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랑에세이] 낙엽이 된 은행잎이 누운 자리
[아리랑에세이] 낙엽이 된 은행잎이 누운 자리
  • 서주원 기자
  • 승인 2019.12.27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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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비타임즈] 초겨울 은행잎은 그 색이 참 곱기도 했다.  

노란색이라 말하기 보단 황금색이라 표현하는 것이 어쩌면 더 격에 어울릴 법 했다. 그런데 겹겹이 몸을 맞대고 여럿이 함께 우려내는 그 색은 겨울비를 흠뻑 머금은 뒤에도 곱고 길바닥에 떨어져 포개져 누워 있을 때도 곱디곱다.

늦가을부터 땅바닥에 떨어진 은행은 그 냄새 탓에 되도록 밟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편이지만 길바닥에 떨어져 자리를 잡고 누운 은행잎은 무심코 밟더라도 그리 기분이 나쁘진 않다.

입동 절기가 지나고 소설절기로 접어들면서 은행잎이 나무에서 떨어지는 빈도가 크게 늘었다.  어느 땐, 수북하게 쌓여 푹신푹신한 은행잎을 지르밟고 걸을 때도 있는데 역시 색다른 쾌감을 전해 주었다.

몇몇해 전의 어느 가을날, 난 가방 하나를 새로 구입했다. 끊어진 어깨끈을 대충 얽어매고 다니던 낡은 가방을 버리고 새로 구입한 이 가방은 좌우측이 지퍼가 아닌 똑딱단추로 되어 있었다.

어느 날 집에 들어와서 가방을 열어보니 가방 안엔 은행잎 한 장이 들어 있었다. 왜 그 은행잎이 내 가방 속에 들어가 있는지 곰곰이 따져 보았다. 어느 날 퇴근길에 집 근처 횡단보도 앞에 서 있는데 은행잎이 마치 꽃비처럼 나무에서 떨어져 내렸다.

차가운 겨울바람에 떨어져 흩날리는 그 은행잎들의 군무를 잠시 넋이 빠져 바라보았다. 아마도 그 때 은행잎 한 장이 내 가방 속으로 들어 갔던 모양이었다.

길바닥에 떨어져 사람들의 발길에 짓뭉개지지 않으려고, 바람에 날려 도로 위에 떨어져 자동차 바퀴에 깔리기 싫어서 아마도 내 가방 속에 들어가 자리를 잡고 누운 것 같아 나는 그 은행잎 한 장을 가방 속에 그대로 넣어 두었다.

나뭇가지에 매달려 일생을 살다가 낙엽이 되어 땅에 떨어진 그 곱디고운 은행잎들도 이승을 떠나며 제 각각 누운 자리가 저마다 달랐다.

우리네 인생도 이승에서 마지막 눕는 자리가 분명 서로들 다를 텐데, 피치 못할 사정이 아니라면 진자리 보단 마른자리에 눕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리라.

나 역시 황금색 은행잎처럼 곱게 늙고 이생의 마지막엔 되도록 마른자리에 눕고 싶다. 그런 소망을 이루려면 어떻게 살아야 되는 건지 나도 몰래 내 가방 속에 들어와 누워 있는 그 은행잎 한 장을 바라보며 잠시 헤아려 보았다.

(서주원 / 어린이안전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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