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철칼럼] 이순신 인성 평가
[김동철칼럼] 이순신 인성 평가
  • 김동철 주필
  • 승인 2018.05.31 19:42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동철 베이비타임즈 주필·교육학 박사 / ‘환생 이순신, 다시 쓰는 징비록’ 저자
김동철 베이비타임즈 주필·교육학 박사 / ‘환생 이순신, 다시 쓰는 징비록’ 저자

개관사정(蓋棺事定)이라 했다. 관의 뚜껑을 닫은 후에야 고인(故人)에 대한 올바르고 정당한 평가를 할 수 있다는 말이다. 또 호사유피 인사유명(虎死留皮 人死留名)이라는 말도 있다. 즉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은 뒤 이름을 남긴다고 한다. 사람이 떠나고 난 뒤에 그 사람에 대한 평가는 반드시 있게 마련이다. 불멸의 이순신과 관련한 명사들의 이야기를 종합해본다.

이순신은 문무(文武)를 겸전한 사람이었다. 문과 무를 갖춘 양수겸장이었기에 무인이었지만 문인 못지않게 글을 남겼다. 난중일기, 임진장초, 서간첩 등은 1963년 국보 제76호로 등록되었고 난중일기는 2013년 유네스코세계기록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이순신은 후세에 글을 남김으로써 죽어서도 영원히 사는 불멸의 주인공이 됐다.

영조 때 실학자 남당 한원진(1682∼1751)에 의하면 조선유학의 인격함양법은 몸의 주인인 마음을 어떻게 다스리느냐의 문제로 귀결된다.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으로 사물의 이치를 깊이 연구해 진리를 인식하는 궁리(窮理), 순수한 마음의 힘을 기르는 존양(存養), 그리고 힘써 진리를 실천하는 역행(力行)을 꼽고 있다.

이순신이 보여준 충, 효, 애민, 창의, 소통 등 전통 윤리사상은 오늘날에도 본받을 만한 인격함양의 보고(寶庫)라고 할 수 있다. 교육부가 2015년부터 실시하는 인성교육진흥법의 인성 8대 요소는 예, 효, 정직, 책임, 존중, 배려, 소통, 협력이다. 공교롭게도 이 인성 8대 요소는 이순신의 인성 핵심 DNA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요즘 이른바 문사철(文史哲)의 인문학을 강조하는 것도 인간 본연의 심성을 되찾자는 캠페인일 것이다. 이순신의 문무겸전 모델은 전인교육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일찍부터 수신(修身)으로 준비된 인격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전장에서 부하들을 이끌고 전투를 지휘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야말로 평소 갈고 닦은 인성이 결정적 상황에서 빛을 발했던 것이다. 자신의 몸을 던져 나라와 백성의 평안을 찾았으니 인(仁)을 이룬 살신성인(殺身成仁) 정신이다.

그런 이순신의 곁에는 모함과 시기를 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힘껏 도와주고자 하는 의인(義人)들도 꽤 많았다. 인조 때 학자인 윤휴(尹鑴 1617∼1680)는 이순신의 성공을 도왔던 이들의 공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그 당시 군대에서 함께 이순신의 지업(志業)을 도왔던 사람들에 대해서도 역시 듣고 본 것을 엮어서 끝에 붙이는 바이다. 그리고 류성룡, 이원익, 정탁, 김명원, 이항복 등 여러 공들은 이 공(이순신)을 전후좌우에서 발탁시키고 붙들어 주어서, 세상의 못난 위인들로부터 비방과 비웃음을 받지 않고 끝내 지업을 성취하도록 하였다. …(중략)…”

이순신은 사후 45년이 지난 후인 1643년(인조 21년) 충무공 시호를 받았다. 숙종대왕은 아산 현충사 제문에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다.

살신순절 고유차언(殺身殉節 古有此言) 절개에 죽는단 말은 옛 부터 있지만
망신국활 시견사인(亡身國活 始見斯人) 제 몸 죽여 나라 살린 것 이 분에게서 처음 보네.

1598년 11월 19일 노량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이 전사하기 전 명수군 도독 진린(陳璘)은 명나라 신종 황제에게 한 통의 편지를 올렸다.

 “황제 폐하, 이곳 조선에서 전란이 끝나면 조선의 왕에게 명을 내리시어 조선국 통제사 이순신을 요동으로 오라 하게 하소서. 신이 본 이순신은 그 지략이 매우 뛰어날 뿐만 아니라 그 성품과 또한 장수로 지녀야할 품덕을 고루 지닌바 만일 조선수군통제사 이순신을 황제 폐하께서 귀히 여기신다면 우리 명국의 화근인 저 오랑캐(훗날 청나라)를 견제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저 오랑캐의 땅 모두를 우리 국토로 귀속시킬 수 있을 것이옵니다.”

진린은 1598년 이순신의 고금도 진영에 합류할 당시에는 갑질을 서슴지 않았으나, 점차 이순신의 인품과 전략을 꿰뚫어본 뒤에는 이야(李爺 이씨 노인)라고 높여 불렀고 사후에는 이순신의 공을 욕일보천(浴日補天)이라고 극찬했다. 욕일보천은 해를 목욕시키고 하늘의 구멍을 꿰맬 수 있을 정도의 위대한 공훈을 뜻한다.

이순신 장군의 평생 멘토였던 영의정 류성룡(柳成龍)은 “이순신은 사람됨이 말과 웃음이 적고 단아한 용모에다 마음을 닦고 삼가는 선비와 같았으며 속에 담력과 용기가 있어서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아니하고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쳤으니, 이는 곧 그가 평소에 이러한 바탕을 쌓아온 때문이었다. 이순신은 재주는 있었으나, 운수가 없어서 백가지 경륜 가운데서 한 가지도 뜻대로 베풀지 못하고 죽었다. 아아. 애석한 일이로다.”

조선 22대 정조대왕은 200여 년 동안 역사 속에 묻혀있던 이순신(李舜臣)이란 세 이름자를 세상에 꺼내놓은 주인공이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끔찍한 비극을 목도(目睹)했던 정조는 여전히 당파싸움에만 몰입하는 대소 신료들을 견제하면서 왕권을 강화해야 했다. 또 아버지 사도세자의 명예를 찾아주어야 했다. 파당으로 흐트러진 조정의 의견을 한 군데로 모아 진충보국(盡忠報國)에 힘을 쏟아야 했다. 그 표상으로 이순신 장군을 택한 것이다.

 “내 선조께서 나라를 다시 일으킨 공로에 기초가 된 것은 오직 충무공 한 분의 힘, 바로 그것에 의함이라. 내 이제 충무공에게 특별한 비명을 짓지 않고 누구 비명을 쓴다 하랴. 당나라 사직을 안정시킨 이성과 한나라 왕실을 회복시킨 제갈량을 합한 분이 충무공이다. 이순신이 중국에 태어났다면 제갈공명과 누가 우세할지 자웅을 겨루기 어려웠을 것이다.”

정조는 1792년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의 발간을 지시했다. 그리고 내탕금(內帑金 왕의 사적 금고)을 내서 발간비용을 지원한 결과 1795년 마침내 이충무공전서가 발간되었다. 정조는 1793년 이순신 장군을 영의정으로 추증했다. 1794년에는 대신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왕이 직접 지은 어제신도비를 세워 현재 충남 아산 어라산 이순신 묘소 앞에 있다. 또한 치제문을 직접 지어 통영 충렬사에서 제사하게 했다.

정조의 현양(顯揚)사업 못잖게 이순신 장군을 세상에 다시 부활시킨 사람이 박정희(朴正熙) 전 대통령이다. 이순신 장군의 현창(顯彰)사업을 1963년부터 시작했다. 정치판은 이전투구의 엉망진창이고 먹고살기도 힘든 나라에서 부국강병(富國强兵)은 반드시 이뤄야할 절체절명의 시대적 과제였다. 멸사봉공(滅私奉公), 선공후사(先公後私), 애민(愛民)과 창의(創意)정신을 가진 이순신 장군의 경세가적 정신 고양이 절대 필요했을 것이다.

1965년 4월 22일 남해 충렬사 경내 이순신장군 가묘 옆에 기념식수(植樹)를 시작으로 노량해전의 전사지인 관음포 이락사내에 친필휘호인 대성운해(大星隕海) 현판을 걸었다. 이어 1967년에는 1706년(숙종 32)에 세워진 아산 생가터의 조그만 사당인 현충사를 대대적으로 보수해 오늘날의 면모로 갖춰놓았다. 또 한산도 이순신 진영을 새롭게 개축했다. 1968년 4월 27일 광화문에 장군의 동상을 세워 국가수호 지킴이로서 역할을 형상화시켰다.

한산해전에서 이순신장군에게 크게 패했던 왜수군 장수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내가 제일로 두려워하는 사람은 이순신이며, 가장 미운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좋아하는 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흠모하고 숭상하는 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죽이고 싶은 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차를 함께 하고 싶은 이도 바로 이순신이다.”

다음은 영국 해군준장, 조지 알렉산더 발라드의 평이다.

 “이순신은 전략적 상황을 널리 파악하고 해군전술의 비상한 기술을 가지고 전쟁의 유일한 참 정신인 불굴의 공격원칙에 의하여 항상 고무된 통솔원칙을 겸비하고 있었다. 그의 맹렬한 공격은 절대로 맹목적인 모험이 아니었다. 영국인에게 넬슨(Nelson 1758-1805)과 견줄 수 있는 해군제독이 있다는 사실을 시인하기는 힘든 일이지만 이순신이 동양의 위대한 해군사령관이라는 것은 틀림없는 일이다.”

1905년 러일전쟁 전승 축하연에서 일본 해군제독 도고 헤이하치로(東郷平八郎)는 인터뷰하던 미국기자에게 “나를 넬슨에 비하는 것은 가하나 이순신에게 비하는 것은 감당 할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이순신의 하사관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그는 10분의 1 전력을 가지고 명량(鳴梁)에서 승리한 군신(軍神)이다.”며 추앙했다.

또한 일본 해군준장 사토 데쯔라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예부터 장군으로서 묘법을 다한 자는 한둘에 그치지 않는다. 해군장군으로서 이를 살펴보면 동양에서는 한국의 이순신, 서양에서는 영국의 넬슨을 들지 않을 수 없다. 불행히도 이순신은 조선에 태어났기 때문에 서양에 전하지 못하고 있지만 임진왜란의 문헌을 보면 실로 훌륭한 해군장군이다. 서양에서 이에 필적할 자를 찾는 다면 네덜란드의 루이터 미첼(Ruyter Michiel 1607-1678) 이상이 되어야 한다. 넬슨과 같은 사람은 그 인격에 있어서도 도저히 어깨를 견줄 수가 없다. 장군(이순신)의 위대한 인격, 뛰어난 전략, 천재적 창의력, 외교적인 수완 등은 이 세상 어디에서도 그 짝을 찾을 수 없는 절세의 명장으로, 자랑으로 삼는 바이다.”

마지막으로 “이순신의 죽음은 마치 넬슨의 죽음과 같다. 그는 이기고 죽었으며 죽고 이겼다.”는 일본의 석학(碩學) 토쿠토미 테이이찌로의 말처럼 나라의 안위가 위태로울 때마다 장군은 부활(復活)했다. 지금이 바로 그때가 아닐까.

<김동철 주필 약력> 
- 교육학 박사
- 이순신 인성리더십 포럼 대표
- 성결대 파이데이아 칼리지 겸임교수
- 문화체육관광부 인생멘토 1기 (부모교육, 청소년상담)
- 전 중앙일보 기자, 전 월간중앙 기획위원
- 저서 : ‘이순신이 다시 쓰는 징비록’ ‘무너진 학교’ ‘밥상머리 부모교육’ ‘환생 이순신, 다시 쓰는 징비록’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