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철칼럼] ‘농사꾼’ 이순신의 둔전(屯田) 경영
[김동철칼럼] ‘농사꾼’ 이순신의 둔전(屯田) 경영
  • 김동철 주필
  • 승인 2018.10.26 1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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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철 베이비타임즈 주필·교육학 박사 / ‘환생 이순신, 다시 쓰는 징비록’ 저자
김동철 베이비타임즈 주필·교육학 박사 / ‘환생 이순신, 다시 쓰는 징비록’ 저자

곤궁한 처지에서 헤쳐 나오려 치열한 몸부림을 치는 도전정신을 우리는 궁즉통(窮卽通)이라고 부른다. 궁즉통은 궁즉변(窮卽通) 변즉통(變卽通) 통즉구(通卽久)의 준말이다. 즉 궁하면 변해야 하고 그 변한 것이 통하면 그것은 오래 간다는 뜻이다. 유학의 시조(始祖) 공자가 일곱 번이나 읽어 책을 묶은 끈이 닳아 없어졌다는 주역(周易)에 나오는 말이다.

20만 왜군의 기습공격으로 임진왜란이란 미증유(未曾有)의 난리를 맞이한 장군은 당장 휘하 군사들을 먹일 양식이 필요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그래서 수많은 병사들은 굶주림에 시달렸고 영양실조로 누렇게 뜨는 황달을 보였다. 또 저항력이 약해진 나머지 전염병에도 쉽게 감염됐다.

당시 조선의 식량사정은 최악이었고 백성들은 급기야 먹을 것이 없어 사람을 잡아먹는 인상식(人相食)을 거리낌 없이 자행했다.

찢어지게 가난한 병영의 책임자인 장군은 궁리 끝에 둔전(屯田)을 경영할 생각을 해냈다. 사정이 곤궁하므로 온갖 궁리를 해서 변통하는 길은 바로 실사구시(實事求是)의 격물치지(格物致知)를 활용하는 방안이었다.

장군이 둔전을 머릿속에 떠올린 것은 지난 초급장교 시절 함경도에 근무할 때 둔전경영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장군이 직접적으로 둔전(屯田)과 인연을 맺은 것은 조산보 만호(종4품) 시절인 1587년 8월 녹둔도 둔전관을 겸하면서 부터다.

그러나 그 자리에 오래 머무를 수 없었다. 9월 추수기에 오랑캐 여진족이 녹둔도에 침입했고 그들을 물리쳤음에도 불구하고 함경북병사 이일(李鎰)의 무고로 파직되어 백의종군을 당했기 때문이다.

장군은 1576년 2월 무과급제 후 1598년 11월 노량해전에서 전사할 때까지 22년 군복무 기간 중 전반부 12년 동안에 함경도 변경(邊境)에서 근무한 기간이 무려 67개월, 5년 반이나 되었다. 근무했던 함경도 북방의 동구비보, 건원보, 조산보는 험준한 산악지역으로 쌀을 경작할 논이 없는 곳이었다.

따라서 군사들의 식량을 해결하기 위해서 군둔전(軍屯田)을 경작해야 했다. 이러한 북방에서의 직간접적인 둔전관리 경험은 이후 여수의 전라좌수영, 한산도의 삼도수군통제영을 운영하고 관리하는 데 요긴하게 활용되었다.

여기서 신경과학자 다니엘 레비틴(Daniel Levitin)이 말한 ‘1만 시간의 법칙’이 떠오른다. 어느 분야든 관심을 갖고 최소 1만 시간만 투자하면 그 분야에서 성공할 수 있고 전문가가 될 수 있다는 이론이다. 1만 시간이란 하루에 3시간씩 투자했을 때 10년이면 가능한 일이다.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조선은 절대열세의 상황에서 호남을 제외하고는 전 국토가 왜군에게 유린당해 전투에 나서는 군사들의 군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게다가 명나라 원군마저 와서 식량은 태부족한 상태였다.

1593월 1월 26일 장군은 피난민에게 여수 돌산도에서 농사를 짓도록 명령해주기를 청하는 장계(請令流民入接突山島耕種狀)를 올렸다.

“당장 눈앞에서 피난민들이 굶어 죽어가는 참상을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습니다. 전일 풍원부원군 류성룡(柳成龍) 대감에게 보낸 편지로 인하여 비변사에서 내려온 공문 중에, ‘여러 섬 중에서 피난하여 머물며 농사지을 만한 땅이 있거든 피난민을 들여보내 살 수 있도록 하되 그 가부(可否)는 참작해서 시행하라.’ 하였기에, 신이 생각해본바 피난민들이 거접(居接)할만한 곳은 돌산도(突山島)만한 데가 없습니다. 이 섬은 여수 본영과 방답 사이에 있는데 겹산으로 둘려 쌓여 적이 들어올 길이 사방에 막혔으며, 지세가 넓고 편평하고 땅도 기름지므로 피난민을 타일러 차츰 들어가서 살게 하여 방금 봄갈이를 시켰습니다.”

장계에 따르면 1593년 휘하 수군은 굶주림과 전염병으로 10% 가까이 사망했다. 살아남은 수군들조차 하루에 불과 2~3홉 밖에 먹지 못해 병사들은 굶주려 활을 당기고 노를 저을 힘조차 없다고 한탄했다.

당시 사람들은 한 끼니에 보통 5홉(한 줌), 많게는 7홉을 먹었다. 아침과 저녁 두 끼를 먹는 조선시대의 관습으로 보면, 하루에 10홉의 곡식을 먹어야 했는데 수군들은 그저 죽지 않을 정도인 2~3홉으로 버티고 있었다.

장군은 이어 1593년 윤11월 17일 삼도수군통제사 자격으로 둔전을 설치할 수 있도록 청하는 장계(請設屯田狀)를 올렸다. 여기에는 이전보다 더 상세한 둔전경영의 방법이 들어있었다. 즉 조선수군의 생존을 지키기 위한 내용으로 둔전을 설치할 장소, 농군을 동원할 방법, 소득을 분배할 방법까지도 세밀하게 건의했다.

“여러 섬 중에 비어있는 목장에 명년 봄부터 밭이나 논을 개간하여 농사를 짓되, 농군은 순천, 흥양의 유방군(留防軍)들을 동원하고, 그들이 전시에는 나가서 싸우고 평시에는 들어와 농사를 짓게 하자는 내용으로 올렸던 장계는 이미 승낙해주셨고, 그 내용을 하나 하나들어 감사와 병사에게 공문을 보냈습니다.

(중략) 순천(여수)의 돌산도 뿐만 아니라 흥양의 도양장, 고흥의 절이도, 강진의 고이도(완도군 고금면), 해남의 황원목장 등은 토지가 비옥하고 농사지을 만한 땅도 넓어서 무려 1천여 섬의 종자를 뿌릴만한 면적이니, 갈고 씨뿌리기를 철만 맞추어 한다면 그 소득이 무궁할 것입니다. 다만 농군을 동원할 길이 없으니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어 경작하게 하고, 그 절반만 거두어들이더라도 군량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중략) 그리고 20섬의 종자를 뿌릴만한 면적의 본영 소유 둔전에 늙은 군사들을 뽑아내어 경작시켜 그 토질을 시험해 보았더니, 수확한 것이 정조(正租 벼)로 500섬이나 되었습니다. 앞으로 종자로 쓰려고 본영 성내 순천창고에 들여놓았습니다.”

장군의 치밀한 둔전경영 계획은 순조롭게 진행됐지만 이전에 여타 지역에서 둔전 경영의 폐해도 만만치 않았다.

예를 들어 토지는 지급하지 않고 종자만 지급한 채 몇 배에 해당하는 둔조(屯租)를 수취했고, 풍년과 흉년에 관계없이 조세를 갈취하여 농민들의 반발현상까지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농민 노동력의 강제동원과 영아문(營衙門 지방관청)과 경작자 간의 대립관계가 형성되었다. 그러니 둔전의 수확물을 국가와 경작자가 나누어 갖는다고 해도 농민들이 마냥 좋아할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서 조정에서는 둔전경영에 대한 찬반양론이 팽팽했다.

선조실록 1593년 10월 22일 기록이다.

“심충겸(沈忠謙)이 ‘옛날 제갈량도 싸움을 하려면 반드시 둔전을 경영하여 군량을 보충하였는데,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모든 것이 거덜 난 뒤여서 군량을 마련할 길이 없으니 반드시 둔전을 경영해야만 군량을 공급할 수 있습니다.’하니, 선조가 ‘둔전에 관한 의견은 훌륭하나 우리나라는 중국과 달라서 병사나 수사들이 단지 수백 명의 죽다 남은 군사들을 거느리고 있으니 무슨 군사로 둔전을 경영하겠는가.’하였다. 이에 이시언(李時言)이 ‘심충겸이 제의한 문제는 옳지 않습니다. 황해도에서 인심을 잃은 것이 둔전 때문이었는데 이제 또다시 둔전을 설치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라고 했다.”

둔전을 놓고 아옹다옹하는 이들이 누구인가? 심충겸은 문과 장원급제자로 바로 몇 달 뒤 병조판서에 오르고, 이시언은 무과급제자로 이순신의 뒤를 이어 전라좌수사겸 삼도수군통제사에 올랐던 인물이었다. 당장 군졸들의 민생고(民生苦)를 해결해야할 장군으로서는 조정에서 갑론을박(甲論乙駁)하는 탁상공론이 한심해 보였을 것이다.

장군은 1594년 1월10일 흥양목관 차덕령(車德齡)을 교체해줄 것을 요청하는 장계(請改差興陽牧官狀)를 올렸다.

“흥양감목관 차덕령(車德齡)은 도임한지 벌써 오래되었는데, 이루 말할 수 없이 제멋대로 하면서 목자(牧子 말과 소를 기르는 사람)들을 괴롭히고 학대하여 그들이 편히 붙어 살 수 없게 하기 때문에, 그곳 경내의 백성들로서 탄식하지 않는 자가 없다고 합니다. 신도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기 때문에 벌써 그런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러므로 농사짓는 일을 이 사람에게 맡겼다가는 그것을 빌미로 폐단을 일으켜서 백성들의 원성이 더욱 높아질 것이니 하루 속히 차덕령을 갈아치우고 다른 청렴하고 능력 있는 사람을 골라 임명하여 빠른 시일 안에 내려 보냄으로써 힘을 합쳐 농사일을 감독하게 하여 시기를 놓치지 않도록 해주시기를 바라나이다.”

1594년 6월 15일 난중일기다. “이날 밤 소나기가 흡족하게 내리니 이 어찌 하늘이 백성을 가엾게 여긴 것이 아니겠는가.” 1595년 6월 6일 난중일기다. “도양장의 농사 형편을 들으니 흥양 현감이 심력을 다했기에 추수가 잘 될 것이라고 했다.”

이런 가운데도 장군은 피난민 구제 양식인 구휼미(救恤米) 만큼은 꼭 남겨 빈민을 구제했다. 경상도 지역의 경우 직접적으로 왜군의 침략을 당한 지역이기 때문에 군량 확보가 더욱 어려웠다. 경상우수사 원균(元均)은 매년 장군에게 군량을 빌릴 수밖에 없었다.

“경상우수사의 군관 배영수가 그 대장의 명령을 가지고 와서 군량 20섬을 빌려갔다.” (1595년 7월 8일)

1596년 윤 8월 20일 장군은 체찰사 이원익(李元翼), 부제찰사 한효순(韓孝純)과 함께 하루 종일 배를 타고 득량도를 거쳐 보성군 명교마을 백사정으로 향하고 있었다. 득량도(得糧島)는 보성과 고흥 바다 사이로 정찰활동을 위해서 꼭 들렸던 해상전투로였다. 해상전투를 자유롭게 전개하기 위해서는 화살과 화약 이외에도 식량과 물, 땔감이 필요했다. 득량(得糧)이란 장군이 이곳에서 식량을 구하게 되면서 ‘얻을 득(得) 곡식 량(糧)’이라 해서 이름 붙였다.

당시 장군은 고흥 도양 둔전에서 벼 300석을 거두어 들였다. 이곳에서 경영이 원활했던 것은 보성과 고흥 육상의병이 연합작전으로 후방을 사수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목민관(牧民官)으로서 사람과 마소(馬牛)를 위한 목마구민(牧馬救民)의 정신이 놀라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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