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철칼럼] 종교전쟁
[김동철칼럼] 종교전쟁
  • 김동철 주필
  • 승인 2018.07.03 1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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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철 베이비타임즈 주필·교육학 박사 / ‘환생 이순신, 다시 쓰는 징비록’ 저자
김동철 베이비타임즈 주필·교육학 박사 / ‘환생 이순신, 다시 쓰는 징비록’ 저자

1592년 4월 13일 왜군 선봉장 고시니 유키나가는 흰 비단에 붉은색 십자가가 그려진 깃발을 앞세운 채 1만8,000명의 병사를 이끌고 부산포에 기습 상륙했다. 그것은 영락없는 중세의 십자군이었다.

십자가 깃발을 앞세우고 전쟁에 나가는 것은 템플기사단이나 프리메이슨들이 흔히 이용했던 전형적인 종교우월의 과시전략이었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그 깃발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아무도 몰랐다.

일본의 제1군 대장이었던 고니시 유키나가는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다. 1584년에 영세를 받은 고니시는 세례명이 아우구스티노이다. 그의 집안도 모두 천주교로 개종했다. 아버지의 세례명은 요나단, 어머니는 막달라, 대마도(對馬島) 성주 소 요시토시(宗義智)의 부인인 딸은 마리아였다.

일본 최고의 지배자였던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는 1543년 일본 큐슈(九州)에 상륙한 예수회(Jesuite) 신부 프란시스 사비에르(Francis Xavier)의 전도를 받고 천주교를 허용했다. 사비에르는 가고시마에서 전도활동을 펼쳤다.

그는 일본에 오기 전에 이그나티우스 로욜라 교황을 알현하고 교황청을 중심으로 세계 종교를 통합해야한다는 의견을 전달했고 승인을 받았다. 마침 마틴 루터 등의 종교개혁으로 새로 생긴 프로테스탄트 개신교는 구태하고 부패한 천주교의 최대 경쟁적 관계로 떠올랐다.

천주교 가톨릭 예수회는 일본을 지명하고 개신교보다 먼저 선점(先占)전략을 펼치기 시작했다. 1543년 천주교 예수회 신부들이 탄 포르투갈의 선박은 일본으로 향했다. 예수회 창립 멤버 6인중 한 명인 프란시스 사비에르 신부는 일본 막부의 정치인, 군인, 상인들과 친분을 쌓았다. 그리고 포르투갈 상인을 통해 일본에 첨단무기인 조총(鳥銃)을 전수했다.

오다 노부나가는 조총부대를 앞세워 일본통일을 꾀했다. 임진왜란이 끝난 1600년 일본 인구 2천500만명 중 60여만 명이 천주교신자가 되었다. 조선을 침략한 20여만의 왜군 가운데 상당수가 가톨릭신자이었다.

임진왜란 배후에 천주교 예수회가 있다는 가설을 증명하는 자료도 하나둘씩 나오고 있다. 천주교가 포교에 열을 올린 것은 캘빈, 루터 등이 종교개혁을 일으키자 불안한 나머지 서둘렀다는 배경 아래서이다.

선교사들은 비단 종교 활동만 한 것이 아니었다.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상황에서 서양문물을 일본에 전해주는 역할을 했다. 세스페데스(Cespedes) 신부는 조선에 발을 들여놓기 전에 이미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와 몇몇 장수들에게 조선침략에 대한 조언을 바쳤다.

오다 노부나가의 후계자로 일본을 통일한 히데요시는 예수회 신부들을 만나 “명과 조선을 정복하여 전역에 교회당을 세우고 그들 백성들을 천주교인으로 만들겠다.”고 호언장담하면서 1592년 임진왜란을 일으켰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침공 때 천주교 신자인 고니시 유키나가를 제1선봉장으로 앞세운 것도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실제로 고니시 유키나가의 군대에 종군한 세스페데스 신부는 1592년 12월 27일 남해안 웅천 왜성(倭城)으로 들어옴으로써 조선 땅을 처음으로 밟은 서양인 사제(司祭)가 되었다. 그는 조선에 전도를 시도하였으나 실패했다.

그러나 포로로 끌려간 조선인들 가운데에는 천주교에 귀의한 자들이 다수 있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 이후 1611년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천주교 박해 때에는 21명의 조선인 천주교 신자가 순교했다.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 외에 제3군 대장 구로다 나가마사, 고지마 쥰겐, 야마쿠사 다네모토, 소 요시토시 등이 모두 일본의 기리시단(吉利支丹 Christian)으로 잘 알려진 장수들이다. 기리시단 부대는 십자가 군기(軍旗)를 앞세우고 조총으로 무장해 선봉에 섰다.

고니시 유키나가가 1592년 4월 13일 십자가 깃발을 휘날리며 부산에 들어온 장면을 류성룡(柳成龍)은 징비록에서 ‘왜선이 대마도에서 우리 바다로 오며 바다를 뒤덮듯 했다. 그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고 서술했다.

개신교 선교사 귀츨라프의 항해기에서 “임진왜란 당시의 왜 장군들은 전부 그리고 사병들도 대부분이 천주교인이었다.”라고 썼다. 대영백과사전의 일본인 역사편에서 블린클리는 ‘부산에 상륙한 25만의 왜군 중 최소한 10% 이상이 천주교인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예수회가 교황을 위해 충성을 다하는 조직이라는 사실을 안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임진왜란이 끝난 후 1600년 일본 내에서 천주교인들을 씨를 말리기 시작했다. 이로써 260년간 계속된 기리시단의 박해로 천주교인 영주와 신자들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에도 막부시기에 조직적 학살로 이어져 박해가 끝난 19세기에는 2만 명으로 크게 줄었다.

예수회 루이스 프로이스(Luis Frois)는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만나며 30여년을 왜에서 체험하거나 전해들은 사실을 기록한 일본사(日本史)에서 조선을 ‘이교도(異敎徒)’라고 기술했다. 그리고 ‘고니시는 성모(聖母)를 위해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영웅’, ‘도요토미는 하느님이 쓰시는 칼’, ‘임진왜란을 하느님의 성전(聖戰)’이라고 적었다.

그는 또 일본사(日本史)에서 “히데요시는 인물됨이 하찮았지만 신부들은 ‘하나님의 칼과 채찍’이라 꼬드겨 그들의 목적을 위해 이용했다. 왜란 때 제1군 선봉장 고니시는 세례를 받고 예수회를 광신하는 자였던 바 히데요시가 임진왜란 때 고니시를 제1군 선봉장으로 신임한 것은 예수회이기 때문이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예수회의 조선 진출 야욕과 맞물려 임진왜란이 일어났다는 추정이 가능한 대목이다.

루이스는 다음과 같이 일본사를 맺는다.

“이리하여 7년에 걸친 조선전쟁에 마침내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이 전쟁은 우리(왜인) 천주교도들의 커다란 노고와 비용 지출 위에 지속되어 왔던 것으로 천주교도 영주들에게는 자신의 영지를 안전하게 지켜낼 수 있다는 유리한 측면도 있다. (중략) 하느님은 진실로 선하신 분이므로 성스러운 주님의 영광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적들로부터 얻을 수 있는 거대한 승리에 관한 가장 기쁜 소식을 이제 머지않아 접하게 될 것으로 믿는다. 1598년 10월 3일 나가사키에서. 성스러운 주 하느님의 심부름꾼이.”

가톨릭 예수회의 열렬한 신자였던 고니시와 쌍벽을 이루며 불구대천의 앙숙처럼 지냈던 가토 기요마사는 불교신자였다. 가토는 일연종(日蓮宗) 즉 법화종(法華宗)의 신도였다. 제1 선봉대인 고니시의 군대가 십자가를 내세웠다면 제2군 가토의 군사들은 남묘호렝게교(南無妙法蓮花經 남무묘법연화경)라는 깃발을 앞세웠다. 이처럼 두 사람은 서로 믿는 종교가 다른 이교(異敎)의 사상으로 사사건건 배척하고 반목질시하면서 경쟁했다.

임진왜란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견원지간(犬猿之間)의 두 장수의 경쟁적 야심을 잘 이용해 조선 한양 선점(先占)과 선조의 포획을 부채질했다.

제3군 수장인 구로다 나가마사 역시 천주교 신자였다. 그는 조선 땅에서 5천500개의 코를 베었다. 초창기에는 칼로 벤 머리(首級)를 챙기기에 급급했으나 정유재란 때 히데요시의 명령에 의해 수급 대신 코와 귀 베기가 자행되었다. 왜군 1명당 코 한 되씩의 책임량을 할당받자 산 자와 죽은 자,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귀와 코를 베어 소금에 절여 일본으로 보냈다. 심지어 산모와 갓난아기의 코까지 베었다.

징비록의 기록이다. “이 때에 적이 3도를 짓밟아 지나가는 곳마다 여사(廬舍)를 모두 불태우고 백성을 살육하였으니 무릇 조선사람을 보기만 하면 모조리 코를 베어서 공(功)으로 삼고 겸하여 시위하였다.”

‘왜(倭) 십자군’은 조선에서 야만적 죄악을 저질렀다. 진주성이 함락되자 남은 군관민 6만 명의 코와 귀를 벤 다음 창고에 넣어 불태워 죽였다.

1614년(광해군6) 이수광이 펴낸 최초의 백과사전인 지봉유설(芝峯類說)에는 “조선시골 장날 장터에는 왜병들이 산 사람의 코를 잘랐기 때문에 흰 천으로 얼굴을 가린 코 없는 사람이 많았다.”고 기술하고 있다.

다음은 종군승려 교낸(慶念)의 조선일일기(朝鮮日日記)다.

“역사상 이처럼 참혹한 전쟁이 없었다. 약탈과 살육 후 이들은 집에 불을 지르니 검붉게 타오르는 불꽃과 검은 연기가 하늘을 뒤덮고 조선사람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온 마을을 뒤덮었다. 산 사람, 죽은 사람, 어린아이 노인, 여자 할 것 없이 닥치는 대로 귀를 자르고 코를 베니 길바닥은 온통 피바다가 되었다. 귀와 코를 잘려 피투성이가 된 사람들의 울부짖는 소리에 산천을 진동했다. 이들은 조선사람들의 머리, 코, 귀를 대바구니에 담아 허리춤에 차고 다니면서 사냥했다.”

아비규환(阿鼻叫喚), 생지옥이 따로 없었다. 전쟁이 끝난 뒤 왜장 오오고우치 히데모토는 귀와 코가 잘린 자가 18만 명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한일역사교사 공동연구팀은 코 수령증(鼻請取狀) 즉 군공증(軍功証)을 계산한 결과 약 12만명으로 보고 있다.

일본 JR 교토역에서 동쪽으로 얼마 되지 않는 히가시야마 시치죠(東山七條) 부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위패가 안치된 도요쿠니진자(풍국신사)가 있다. 그 정문 앞에 조그만 봉분이 귀무덤, 즉 이총(耳塚)이 있다. 이 무덤은 히데요시 생전인 1597년 9월 28일 조선출병에서 전승과 자신의 영광을 기리기 위해 만든 것이다.

전쟁이 끝난 뒤 조선과의 화의를 시도하던 도쿠가와 이에야스 시대에는 조선통신사가 오면 반드시 이총에 들러 무덤 앞에서 향을 피우고 제향(祭享)하여 죽은 이들의 넋을 위로하도록 했다.

18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망 300주년이 되는 해 거국적인 축제가 벌어졌는데 이 귀무덤은 히데요시의 혼이 깃든 전승 기념물로서 ‘성덕(聖德)의 유물’로 찬양되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기독교의 박애(博愛)정신과 중생을 제도(濟度)하려는 석가모니의 불성(佛性)인 종교가 전쟁의 도구로 이용됐을 때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김동철 주필 약력> 
- 교육학 박사
- 이순신 인성리더십 포럼 대표
- 성결대 교양학부 교수
- 이순신리더십국제센터 운영자문위원장, 석좌교수
- (사)대한민국 해군협회 연구위원
- 전 중앙일보 기자, 전 월간중앙 기획위원
- 저서 : ‘환생 이순신, 다시 쓰는 징비록’ ‘우리가 꼭 한번 만나야 하는 이순신’ ‘국민멘토 이순신 유적답사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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