 함’을 숙명으로 느낀다.

학교에 한 명뿐인 보건교사에게 6개 전학년을 다 교육하라는 황당한 상황도 존재한다. 그리고 이 같은 일이 발생할 때면 “지난 2009년 개정 교육과정 당시처럼 교육부의 명확하고 구체적인 시간과 방법이 고시된다면 일선에서 덜 힘들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들게 된다.

보건교사들은 각각의 아이들에게 신체적·정신적으로 건강한 성장을 지원해주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 바로 ‘보건교육’임을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비교과로 치부하며 과목으로도 인정해주지 않는 보건교육을, 누가 뭐라해도 오로지 학생의 평생 건강을 위해 지켜나가고 있다.

드라마 속 보건교사 안은영이 젤리를 멋지게 물리치며 히어로처럼 학생들을 돕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겠지만, 진짜 현실 속 보건교사는 보이지 않는 곳에 존재하는 ‘낮은 자리의 히어로’들이다.

우리에게도 보건교사 안은영처럼 ‘무지개 봉’이 있으면 좋겠다. ‘마음이 아픈 학생을 감쪽같이 낫게 하는 무지개 봉’.

다음번 개정 교육과정 때는 보건교육을 제대로 고시해, 현장의 보건교육이 체계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게 하는 ‘보건교육 고시 무지개 봉’.

보건교사가 없는 학교에도 보건교사가 배치되는, 그리고 큰 학교에 2인의 교감이 배치되듯 거대 학급에 보건교사가 추가로 배치되는 ‘인력지원 무지개 봉’.

그리고 모든 학교에서 항상 보건교육을 하는 ‘보건교과를 인정하는 무지개봉’ 까지……

코로나19와 같은 국가적인 감염병 위기는 앞으로도 계속 일어날 것이다.

보건교사는 응급처치·감염병 예방 등의 의료 행위를 하는 간호사의 업무와 보건교육을 하는 교사의 업무, 두 가지를 함께 수행하는 능력자들이다. 이 능력자들이 학교 현장의 학생들을 건강하게 지킬 수 있도록 하는 제도적 지원이 절실하다.

 

 

<강류교 서울시보건교사회장 약력>

- 現 서울성수초등학교 보건교사

- 現 서울시보건교사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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