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철칼럼] 노예전쟁
[김동철칼럼] 노예전쟁
  • 김동철 주필
  • 승인 2018.07.16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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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철 베이비타임즈 주필·교육학 박사 / ‘환생 이순신, 다시 쓰는 징비록’ 저자
김동철 베이비타임즈 주필·교육학 박사 / ‘환생 이순신, 다시 쓰는 징비록’ 저자

임진왜란은 1592년 음력 4월 13일 왜군의 부산포 기습상륙으로부터 1598년 11월 왜군이 울산왜성(가토 기요마사가 쌓은 왜성)과 순천왜성(고니시 유키나가의 왜병 주둔지)에서 철군할 때까지의 7년 전쟁을 말한다.

임진왜란의 역사적 의미는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역사상 유례없는 노예전쟁이라고 말하는데 이의를 달 사람은 없을 것이다. 즉 임진왜란은 왜군의 영토 확장의 성격을 띠기보다는 인적 수탈에 더 많은 무게를 둔 전쟁이었다. 그들의 군사편제와 전략을 살펴보면 이러한 사실은 더욱 분명해진다.

일본은 조선 침공 전에 이미 군사편제를 전투부대와 특수부대로 이원화하여 효율적으로 전쟁을 수행했다. 3개의 편대로 나누어진 전투부대는 속전속결로 북진하여 점령지를 확대했고, 특수부대는 후방에서 전투 병력과는 별도의 임무를 수행했다.

도서부, 금속부, 공예부, 포로부, 보물부, 축부으로 짜여진 6개 특수부대는 조선의 인적, 물적 자원을 약탈하여 일본으로 수송하는 것이 주된 임무였다. 도서부는 조선의 서적을, 공예부는 자기류를 비롯한 각종의 공예품을, 포로부는 조선의 학자, 관리 및 목공, 직공, 토공 등의 장인(匠人)과 노동력을 가진 젊은 남녀의 납치를, 금속부는 조선의 병기와 금속활자를, 보물부는 금은보화와 진기한 물품들을, 축부는 조선의 가축을 포획하는 일을 수행했다.

이중 노예전쟁의 희생양이 된 조선인 포로들의 실상에 대해서 알아본다.

피로인(被虜人)은 일본으로 끌려간 노예를 말한다. 노예로 끌려간 조선인은 약 10만여 명으로 추산되는데 규슈 남단 가고시마(鹿兒島)에 상륙한 노예만 해도 3만700여 명으로 기록된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참전한 일본 규슈 안요지(安養寺) 주지 교낸(慶念)이 쓴 종군 일기 ‘조선일일기(朝鮮日日記)’에는 당시의 참상이 적나라하게 담겨져 있다. 종군승 교낸은 당시 일본사람들에게 적국(赤國)이라 불리던 전라도에 속한 진주와 하동, 전주 그리고 경상도 울산, 부산포 등 지역을 주로 다녔다.

‘11월 19일 울산에는 일본에서 건너온 노예상인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본진의 뒤를 따라 다니면서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돈을 주고 사서 줄로 목을 묶어 오리처럼 몰고 앞으로 가는데 잘 걷지 못하면 몽둥이로 패면서 몰아세우거나 뛰게 하였다.’

왜군들이 약탈, 살육, 방화하고 있는 마을에 온 일본 노예상인들은 왜장(倭將)에게 돈을 주고 조선인을 사냥하여 노예로 끌고 가는 인신매매꾼들이었다. 규슈 나고야조(名護屋城)로 가는 길목에 있는 부산포는 노예사냥꾼과 조선인 노예들이 득실거리는 노예시장이 연일 벌어졌다.

일본인 승려 교낸은 최소한 종교적 양심을 가진 자로서 조선의 참상을 애석하게 바라봤다.

‘지옥의 아방(阿防)이 사자(死者) 죄인을 다루는 것 같구나! 낮에 길에서 돌아다니는 젊은 조선남자는 무사들에게 붙잡혀서 개처럼 목에 줄을 매어 노예상인에게 팔려갔다. 이들 노예들은 다시 원숭이처럼 목에 줄을 연이어 매어 줄 끝을 말이나 소달구지 뒤에 연결하고 뒤따라가게 하였다. 이때 노예는 무거운 짐을 지거나 이고 소달구지에는 봉래산(蓬萊山)과 같이 짐을 가득 실었다.’

건장한 젊은 장정들과 아리따운 여인네들은 노예시장에서 몸값이 더 올랐는데 일본뿐만 아니라 멀리는 유럽까지 팔려나갔다. 특히 일본 규슈에서 온 왜장과 상인들이 이 노예장사 돈벌이에 열중하였는데 진중의 왜장은 40냥을 받고 포로로 잡은 조선 남녀를 일본 상인에게 매매하였고 미녀는 30냥을 더 받았다고 한다.

정유재란 때 왜군과 일본 노예상인에 의해서 일본에 붙잡혀간 피로인은 거의 다 하삼도(경상, 충청, 전라도) 사람들로서 왜란 초기인 임진왜란 때의 10배가 되었다. 이들은 일본 농민 대신에 농사를 짓거나 동남아시아 노예로 팔려갔다. 이때 조선 노예들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에서 대부분 사갔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일본에 서양제 화승총(火繩銃)을 전해준 대가로 노예를 독점하다시피 했다. 이 노예들은 유럽전역으로 대부분 수도원농장으로 팔려갔다.

조선인 노예는 일인당 2.4scudo(스쿠도, 포르투갈 화폐단위로 쌀 두 가마 해당)로서 포르투갈령 마카오에서 다시 유럽으로 가서 전 세계로 팔려 나갔다. 심지어 이탈리아 피렌체까지 간 노예도 있었다. 이즈음 이탈리아 피렌체 출신 카를레티 신부는 일본 여행 중 단돈 1 스쿠디에 조선인 노예 5명을 샀다. 인도 고아로 데리고 갔다가 4명은 그곳에서 풀어주고 한 명만 피렌체로 데리고 갔다. 그 이름이 안토니오 코레아(Antonio Corea)다.

화가 루벤스는 이 낯선 동양인을 그려 ‘한복을 입은 남자’라고 이름 지었다. 이 작품은 1997년 미국 석유재벌 폴게티가 127억원에 사들여 LA 폴게티 박물관에 전시했다. 한 조선인 남자는 본의 아니게 전쟁이란 격랑(激浪)에 휘말려 지구 저편까지 실려 갔다. 그리고 다시 그림 속 남자로 이국(異國) 박물관에 박제(剝製)되어 나타난 것이다.

이 당시 아프리카 흑인노예가 1인당 170scudo인 것에 비하면 조선인 노예 값은 터무니없는 가격으로 당시 국제 노예 값의 폭락을 가져왔다. 그 수는 6만으로 보고 있으며 덤핑 투매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포르투갈 신부 루이스 프로이스(Luis Frois)의 ‘일본사(日本史)’에 나오는 한국 여인의 언급 부분이다.

‘요새(要塞)에는 대략 300여개의 방이 있다. 일본 병사들로부터 겁탈을 피하기 위해 귀족 여인들 중 몇몇은 주전자와 냄비 밑에 붙어있는 숯검정으로 얼굴에 먹칠을 해서 자신들의 아름다움을 감추었다. 또 일부는 그들이 포위당했을 때 높은 하늘을 향해 고통스럽게 울부짖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귀족들의 자녀들은 모친의 교육에 따라 절름발이 행세를 하거나 입이 돌아간 척 했는데 마치 불구자인양 위장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조선 여인들은 남장(男裝)을 하거나 노파(老婆)로 위장하여 자신들의 정절(貞節)과 자식을 보호하기 위한 눈물겨운 사실도 기록해놓았다.

왜군에게 잡혀 일본에서 포로 생활을 하다가 가까스로 돌아온 수은(睡隱) 강항(姜沆 1567~1618)은 간양록(看羊錄)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그곳(전남)에는 전선 6~7백 척이 수리에 걸쳐 가득 차있었고 그 배에는 조선 남녀와 왜병이 반반씩 있었다. 배마다 조선 포로들의 통곡과 절규의 소리는 바다와 산을 진동시켰다.”

잡혀간 남녀 포로는 주로 규슈 지방을 중심으로 하여 일본 전역에 분산시켰는데 이 중 학자나 공예가들은 관작과 녹봉, 토지를 주어 대우했다. 공예 중에서도 일본에 큰 영향을 준 것은 도자기 제작 기술이다. 당시 다도(茶道)를 숭상했던 일본은 다기(茶器)의 대부분을 중국과 조선으로부터 수입했기 때문에 이를 보완하기 위해 포로로 잡은 도공(陶工)들로 하여금 자기를 제작하도록 했다.

또 남해안의 일본왜성을 축조할 때 조선인을 포로로 수용하여 동원한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웅천왜성 축성에 동원된 조선인들 가운데 남녀 120명은 나중에 일본으로 강제로 끌려갔다. 이들은 일본 히라도죠(平戶城)의 코오라이마찌(高麗町)에 모여 살게 되었다. 일본인들은 이 코오라이마찌를 도오진죠(唐人町)라고 했다. 당인(唐人)은 조선인을 말하며 조선인을 비하하는 ‘마록야랑(馬鹿野郞)’은 말과 사슴도 구별 못하는 ‘멍청한 놈’, ‘바보자식’이란 의미를 가진다.

일본으로 잡혀간 조선 포로들은 크게 세 가지 형태의 삶을 살았다. 첫째 일본에 남아 영구히 거주한 경우다. 이는 일본인의 방해로 조선으로의 송환의 기회를 얻지 못했거나 일본인과 결혼하여 자식을 낳고 살게 되었던 경우로서 대부분의 포로들은 이에 해당했다.

둘째, 왜군 장수와 상인이 결탁하여 조선인을 포로로 잡아 노예로 팔아버린 경우다. 일본상인들은 조선인 포로들을 포르투갈 노예상인들에게 팔아 넘겼다. 이들은 처음부터 노예사냥을 목적으로 조선에 출정해서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사로잡아 나가사키(長崎)로 끌고 간 뒤 포르투갈 상인과 총, 비단 등으로 교환했다.

당시 조선인 납치 매매실상이 어떠했는지는, 일본과 마카오 관할 천주교 교구의 주재 신부였던 루이스 세르꾸에이라(Luis Cerqueira)가 1598년 9월 4일에 쓴 글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배가 들어오는 항구인 나가사키에 인접한 곳의 많은 일본인들은 포로 장사인 포르투갈 사람들의 의도에 따라 조선 사람들을 사려고 일본 여러 지역으로 돌아다녔을 뿐만 아니라, 조선인이 이미 잡혀 있는 지역에서 그들을 구매하는 한편 조선인들을 포획하기 위하여 조선으로 갔다. 그리고 일본인들은 포획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을 잔인하게 죽였고, 중국배에서 이들을 포르투갈 상인들에게 팔았다.’

셋째, 포로 송환의 임무를 맡은 관리였던 포로 쇄환사(刷還使)들을 통하거나 탈출을 감행하여 조선으로 귀환하게 된 경우이다. 이들 가운데는 여러 번 탈출을 시도하다 실패하여 목숨을 잃은 경우도 있었으며, 상소를 써서 일본의 정세를 본국에 알리려고 남다른 노력을 기울인 이들도 있었다. ‘간양록(看羊錄)’을 남긴 강항(姜沆)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강항은 조선의 관리이자 독서를 즐기며 글과 그림에 능한 조선의 선비로서 후지와라(藤原惺窩)와 아카마쓰(赤松廣通 斎村政広) 등과 교유하면서 그들에게 주자학을 전파했다. 포로가 된 그의 신세는 ‘외로운 양치기(看羊)’와 다를 바 없었다.

강항의 간양록은 역사드라마 작가 신봉승 선생이 작사를 했고 가왕(歌王) 조용필이 노래를 불러 다시 살아났다.

  이국땅 삼경이면 밤마다 찬서리고
  어버이 한숨 쉬는 새벽달 일세
  마음은 바람 따라 고향으로 가는데
  선영 뒷산의 잡초는 누가 뜯으리
  어야어야어야 어야 어~~야
  어야어야어야 어야어야
  피눈물로 한 줄 한 줄 간양록을 적으니
  님 그린 뜻 바다 되어 하늘에 달을 세라
  어야어야어야 어야 어~~야

 

<김동철 주필 약력> 
- 교육학 박사
- 이순신 인성리더십 포럼 대표
- 성결대 교양학부 교수
- 이순신리더십국제센터 운영자문위원장, 석좌교수
- (사)대한민국 해군협회 연구위원
- 전 중앙일보 기자, 전 월간중앙 기획위원
- 저서 : ‘환생 이순신, 다시 쓰는 징비록’ ‘우리가 꼭 한번 만나야 하는 이순신’ ‘국민멘토 이순신 유적답사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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