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철칼럼] 이순신의 용인술
[김동철칼럼] 이순신의 용인술
  • 김동철 주필
  • 승인 2018.07.30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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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철 베이비타임즈 주필·교육학 박사 / ‘환생 이순신, 다시 쓰는 징비록’ 저자
김동철 베이비타임즈 주필·교육학 박사 / ‘환생 이순신, 다시 쓰는 징비록’ 저자

낭중지추(囊中之錐), 현사(賢士)가 세상에 처함에는 송곳이 주머니 속에 있는 것과 같아 곧 그 인격이 널리 알려지게 된다는 뜻이다. 이런 인재를 알아보는 상관들의 입현무방(立賢無方)과 지인지감(知人之鑑)으로 이순신의 인맥은 자연스럽게 만들어졌다.

이순신은 끊임없이 사람들과 소통을 위해서 글을 썼다. 선조와 조정에 올리는 공문서인 장계(狀啓)와 사적인 편지인 서간(書簡)과 7년 기록 난중일기가 그것이다.

그의 글에는 충효우제(忠孝友悌)의 정신이 있었다. 곧 나라가 위태로우면 나아가 싸우고, 늙으신 부모님에게 효를 행하고 어려움을 당한 친구에게 따뜻함을 보이며 선배의 옳은 일을 믿고 따르는 마음이 고스란히 배어있었다.

‘글은 곧 사람’이므로 그의 글을 받은 사람들은 글속에 담긴 이순신의 오롯한 마음을 읽어나갔다.

많은 교류 가운데 서애(西厓) 류성룡과의 만남은 장군의 삶에 굵은 획을 긋는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류성룡 대감은 한양 건천동(마른내골)에서 이순신과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동네형’이었다. 3살 많은 류성룡은 이순신의 둘째 형 요신(堯臣)의 친구로 서로 집안사정을 잘 알고 지냈다.

이순신의 아버지는 과거에 나아가지 않고 칩거해 사는 은둔군자였다. 아버지 이정(李貞)은 가난 때문인지 장군이 십대 초반 때 처가가 있는 충남 아산으로 이사를 갔다. ‘동네형’ 류성룡은 이순신이 32세의 나이에 무과에 급제해 함경도 변방으로만 떠도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는 원리원칙을 지키는 깐깐한 성품 탓에 늘 상관으로부터 미운털이 박히는 이순신의 정의감과 기개를 높이 샀다.

“이순신은 어린 시절 영특하고 활달했다. 다른 아이들과 모여 놀 때면 나무를 깎아 화살을 만들어 동리에서 전쟁놀이를 했다. 마음에 거슬리는 사람이 있으면 그 눈을 쏘려고 해 어른들도 그를 꺼려 감히 군문 앞을 지나려고 하지 않았다. 자라면서 활을 잘 쏘았으며 무과에 급제해 관직에 나아가려고 했다. 말 타고 활쏘기를 잘 했으며 글씨를 잘 썼다.”

징비록의 한 구절이다. 어린 시절 장군에 대한 남다른 감회를 느꼈던 류성룡은 한평생 그 뒤를 돌봐준 ‘인생의 멘토’가 되었다.

1587년 조산보 만호(종4품) 겸 녹둔도 둔전관으로 여진족 침입을 막지 못했다는 누명으로 백의종군을 하게 된 이순신은 1588년 1월 시전부락 전투에 참가해 공을 세워 사면되었다. 그리고 아산 집으로 내려가 쉬고 있었다.

마침 1589년 당시 왜란의 조짐이 보이던 터라 선조는 1월 21일 전국 장수들 가운데 그 계급에 구애받지 말고 유능한 인재를 천거하라는 ‘무신불차탁용(武臣不次擢用)’의 명을 내렸다.

류성룡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해 12월 이순신을 정읍현감(종6품)으로 추천했다. 이어 1591년 2월 정3품의 전라좌도수군절도사로 임명케 했다. 무려 7단계나 뛰어오르는 관직이라 반대가 많았지만 류성룡은 그의 예사롭지 않은 능력을 굳게 믿었다. 오직 현명함과 유능함으로 인재를 등용하는 입현무방(立賢無方)의 공정성과 개방성에 따른 것이다. 그 혜안은 참으로 놀랍고도 옳은 천거였다.

임진왜란 때 육지에 류성룡이 있었다면 바다에서는 이순신이 있었다. 영의정 겸 도체찰사인 류성룡은 임진란 7년 동안 ‘군량보급관’으로서 명나라 대군(총 5만여 명)과 조선군의 군량을 담당하느라 피눈물을 흘리며 동분서주했던 인물이다.

그는 백성이 근본이라는 ‘민유방본(民惟邦本)’의 경세가(經世家)였고 이순신은 백성을 하늘처럼 받든다는 ‘이민위천(以民爲天)’의 철학을 가진 안보전문가였다. 이 두 사람은 능히 나라를 다시 만들 수 있는 재조산하(再造山河)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1598년 11월 19일 장군이 노량해전에서 전사를 했고 공교롭게도 바로 그날 선조는 류성룡을 파직했다. 북인(北人) 행동대장 이이첨(李爾瞻)의 탄핵상소에 따른 것인데, 남인(南人) 류성룡이 왜(倭)와 화의를 해서 나라를 망치고 있다는 주화오국(主和誤國)의 죄를 청했기 때문이었다.

토사구팽(兎死狗烹)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토끼 사냥을 마친 개를 가마솥에 넣어 삶아먹으려는 못된 주인을 만난 것이다.

판중추부사 정탁(鄭琢 1526~1605)은 장군의 목숨을 구해준 생명의 은인(恩人)이었다.

정유재란이 일어난 1597년 2월 26일 선조는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에서 삭탈관직하고 한성으로 압송하라 명한다. 3월 4일 의금부에 투옥된 뒤 4월 1일 특사로 풀려날 때까지 고문을 당한다.

죄명은 조정을 속이고 임금을 무시한 죄(欺罔朝廷 기망조정 無君之罪 무군지죄), 적을 치지 않고 놓아주어 나라를 저버린 죄(從賊不討 종적불토 負國之罪 부국지죄), 남의 공을 가로채고 무함하여 죄에 빠뜨려 한없이 방자하고 거리낌 없는 죄(奪人之功 탈인지공, 陷人於罪 함인어죄, 無非縱恣無忌憚之罪 무비종자무기탄지죄) 등 세 가지였다. 이것은 사형선고였다.

이때 판중추부사 정탁은 구명탄원서인 신구차(伸救箚)를 선조에게 올려 이순신의 목숨만은 끊지 말아줄 것을 간청했다.

“이순신은 공이 많은 장수입니다. 전시에 그를 죽인다면 앞으로 나라의 안위는 아무도 보장할 수 없습니다.”

또 삼도체찰사인 이원익(李元翼)과 비록 당색은 달랐지만 서인(西人) 이항복(李恒福)도 이순신의 공이 크므로 죽여서는 안 된다고 적극 변호했다. 겨우 선조의 마음을 움직여 장군은 구사일생, 망가진 몸을 이끌고 백의종군 천리길에 나섰다.

우의정 정언신(鄭彦信)을 빼놓을 수 없다. 1583년 경기관찰사였던 정언신은 함경도에서 여진족 니탕개(尼湯介)의 난이 일어나자 도순찰사로 파견되어 여진족을 격퇴했다. 그때 그 휘하에서 이순신(李舜臣), 신립(申砬), 김시민(金時敏), 이억기(李億祺) 등 유능한 무인들이 활약했다.

1586년 1월 이순신이 조산보만호로 부임했을 때 함경도 관찰사였던 정언신은 그 이듬해 이순신을 녹둔도 둔전관에 겸하도록 조정에 천거했다. 훗날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장군이 남해안 곳곳에서 둔전(屯田)을 경영, 군졸과 피난민의 양식을 스스로 해결한 것은 이때 경험을 통해서 얻은 노하우의 발현이었다.

그리고 1589년 비변사의 무신불차채용이 있을 때 병조판서 정언신은 이순신을 적극 추천했다. 당시 10명의 대신이 37명의 무관을 추천했는데 이순신은 정언신과 우의정 이산해(李山海)에 의해 추천됐다.

그런 정언신이 1589년 정여립(鄭汝立)의 난이 일어났고 그 죄를 묻는 기축옥사의 위관(委官)이 되었다. 그때 서인 정철(鄭澈)이 정언신은 정여립과 9촌간의 친척이고 반란에 연루되었다는 헛된(?) 주장을 폈다. 그래서 의금부 감옥에 갇혔다. 이순신은 한성으로 올라와 투옥된 정언신을 면회했다. 자신의 목숨을 걸고 입은 은혜를 갚고자 하는 의리를 보인 것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한 해 전 1591년 장군이 전라좌수사에 부임했을 때 77세의 무관 대선배인 정걸(丁傑)에게 참모장인 조방장(助防將)을 맡아달라고 부탁했다. 경상우수사, 전라병마사, 전라우수사 등을 역임한 백전노장의 노하우를 활용하려는 심산이었다.

이에 정걸은 흔쾌히 응했다. 정걸은 조선수군의 주력 군함인 판옥선(板屋船)을 만든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다. 1510년(중종5) 삼포왜변, 1544년(중종 39) 사량진왜변, 1555년(명종 10) 을묘왜변 등에서 조선수군은 조세를 운반하는 조운선인 맹선(猛船)을 운용했는데 군선으로서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판옥선은 소나무 재질에 바닥이 넓은 평저선(平底船)으로 각종 총통을 탑재해 쏘아도 끄떡없었다. 나이를 불문하고 실력이 있으면 채용하는 장군의 창의실용정신이 빛나는 대목이다.

1591년 2월 13일 전라좌수사로 부임한 장군은 유비무환의 일환으로 먼저 거북선을 창제했다. 그리고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하루 전까지 총통 발사시험을 했다.

1592년 3월 27일

“일찍 아침을 먹은 뒤 배를 타고 소포로 갔다. 쇠사슬을 건너 매는 것을 감독하고 종일 기둥나무 세우는 것을 보았다. 겸하여 거북선에서 대포 쏘는 것도 시험했다.”

1592년 4월 12일

“식후에 배를 타고 거북선의 지자포(地字砲)와 현자포(玄字砲)를 쏘았다. 순찰사(이광)의 군관 남한이 살펴보고 갔다.”

이 거북선은 군관 나대용(羅大用)이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냈다. 또 피나는 노력 끝에 정철총통(正鐵銃筒)을 만들어낸 훈련주부 정사준(鄭思竣)도 있었다.

1592년 임진왜란 초기 조선 육군은 일본군의 화승총인 조총(鳥銃) 앞에 맥없이 무너졌다. 장군은 정사준과 대장장이, 노비들에게 1583년 니탕개 난 때 큰 공을 세운 승자총통(勝字銃筒)을 보완해 새로운 정철총통을 만들게 했다.

전시에 각종 총통을 수도 없이 쏘아야하는 상황이어서 화약은 늘 부족했다. 장군은 자급자족을 해야 했다. 염초, 목탄, 유황을 구하는데 열과 성을 다 했다.

훈련 주부인 군관 이봉수(李鳳壽)는 지붕 처마 밑이나 화장실 주변의 흙 등 맵거나 짜거나 쓴 토양에서 질소와 알카리 성분을 채취해서 물에 녹인 후 끓이면 염초, 즉 질산칼륨(KNO3)이 생긴다는 것을 알아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해내는 무중생유(無中生有)의 정신은 곧 창의실용정신이다. 게다가 휘하 군관과 대장장이, 노비들까지 믿고 응원해주는 리더십에 감동한다.

철저한 실용주의자였던 장군의 용인술은 의인물용 용인물의(疑人勿用 用人勿疑), 즉 “의심스러운 사람은 쓰지 말고, 일단 썼으면 의심하지 마라.”는 철학이었다. 송나라 사필(謝泌)의 말인데 청나라 강희제와 삼성의 고 이병철 회장, 중국 시진핑 주석이 믿고 있는 용인술이기도 하다.

 

<김동철 주필 약력> 
- 교육학 박사
- 이순신 인성리더십 포럼 대표
- 성결대 교양학부 교수
- 이순신리더십국제센터 운영자문위원장, 석좌교수
- (사)대한민국 해군협회 연구위원
- 전 중앙일보 기자, 전 월간중앙 기획위원
- 저서 : ‘환생 이순신, 다시 쓰는 징비록’ ‘우리가 꼭 한번 만나야 하는 이순신’ ‘국민멘토 이순신 유적답사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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