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철칼럼] 이순신의 자급자족(自給自足)
[김동철칼럼] 이순신의 자급자족(自給自足)
  • 김동철 주필
  • 승인 2018.10.04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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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철 베이비타임즈 주필·교육학 박사 / ‘환생 이순신, 다시 쓰는 징비록’ 저자
김동철 베이비타임즈 주필·교육학 박사 / ‘환생 이순신, 다시 쓰는 징비록’ 저자

이순신(李舜臣) 장군은 ‘농사꾼’으로서 둔전(屯田)을 일궈 수하 장졸과 피난민의 생계를 보장하는가 하면 해로통행첩(海路通行帖)을 발행해 군자금을 마련했고 염전(鹽田)을 일궈 소금을 생산했다. 또 바다에서 물고기를 잡아 시장에서 내다파는 상거래를 활성화시켰다.

이러한 경제 활동은 그가 사물의 이치를 치열하게 궁리한 끝에,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실용적 사고에서 나온 것이다.

1597년 9월 16일 13대 133이라는 격전의 명량대첩을 끝낸 다음날 난중일기다.

“어외도(於外島)에 이르니 피난선이 무려 300여 척이나 먼저 와 있었다. 우리 수군이 크게 승리한 것을 알고 서로 다투어 치하하며 또 많은 양식을 말(斗)과 섬(斛)으로 가져와 군사들에게 주었다.”

장군은 늘 부족한 군량미를 채울 방책에 고민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장군의 막하에서 군량을 관리하던 이의온(李宜溫)이란 스무살 청년이 꾀주머니를 풀어놓았다. 해로통행첩(海路通行帖)의 발행인데 오늘날 선박운항증이나 마찬가지다. 피난선으로부터 곡물을 받아 군량으로 쓰자는 이 혁신적인 제안은 장군의 평소 생각이 오롯이 담긴 것이었다. 한 청년의 제안으로 군량미가 쏠쏠하게 모아졌다.

류성룡의 징비록이다.

“이순신이 해로통행첩을 만들고 명령하기를 ‘3도(경상, 전라, 충청) 연해를 통행하는 모든 배는 공사선(公私船)을 막론하고 통행첩 없이는 모두 간첩선으로 인정하여 처벌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선박이나 선주의 신원을 조사하여 간첩과 해적행위의 우려가 없는 자에게는 선박의 대소에 따라 큰 배 3섬, 중간 배 2섬, 작은 배 1섬의 곡식을 바치도록 하였다. 이때 피난민들은 모두 재물과 곡식을 배에 싣고 다녔기 때문에 쌀 바치는 것을 어렵게 여기지 않았고, 또한 이순신 수군을 따라다녔기 때문에 아무런 불평 없이 갖다 바쳤으니 10여 일 동안에 무려 군량미 1만여 섬을 얻었다.”

명량해전을 치른 뒤 장군은 왜군의 보복(報復)을 염두에 두고 서해 고군산도까지 올라갔다 내려오는 등 병영 없이 떠돌아다니고 있었다. 한산도 본영을 포함해 전라도 땅끝 마을인 해남과 진도까지 왜군이 쳐들어왔으므로 마땅히 안전하게 정착할 곳을 찾고 있는 중이었다.

그래서 당사도, 어외도, 칠산도, 법성포, 고참도, 고군산도 등 40여 일 동안 서해 바다를 돌아다녔다. 그때 피난선들은 장군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는데 그것은 안전을 보장받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장군은 피난민들의 안전을 보장해주고 생업(둔전 및 염전관리, 고기잡이)을 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주는 대신, 그들로부터 일종의 ‘안전세(安全稅)’를 거둬 군량미로 충당한 것이다. 주고받는 거래로 서로의 편의가 충족되는 승(勝)-승(勝)의 구조로,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윈윈(win-win)의 상생(相生) 시스템 그 자체다.

1597년 10월 29일 장군이 목포 고하도(高下島)에 진을 치고 107일 동안 머물 때 군사수가 급격하게 늘어났다. 하지만 그만큼 춥고 배고픈 군사들 또한 많았다. 이어 1598년 2월 17일 완도 고금도(古今島)로 본영을 옮기자 군사수가 1천여 명에서 무려 8천여 명까지 늘었다. 병선도 13척에서 70여척까지 늘어났다. 고금도에 사람이 많이 몰린 것은 1598년 7월 명나라 제독 진린(陳璘)의 수군 5천명이 이순신 진영 옆에 진을 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징비록 기록이다.

“이순신은 또 백성들이 가지고 있는 구리와 쇠를 모아다 대포를 주조하고 나무를 베어다 배를 만들어서 모든 일이 순조롭게 추진되었다. 이때 병화(兵禍)를 피하려는 사람들이 모두 이순신에게로 와서 의지하여 집을 짓고 막사를 만들고 장사를 하며 살아가니 온 섬이 이를 다 수용할 수가 없었다.”

훗날 성리학자인 윤휴(尹鑴 1617~1680)에 따르면 “섬 안이 시장이 됐다(島中成市).”고 할 정도로 거래가 활성화됐다. 또 신경(申炅 1613~1653)은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에서 “(이순신이) 집을 지어 피난민들에게 팔아 살게 하니, 섬 안에서는 피난민들을 다 수용할 수 없을 정도”라고 번성한 광경을 묘사했다.

또한 이순신의 조카 이분(李芬)이 쓴 ‘이충무공행록’에도 고금도 진영에 대해 “군대의 위세가 강성해져 남도 백성들 중 공(公)에게 의지해 사는 자가 수 만 호에 이르렀고 군대의 장엄함도 한산진보다 열 배나 더했다.”고 기록했다.

장군의 시장경제적 CEO 경영 기질은 이미 검증된 바가 있었다. ‘전시재상’ 류성룡(柳成龍)이 명나라 원군의 군량을 조달하기 위해 평양도 압록강 상류인 중강진에서 국제무역을 제안할 즈음인 1593년, 장군은 이미 섬진강 기슭에서 시장을 열어 재화가 유통되게 했다.

장군은 또 장졸들을 시켜 물고기를 잡거나 바닷가에 염전을 만들어서 소금을 생산했다. 이 또한 시장에 내다팔아서 군량을 조달했다. 왜란 7년 동안 초기 2년(1592~1593년)과 후기 2년(1597~1598년)을 빼면 나머지는 명과 왜의 강화협상기간으로 전쟁이 다소 소강상태였기 때문에 이러한 경제활동이 가능했던 것 같다.

“송한련이 와서 말하기를 ‘고기를 잡아 군량을 산다’고 했다.” (1595년 2월 19일)

“오수가 청어 1310두름을, 박춘양은 787두름을 바쳤는데 하천수가 받아다가 말리기로 했다. 황득중은 202두름을 바쳤다. 종일 비가 내렸다. 사도첨사가 술을 가지고 와서 군량 500여섬을 마련해 놓았다고 했다.” (1596년 1월 6일)

“고기를 잡아서 군량을 계속 지원하는 임달영, 송한련, 송한, 송성, 이종호, 황득중, 오수, 박춘양, 유세중, 강소작지, 강구지 등에게 모두 포상하였다.” (1596년 2월 26일)

“김종려를 소음도 등 13개 섬의 염전에 감자도감검(監煮都監檢, 감독관)으로 정하여 보냈다.” (1597년 10월 20일)

당시 조선의 상황을 좀 더 살펴보자. 조선은 병화(兵禍)와 더불어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가뭄에 따른 흉년으로 극심한 기아가 발생했고 전염병마저 나돌아 황폐화됐다. 1593년 봄부터 아사자(餓死者)가 속출했다.

명나라 장군 사대수(査大受)는 길가에서 죽은 어미의 젖을 빨고 있던 어린아이를 보고 “하늘도 근심하고 땅도 슬퍼할 것이다”라며 탄식했다. 장군도 예외는 아니었다. 장군은 1594년 3월 6일부터 27일까지 거의 20일 동안 전염병에 감염된 증상을 보였다. 난중일기에는 종일 신음했고 땀이 비 오듯 쏟아져 자다가 옷을 갈아입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7년 동안 지속된 전쟁으로 인구와 토지가 급격하게 줄었다. 조선은 더 이상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의 나라가 아니었다. 농지가 사막화된 것은 물론이고 농사지을 사람마저 구하기 힘들었다. 전란에 끌려가 죽고 그나마 살아남은 장정과 아낙들은 노예로 끌려갔다. 온 나라가 콩가루가 된 것이다.

당시 전체 인구 400여만 명에서 전사, 살육, 실종, 노예 강제이주 등으로 150여만 명으로 격감하였다. 그리고 왜란 전 150만 결의 농지는 30만 결로 줄어들었다. 당연히 백성들은 굶주림에 아사(餓死)자가 속출했고 급기야 가족끼리 잡아먹거나 길거리에 죽어나자빠진 타인의 인육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길거리엔 하얀 해골이 조그만 산을 이루거나 나뒹굴었고 썩은 말의 시체 또한 역병(疫病)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중세 유럽에서 흑사병(黑死病, 페스트)으로 수천만 명의 사람들이 검게 타서 죽어갔듯이 조선에서도 전란 후 전염병으로 전국토가 유린됐다.

특히 곳곳에서는 어린 아이를 잃어버린 가족들이 속출했고 길거리에 갓 죽어 쓰러진 시체들은 남아나질 않았다. 솥에 물만 끓이고 있어도 놀라 도망가는 처지였다. 전쟁은 아비규환(阿鼻叫喚)과 아수라장(阿修羅場)을 만들어냈다.

 

<김동철 주필 약력> 
- 교육학 박사
- 이순신 인성리더십 포럼 대표
- 성결대 교양학부 교수
- 이순신리더십국제센터 운영자문위원장, 석좌교수
- (사)대한민국 해군협회 연구위원
- 전 중앙일보 기자, 전 월간중앙 기획위원
- 저서 : ‘환생 이순신, 다시 쓰는 징비록’ ‘우리가 꼭 한번 만나야 하는 이순신’ ‘국민멘토 이순신 유적답사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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