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철칼럼] 이순신 수국(水國), 통영 한산도
[김동철칼럼] 이순신 수국(水國), 통영 한산도
  • 김동철 주필
  • 승인 2018.04.18 15:23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동철 베이비타임즈 주필·교육학 박사 / ‘환생 이순신, 다시 쓰는 징비록’ 저자
김동철 베이비타임즈 주필·교육학 박사 / ‘환생 이순신, 다시 쓰는 징비록’ 저자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이 발발한 뒤 경상우수사 원균(元均)은 전라좌수사 이순신(李舜臣)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이순신은 군대를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기에 조정의 출전명령을 받아 5월 4일 순천 오동포(당시 여수는 순천 관할구역)를 출발하여 1차 출전에 나섰다.

이기는 환경을 만든 뒤 싸움에 임하는 선승구전(先勝求戰) 전략을 구사하는 이순신은 5월 7일 옥포대첩으로 가선대부(종2품), 6월 7일 율포승첩으로 자헌대부(정2품 하계), 7월 8일 한산대첩으로 정헌대부(정2품 상계) 품계를 받는 등 승승장구했다. 이순신은 적진 탐망과 지형지물 및 기후 조건을 잘 이용하여 승리를 구가할 수 있었다.

이순신은 7월 8일 제3차 출전 때 한산도 해전에서 육전에서 사용하던 포위 섬멸 전술인 학익진(鶴翼陣) 전법을 처음으로 해전에서 펼쳤다. 임진란 3대 대첩 중 하나인 한산도대첩(閑山島大捷)은 한산도 앞바다에서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을 크게 무찌른 해전이다.

장군은 7월 5일 전라우수사 이억기(李億祺)와 함께 전라좌우도 전선 48척을 본영이 있는 여수 앞바다에 집결시켜 합동훈련을 실시한 뒤 6일 출전했다. 노량에서 경상우수사 원균(元均)의 함선 7척이 합세하여 연합수군의 전력은 55척이 되었다.

7월 7일 저녁 조선 함대는 당포에 이르러 정박했다. 이때 목동 김천손에게서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의 함대 73척(대선 36척, 중선 24척, 소선 13척)이 견내량(見乃梁, 거제시 사등면 덕호리)에 들어갔다는 정보를 접했다.

견내량은 거제도와 통영만 사이에 있는 곳으로 길이 약 4km에 폭이 넓은 곳도 600m를 넘지 않고 암초가 많아 판옥선이 운신하고 전투를 벌이기에 좁은 해협이었다. 그래서 유인(誘引)전술을 세웠다. 대여섯 척의 조선 선봉 함대를 발견한 일본 수군은 그들을 뒤쫓아 한산도 앞바다에까지 이르렀고 화도에 숨겨놓은 조선 함대가 일제히 나타나 학익진(鶴翼陣)을 펼쳤다. 포수들은 각종 총통을 쏘면서 돌진했다.

그 결과 중위장 권준(權俊)이 왜수군의 대장선인 층각대선(層閣大船) 한 척을 나포한 것을 비롯해 왜선 47척을 불사르고 12척을 나포했다.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뒤에서 독전하다가 전세가 불리해지자 패잔선 14척을 이끌고 김해 쪽으로 도주했다. 한산도로 도망친 와키자카 휘하의 병력 400여 명은 먹을 것이 없어 13일간 해초를 먹으며 무인도에서 떠돌다 뗏목을 타고 겨우 탈출했다. 마나베 사마노조는 자신의 배가 소각되자 섬에서 할복했다.

한산대첩의 위업을 달성한 이순신(李舜臣)은 정2품의 정헌대부(正憲大夫), 이억기(李億祺)와 원균(元均)은 종2품 가의대부(嘉義大夫)로 승서(陞敍)되었다. 한산해전을 승리로 이끈 이순신은 남해의 제해권을 장악함으로써 왜군이 남해와 서해를 거쳐 한강, 임진강, 대동강, 압록강으로의 진출을 막았다.

한산도 대첩은 김시민(金時敏)의 진주성대첩, 권율(權慄)의 행주대첩과 함께 임진란 3대 대첩으로 꼽힌다. 구한말 고종 황제의 미국인 고문인 헐버트(Hulbert)는 “이 해전은 조선의 살라미스(Salamis) 해전이라 할 수 있다. 이 해전이야말로 도요토미의 조선 침략에 사형 선고를 내린 것이다.”라며 감탄했다.

임진년 1592년 9월 부산포 해전까지 모두 4차례 출전해 왜수군을 격파, 혁혁한 전과(戰果)를 올린 이순신은 계사년 1593년 7월 15일 여수 본영에서 경상우수영 관내인 한산도로 진을 옮겼다. 왜군의 남해 진출을 효과적으로 봉쇄하기 위해서였다.

부산포의 왜군 본영에서 왜수군이 남해 바다로 나오려면 꼭 거쳐야 하는 곳이 바로 견내량이다. 그 부근에 한산도가 있는데 지금 봐도 배를 정박하거나 숨겨놓기 좋은 천혜의 전략적 요충지임을 알 수 있다.

한산도로 진을 옮긴 뒤 한 달 뒤인 1593년 8월 15일에는 선조로부터 삼도수군통제사 임명을 받아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수군을 모두 통제하는 명실상부한 수군(水軍)통합사령관이 되었다.

한산도는 이순신의 체취가 가장 많이 남아있는 곳이기도 하지만 영욕(榮辱)이 교차한 현장이기도 하다. 1593년 7월 15일 한산도로 진을 옮긴 이후 1597년 2월 26일 부산포 출전 명령거부로 한성 의금부에 투옥될 때까지 3년 7개월, 1300여일을 지낸 곳이다.

한산도 진은 후임 통제사가 된 원균이 1597년 7월 16일 칠천량에서 패전함으로써 왜군에 의해 모조리 불에 탄 채 방치되었다. 원균이 전사하고 다시 수군통제사가 된 이순신은 전라도 지역을 돌면서 수군재건의 노력을 했고 경상우수사 배설(裵楔)이 숨겨놓은 판옥선 12척을 장흥 회령포에서 찾아내 9월 16일 명량해전에서 왜수군 133척을 맞아 31척을 분멸시키는 쾌거를 이뤘다. 명량대첩 이후 이순신 장군은 목포 고하도, 완도 고금도 등에 수군통제영을 만들어 운영했다.

전장시의 백미(白眉)로 꼽히는 한산도가(閑山島歌)는 1795년 정조 때 편찬된 ‘이충무공전서’에 수록된 작품이다. 백척간두에 선 나라걱정으로 잠 못 이루며 수루에 올라 우국충정의 착잡한 심회를 읊었다. 진중음(陣中吟) 중 두 편을 소개한다.

<한산도가(閑山島歌)>
한산도월명야상수루(閑山島月明夜上戍樓) 한산도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  
무대도탐수시(撫大刀探愁時)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던 차에
하처일성강적경첨수(何處一聲羌笛更添愁) 어디서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
 
<한산도 야음(閑山島 夜吟)>
수국추광모(水國秋光暮) 남쪽 바다에 가을빛 저물었는데,
경한안진고(驚寒雁陣高) 찬바람에 놀란 기러기 높이 떴구나
우심전전야(憂心轉輾夜) 근심 가득한 마음에 잠 못 이루는 밤
잔월조궁도(殘月照弓刀) 잔월이 무심히 궁도를 비추네

한산도의 제승당(이순신 당시는 운주당), 수루, 충무사, 화살터인 한산정 등 이순신 유적을 보기 위해서는 통영 여객선터미널에서 왕복 1만6천원 뱃삯으로 갈 수 있다. 저 멀리 견내량이 바라보이는 길목에 한산대첩지임을 알리는 거북선 등대가 있다. 그 옆 한산도 정상에 우뚝 솟은 한산대첩비에 가려면 1시간 마다 오는 군내 버스를 타고 간 뒤 1km쯤 걸어가야 한다.

통영은 이순신 사후 수군통제사들이 집무하던 세병관(국보 제305호)과 그의 넋을 모시는 충렬사가 지어졌다. 충렬사에는 정조가 자신의 사금고를 털어 편찬한 ‘이충무공전서’ 진본이 있고, 명수군 도독 진린(陳璘)의 편지로 명 황제가 이순신을 수군도독으로 임명한다는 도독인(都督印) 등 팔사품 진품이 전시되어 있다. 매년 8월 초 열리는 이순신 한산대첩축제에는 해군 통영함이 방문해 관광객들을 맞이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