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철칼럼] 이순신 죽음의 미스터리
[김동철칼럼] 이순신 죽음의 미스터리
  • 김복만 기자
  • 승인 2018.06.20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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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철 베이비타임즈 주필·교육학 박사 / ‘환생 이순신, 다시 쓰는 징비록’ 저자
김동철 베이비타임즈 주필·교육학 박사 / ‘환생 이순신, 다시 쓰는 징비록’ 저자

충무공 이순신(李舜臣) 사후, 그의 죽음을 둘러싸고 호사가들은 말이 많다. 자살설, 의자살설(擬自殺說), 위장순국설(僞裝殉國說), 은둔설 등이 그것이다.

한 사람의 죽음을 놓고 이러쿵저러쿵하는 것 자체가 불경이겠지만, 그가 죽음을 맞기 전 상황이 예사롭지 않다는 데서 나름대로 상상의 나래를 펴는 것이리라.

1598년 11월 19일 노량해전에서 장군이 전사한 뒤 80년 후 숙종 때 대제학 이민서(李敏敍)는 김 충장공(의병장 김덕령) 유사에서 “북을 치던 부관 송희립이 적탄을 맞고 쓰러지자 이순신은 스스로 투구를 벗고 돌격북을 치면서 싸움에 맞서다가 탄환에 맞아 죽었다(李舜臣方戰 免冑自中丸以死).”고 했다. 여기서 면주(免冑)는 투구를 벗었다는 뜻이다.

그는 또 통제사 충무이공 명량대첩비 비문에서 “이순신이 스스로 죽음을 택한 원인은 당파(동인과 서인) 간의 대립과 항쟁으로 점철된 당쟁의 희생물(黨禍)”이라고 했다.

그 후 1678년 편찬한 시문집 서하집(西河集) 17권 「김장군전」에서 “의병장 김덕령이 옥사하자(1596년 역모했다는 무고로 처형됨) 모든 의병들은 스스로 목숨을 보전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곽재우는 군대를 해산하고 군직을 떠나 벽곡(辟穀 곡식을 끊고 솔잎, 대추, 밤 등으로 생식함)하며 은둔해 당화를 피했고, 이순신은 싸움이 한창일 때 갑옷과 투구를 벗고 적탄에 맞아 죽었다.”고 했다.

또 숙종 때 좌의정인 판부사(判府事) 이이명(李頤命)은 가승발(家乘跋 집안의 역사기록)에서 “공은 용의주도하게 방비하여 자기 몸을 아끼지 않고 왜 몸을 버리고 죽어야 했을까. 세상 사람들이 말하되 공이 성공한 뒤에도 몸이 위태해질 것을 스스로 헤아리고 화살과 탄환을 맞으면서도 피하지 않았다고 했다(當矢石而不避). 어허! 참으로 슬프도다. 과연 그랬을까(嗟乎或其然乎今).”라고 기록하고 있다.

훗날 이런 말에 따라 자살설과 의자살설(擬自殺說)이라는 풍설이 뜬금없이 퍼져나갔다.

역시 민계식 전 현대중공업 대표이사도 『임진왜란과 거북선』에서 ‘자살형 전사’라고 서술하고 있다. 선조가 끊임없이 의심하는 상황에서 살아봤자 산목숨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에서 갑옷을 벗고 왜적들에게 잘 보이도록 붉은 전포만 입고 독전(督戰)의 북을 두드렸을 것이라는 상상에서이다.

이와 같은 자살설에 한 술 더 떠 위장순국설(僞裝殉國說)까지 나오는 판이다. 죽음을 위장했다는 것인데 남천우 전 서울대 물리학과 교수는 『이순신은 죽지 않았다』(2008년 미다스북)에서 위장전사를 주장했다.

“1598년 11월 19일 전사했을 때 배 안에는 아들 회(薈 32세)와 조카 완(莞 20세), 그리고 몸종 김이(金伊)밖에 없었다. 이순신은 살아남기 위해서 이들과 모의하여 전사한 것처럼 위장했다는 이야기다. 따라서 이순신이 아산 어라산에 실제로 죽어서 묻힐 때까지 15년 80일 동안 은둔 칩거하여 더 살았다는 것이다. 남해 충렬사 가묘(20일), 묘당도 월송대 가묘(2개월), 아산 금성산 묘(15년)는 모두 가매장한 것이 아니고 남의 눈을 속이기 위해서 고의로 만든 가짜 묘(僞墓)”라는 말이다.

과연 그랬을까. 보는 눈이 수도 없이 많았고 명나라 수군 도독 진린(陳璘)은 전투에도 같이 참전했는데 과연 위장 자살이 가능했을까.

『선조실록』 11월 23일자 기록이다.

“승정원에서 군문도감의 낭청(郎廳 종6품 실무관)이 보고하는 바, ‘진린의 차관(差官)이 와서 이순신이 죽었다.’고 하자 선조는 ‘알았다’고 대답했다. 또 진린이 ‘이순신이 죽었으니 그 후임을 즉시 임명하여 달라고 요구하였다.’고 말하자 ‘알았다. 오늘은 밤이 깊어 말할 수 없다.’고 했다.”

11월 30일 선조는 “이순신을 증직하고 관에서 장사를 도우라.”고 했다. 12월 1일 비변사는 선조에게 “장례를 치러 주고 자식들에게 관직을 주었다.”고 보고하고 12월 4일 이순신을 우의정으로 증직했다. 또 12월 11일에는 이순신의 영구가 남해에서 아산에 도착할 것이라고 선조에게 보고했다.

이순신 연구가 이종락 작가는 『이순신의 끝없는 죽음』에서 이상한 점을 제기했다.

“1598년 11월 19일 장군이 남해 관음포에서 전사한 뒤 시신은 이락사로 옮겨졌다가 충렬사로 다시 가매장되었다. 그리고 12월 11일 남해에서 아산으로 도착할 것이란 비변사의 보고도 있었다. 그런데 시신이 1599년 2월 11일 아산의 금성산 얼음목에서 반장(返葬 객사한 사람을 고향에서 장사지냄)할 때까지 약 80일이 소요되었다. 남해 충렬사 가묘에서 최장 12일 안치되어 오다가 1598년 12월 1일경 발상하여 아산으로 바로 이장하였다(약 8일 소요)고 전하므로 남는 60일의 공백 기간은 어떻게 되는가. 여기서 위장전사설의 근거가 된다.”

마침 이 궁금증을 풀어주는 대목이 발견되었다. 『선조실록』 31년(1598년) 12월 11일자 기록이다.

“선조에게 예조판서가 말한다. ‘등총병(鄧總兵 등자룡)의 치제관(致祭官 임금이 죽은 부하의 제사를 관리하도록 한 관리)을 이미 차출하였으므로 곧 내려 보낼 것입니다. 그러나 듣건대 이순신의 상구(喪柩 상여)가 이미 전사한 곳에서 출발하여 아산의 장지에 도착할 예정으로 등총병의 상구와 한 곳에 있지 않다고 합니다. 제사를 올리는 순위는 서로 구애된다고 생각되지 않아 이순신에게는 예조의 낭청(郎廳 종6품 실무관)을 먼저 보냈고 등총병에게는 이축(李軸)을 오늘이나 내일 보내려고 합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이에 선조는 ‘중국 장수를 먼저 장사 지내고 우리 장수는 뒤에 하는 것이 예의상 옳다. 등총병에게 먼저 치제관을 보내라.’고 하였다.”

관음포전투에서 같이 전사한 이순신과 등자룡의 시신은 남해 충렬사에 함께 안치하였으나 장례 절차나 선영 운구 등 우선순위는 등자룡이 먼저였으므로 장군은 뒤로 밀렸다. 등 부총병의 시신이 한양을 향해서 운구되자 비로소 묘당도에 가매장된 장군의 시신이 아산으로 운구되었을 것이다.

선조는 2월 25일 한성에 도착한 등 부총병의 시신을 3월 6일 국장으로 장례토록 하고 몸소 거둥하여 극진하게 문상했다. 그 후 등자룡 시신은 명나라로 운구되었다.

다음은 명과 왜, 조선 3국의 전사설을 뒷받침하는 기록이다. 우선 이순신의 큰 아들 이회가 현감역(玄監役)에게 보낸 편지이다.

“각별히 고한 것에 답하여 글을 올립니다. 저는 머리를 조아리고 재배드려 말씀드립니다. 지난번에 길 가던 중에 직접 곡하시고 글을 지어 제문과 제물을 갖고 조문해주시니, 애도의 감정이 너무도 극진하셨습니다. (…중략…) 저는 어둡도 완고한데도 죽지 않고 마지못해 세월이 가는 것을 보며 사람들의 돌봐주심에 힘입어 상여를 무사히 빠르게 옮겨왔습니다. 피눈물 흘리고 애가 끊기는 듯한 심정을 스스로 억제하지 못하겠습니다. 삼가 글을 올립니다. 현감역 자리 앞으로. 1598년 12월 13일 죄인 이회 글을 올림.”

이 편지는 아산으로 운구하던 중 조문한 현건(玄健, 1572~1656)에게 감사하다는 내용이다. 현건은 이순신 모친 초계 변씨의 친척으로 이순신과는 선대부터 매우 돈독한 관계를 맺어온 사이다.

운구가 전라도 영암 땅에 이르렀을 때 현건이 나와 조문했다. 그리고 제물 등을 보내왔다. 생전의 이순신은 자신보다 나이가 훨씬 어렸지만 집안 형님뻘 되는 현건과 편지를 주고 받을 때 항상 존칭을 썼다. 이 편지로 인해 이순신의 은둔설은 사실무근으로 밝혀진 셈이다. 장군이 피격당했을 때 맏아들 이회와 조카 이완이 임종을 하였고 송희립과 진린 등이 나머지 전투를 마무리 하였다.

『선조실록』 1598년 11월 25일자 기록이다.

“진린(陳璘)의 게첩(揭帖)에서 ‘한창 왜적이 포위할 때 내 배는 큰 북을 치고 먼저 진격하고 등자룡(鄧子龍), 이순신(李舜臣) 두 장수가 좌우에서는 협공할 때 두 장수는 죽었다.’”

노량해전에 참전한 해남현감 류형(柳珩, 1566~1615)은 장군이 전사한 15년 후 “장군은 추격 중 왜적선의 선미에 엎드린 조총수로부터 6발의 충상을 입고도 전투를 지휘하였다.”고 하였다.

왜의 시각을 담은 『일본사(日本史)』의 기록이다.

“노량해전에서 이순신은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군대를 선두에서 추격하다 선미에 엎드린 철포병(鐵砲兵)의 일제 사격으로 심장 왼쪽 가슴에 피탄하여 전사했다. 이 싸움에서 시마즈 함선 300척 가운데 250척이 침몰하고 겨우 50척이 빠져나왔다. 시마즈는 그의 아타케부네(安宅船)가 대파하자 다치바나 무네시게(立花宗茂)의 배로 옮겨 탔다.”

다음은 정조 때 오경원(吳慶元)이 쓴 명과의 외교록인 『소화외사(小華外史)』 기록이다.

“등자룡이 큰 공을 탐내 선봉에 서서 분격하는데 뜻밖에 뒷배에서 화기를 잘못 발사하여 등자룡 배의 돛에 불이 붙었다. 그러자 왜군들이 배에 올라타 등자룡을 칼로 마구 쳐 죽였다. 이순신은 나아가 앞서가던 진린이 포위되자 이를 구하려고 금빛 갑옷을 입은 왜장을 활로 쏘아 맞히니 왜병이 진린을 놓아주었다. 이순신이 와서 구출하여 진린은 탈출했으나 이순신은 총을 맞았다.”

이보다 훨씬 앞선 광해군 때 영의정 박승종(朴承宗)은 『충민사기(忠愍祠記)』에서 “진린이 26일 개선하여 한양에 올라오자 선조는 한강진까지 출영하였으며 이순신의 충렬(忠烈)에까지 이야기가 미치자 나는 얼굴에 눈물이 가득하였다.”고 말했다.

이때 진린은 선조에게 “성(城)을 버리고 군사를 잃은 무리들이 공신이라 자임하여 자기 방창(房窓) 아래에서 늙어 죽건만 이순신에게는 그 혁혁한 충렬과 큰 공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몸을 버림에까지 이르니 이것이 어찌 하늘의 보답인가.” 하고 한탄하였다.

장군의 죽음과 관련 여러 설이 난무하는 것은 따지고 보면 이순신을 불신했던 선조라는 ‘거대한 절벽’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동철 주필 약력> 
- 교육학 박사
- 이순신 인성리더십 포럼 대표
- 성결대 파이데이아 칼리지 겸임교수
- 문화체육관광부 인생멘토 1기 (부모교육, 청소년상담)
- 전 중앙일보 기자, 전 월간중앙 기획위원
- 저서 : ‘이순신이 다시 쓰는 징비록’ ‘무너진 학교’ ‘밥상머리 부모교육’ ‘환생 이순신, 다시 쓰는 징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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