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철칼럼] 이순신 생명의 은인, 약포 정탁
[김동철칼럼] 이순신 생명의 은인, 약포 정탁
  • 김동철 주필
  • 승인 2018.11.05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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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철 베이비타임즈 주필·교육학 박사 / ‘환생 이순신, 다시 쓰는 징비록’ 저자
김동철 베이비타임즈 주필·교육학 박사 / ‘환생 이순신, 다시 쓰는 징비록’ 저자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부산포 상륙 20일 만에 한성에 무혈입성을 했다. 선조는 이미 임진나루를 건너 개성, 평양, 의주로 줄행랑을 치는 상황이었다.

백성을 버리고 임금이 도망갔다는 소리에 분노한 일부는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등 3개의 궁궐과 노비문서와 재판을 담당했던 형조와 장례원(掌隷院)을 불태웠다. 중요한 국보급 사료 또한 잿더미가 되었다.

일본군이 20일 만에 폭풍처럼 한성에 들이닥칠 수 있었던 것은 조선 육군의 미약함에도 원인이 있었지만, 조선 백성들 가운데 스스로 왜군의 앞잡이가 되어 길을 안내하는 향도(嚮導)들이 부지기수로 늘어났기 때문이었다.

백성을 버리고 도망친 나라님과 가혹하게 세금을 거두거나 백성의 재물을 억지로 빼앗은 가렴주구(苛斂誅求)의 주인공인 썩어빠진 탐관오리(貪官汚吏)에 대한 복수극이었다.

이런 논리로 본다면 정유재란 당시 이순신 또한 선조 임금에 대한 명령불복종이 결국 왜군을 이롭게 했기 때문에 ‘부역행위’라고 볼 수 있을까.

1597년 2월 6일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은 선조의 체포령에 따라 2월 26일 한산도 진영에서 한성으로 압송되었다. 그리고 3월 4일 의금부 감옥에 갇혔다.

사헌부가 지목한 죄명은 기망조정(欺罔朝廷) 무군지죄(無君之罪), 종적불토(縱賊不討) 부국지죄(負國之罪), 탈인지공(奪人之功) 함인어죄(陷人於罪), 무비종자(無非縱恣) 무기탄지죄(無忌憚之罪)였다.

즉 조정을 속이고 임금을 업신여긴 죄, 적을 쫓아가 치지 아니하여 나라를 등진 죄, 남의 공을 가로채고 남을 모함한 죄, 한없이 방자하고 거리낌이 없는 죄 등이었다. 구체적으로 보면, 이순신의 부산포 왜영(倭營) 방화사건의 허위보고 건과 이중간첩 요시라(要矢羅)의 간계(奸計)에 따라 부산포 진격을 명령했지만 출동을 거부한 죄 등이 주요 죄목이었다.

선조는 우부승지 김홍미에게 비망기를 내려 이순신을 사형에 처할 것이니, 절차를 밟으라고 했다. 선조실록 1597년 3월 13일자 내용이다.

“이순신은 이렇게 허다한 죄상이 있고서는 법에 있어서 용서할 수 없는 것이니 율(律)을 상고하여 죽여야 마땅하다. 신하로서 임금을 속인 자는 반드시 죽이고 용서하지 않을 것이므로 지금 형벌을 끝까지 시행하여 실정을 캐어내려 하는데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대신들에게 허문(許文 허락함을 증명하는 문서)하라.”며 대로(大怒)했다.

이때 도체찰사(오늘날 합참의장) 이원익은 “왜적들이 꺼리는 수군이니, 이순신을 체차(遞差 직위를 바꿈)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그 자리에 원균을 대리로 파견해선 안 된다.”고 이순신을 적극 방어했지만 역부족이었다.

1596년 8월 8일 명나라 사신을 수행해 일본에 다녀온 황신(黃愼)은 선조에게 “규슈의 일기도(一崎島)에서부터 적관(赤關)까지 타고 돌아온 배가 이순신이 감독하여 만든 판옥선이다.”라고 하였을 정도로 그 실력을 역설했지만 이순신의 목숨은 경각(頃刻)에 달려있었다.

당시 이순신 장군은 권준, 배흥립, 김득광 등 여러 제장들과 논의하여 병선 40여 척을 건조하고 있었다. 또 전라도 전 지역을 돌면서 군사, 군량, 군기, 군선 등의 확보에 열중해 화약 4천근, 군량미 9천914석 등을 확보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모든 전력자산은 그해 7월 16일 원균이 일본수군에 의해 칠천량 해전에서 궤멸당하는 바람에 모두 바다 속으로 수장되었거나 일본군에게 수탈당했다.

이순신은 판중추부사 약포 정탁(鄭琢)이 올린 구명탄원서 신구차(伸救箚)에 의해서 가까스로 목숨을 건지게 되었다. 그것은 천우신조(天佑神助)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정탁은 선조에게 “군기(軍機)는 멀리 앉아서 헤아릴 수 없는 법이므로 이순신이 진격하지 않은 데에는 그럴만한 까닭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뒷날에 다시 한 번 공을 세울 수 있게 하소서.”라고 간청했다.

노신(老臣)의 간청에 마음이 움직인 선조는 이순신에게 합천의 권율 휘하에서 백의종군(白衣從軍)할 것을 명령했다. 3도 수군통제사(해군참모총장)에서 하루아침에 계급장을 떼인 ‘무등병’ 이순신은 요시라의 간계를 믿지 않음으로써 이런 어처구니없는 수모를 당하게 됐다.

절체절명의 상황에 놓인 이순신의 목숨을 살려준 은인(恩人) 정탁은 조선 최고의 변호사였다. 그의 명문장인 신구차 전문(1298자) 가운데 일부를 소개한다.

“우의정 정탁은 엎드려 아룁니다. 이모(李某 이순신)는 몸소 큰 죄를 지어 죄명조차 무겁건마는 성상(聖上)께서는 얼른 극형을 내리시지 않으시고 두남두어(두둔하여) 문초하시다가 그 뒤에야 엄격히 추궁하도록 허락하시니, …중략… 성상의 호생(好生 생명을 사랑함)하시는 뜻이 자못 죄를 짓고 죽을 자리에 놓인 자에게까지 미치시므로 신은 이에 감격함을 이길 길이 없습니다.(중략)

저 임진년에 왜적선이 바다를 덮어 적세가 하늘을 찌르던 그 날에 국토를 지키던 신하들로서 성(城)을 버린 자가 많고, 국방을 맡은 장수들도 군사를 그대로 보전한 자가 적었으며, 또 조정의 명령조차 사방에 거의 미치지 못할 적에 이모는 일어나 수군을 거느리고 원균(元均)과 더불어 적의 예봉(銳鋒 날카로운 기세)을 꺾음으로써 나라 안 민심이 겨우 얼마쯤 생기를 얻게 되고, 의사(義士)들도 기운을 돋우고 적에게 붙었던 자들도 마음을 돌렸으니, 그의 공로야말로 참으로 컸습니다. 조정에서는 이를 아름답게 여기고 높은 작위를 주면서 통제사의 이름까지 내렸던 것이 실로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군사를 이끌고 나가 적을 무찌르던 첫 무렵에 뛰쳐나가 앞장서는 용기로는 원균에게 미치지 못했으므로 사람들이 더러 의심하기도 한 바는 그렇다고 하겠으나, 원균이 거느린 배들은 마침 그 때에 조정의 지휘를 그릇되이 받들어 많이 침몰된 것이니만큼, 만일 이모의 온전한 군사가 없었더라면 장한 형세를 갖추어 공로를 세울 길이 없었을 것입니다.

이모는 대장이라 나갈만함을 보고서야 비로소 시기를 잃지 않고 수군의 이름을 크게 떨쳤던 것입니다. 그러니 전쟁에 임하여 피하지 않은 용기는 원균이 가진 바라 하겠지만, 끝내 적세를 꺾어버린 공로로는 원균에게 양보할 것이 많지는 않습니다. 다만 그 때에 원균에게도 그만한 큰 공로가 없지 않았는데, 조정의 은전은 온통 이모에게만 미치고 있으니 참으로 애석한 일입니다.

원균은 수군을 다루는 재주에 장점이 있고, 천성이 충실하며, 일에 달아나 피하지 않고, 마구 찌르기를 잘 하는 만큼, 두 장군이 힘을 합치기만 하면 적을 물리치기에 어렵지 않을 것이라 신이 매양 어전에서 이런 말씀을 올렸던 것입니다. …중략… 이모는 과연 적을 방어하는 일에 능란하여 휘하 용사들이 모두 즐겁게 쓰이므로 군사들을 잃지 않고 그 당당한 위세가 옛날과 같으므로, 왜적들이 우리 수군을 겁내는 까닭도 혹시 거기에 있지 않나 하거니와, 그가 변방을 진압함에 공로가 있음이 대강 이와 같습니다.

어떤 이는 이모가 한번 공로를 세운 뒤에 다시는 내세울만한 공로가 별로 없다고 하여 대수로이 여기지 않는 이도 있으나, 신은 적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너댓 해 안에 명나라 장수들은 화친을 주장하고, 일본을 신하국으로 봉하려는 일까지 생기어 우리나라 장수들은 그 틈에서 어찌할 길이 없으므로 이모가 다시 더 힘쓰지 못한 것도 실상은 그의 죄가 아니었습니다. 요즘 왜적들이 또 다시 쳐들어옴에 있어 이모가 미처 손쓰지 못한 것도 무슨 그럴만한 사연이 있을 것입니다.

대개 변방의 장수들이 한번 움직이려고 하면 반드시 조정의 명령을 기다려야 되고, 장군 스스로선 제 마음대로 못하는 바, 왜적들이 바다를 건너오기 전에 조정에서 비밀히 내린 분부가 그 때 전해졌는지 아닌지도 모를 일이며, 또 바다의 풍세가 좋았는지 아닌지, 뱃길도 편했는지 어쨌는지도 알 수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수군들이 각기 담당한 구역이 있어 어쩔 수 없었던 사정은 이미 도체찰사(이원익)의 장계에도 밝혀진 바도 있거니와 군사들이 힘을 쓰지 못했던 것도 사정이 또한 그랬던 것인 만큼 모든 책임을 이모에게만 돌릴 수는 없습니다.

무릇 인재란 것은 나라의 보배이므로 비록 저 통역관이나 주판질하는 사람에 이르기까지라도 재주와 기술이 있기만 하면 모두 다 마땅히 사랑하고 아껴야 합니다. 하물며 장수의 재질을 가진 자로서 적을 막아내는 것과 가장 관계가 깊은 사람을 오직 법률에만 맡기고 조금도 용서 못함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이모는 참으로 장수의 재질이 있으며, 수륙전에도 못하는 일이 없으므로 이런 인물은 과연 쉽게 얻지 못할 뿐더러, 이는 변방 백성들의 촉망하는 바요, 왜적들이 무서워하고 있는데, 만일 죄명이 엄중하다는 이유로 조금도 용서해 줄 수가 없다 하고, 공로와 죄를 비겨볼 것도 묻지도 않고, 또 능력이 있고 없음도 생각지 않고, 게다가 사리를 살펴 줄 겨를도 없이 끝내 큰 벌을 내리기까지 한다면 공이 있는 자도 스스로 더 내키지 않을 것이요, 능력이 있는 자도 스스로 더 애쓰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 이모는 사형을 받을 중죄를 지었으므로 죄명조차 극히 엄중함은 진실로 성상의 말씀과 같습니다. 이모도 또한 공론이 지극히 엄중하고 형벌 또한 무서워 생명을 보전할 가망이 없는 것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바라옵건대 은혜로운 하명으로써 문초를 덜어주셔서 그로 하여금 공로를 세워 스스로 보람있게 하시면, 성상의 은혜를 천지부모와 같이 받들어 목숨을 걸고 갚으려는 마음이 반드시 저 명실 장군만 못지 않을 것입니다. 성상 앞에서 나라를 다시 일으켜 공신각(貢臣閣)에 초상이 걸릴만한 일을 하는 신하들이 어찌 죄수 속에서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성상께서 장수를 거느리고 인재를 쓰는 길과 공로와 재능을 헤아려보는 법제와 허물을 고쳐 스스로 새로워지는 길을 열어 주심이 한꺼번에 이루어진다면, 성상의 난리를 평정하는 정치에 도움됨이 어찌 옅다고만 하겠습니까.” (이충무공 전서 권 12)

참! 논리정연하고 가슴에 깊이 아로새겨지는 명문이 아닐 수 없다. 그 명(名)변론문은 오늘날에 읽어도 두고두고 잊혀지지 않을 설득의 힘을 지니고 있다. 이순신은 이렇게 정탁의 도움을 받아서 가까스로 목숨을 보존할 수 있었다. 오호 통재(痛哉)라!

 

<김동철 주필 약력> 
- 교육학 박사
- 이순신 인성리더십 포럼 대표
- 성결대 교양학부 교수
- 이순신리더십국제센터 운영자문위원장, 석좌교수
- (사)대한민국 해군협회 연구위원
- 전 중앙일보 기자, 전 월간중앙 기획위원
- 저서 : ‘환생 이순신, 다시 쓰는 징비록’ ‘우리가 꼭 한번 만나야 하는 이순신’ ‘국민멘토 이순신 유적답사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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