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는 아이가 처음 만나는 타인…대인관계 가르치기!
부모는 아이가 처음 만나는 타인…대인관계 가르치기!
  • 주선영
  • 승인 2013.07.16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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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쌍둥이 남매인 세아와 은유의 엄마는 유치원 선생님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선생님은 유치원에서 세아는 씩씩하게 잘 적응하고 있지만, 은유는 항상 얼굴이 그늘져 있고 기운이 없어 보인다고 했다. 그뿐만 아니라 은유는 수업시간에 다른 아이를 칭찬하면 금방 시무룩해져서 수업에 집중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엄마 뱃속에서 동시에 나온 쌍둥이지만 서로 너무 다른 아이들. 왜 그런걸까?

쌍둥이 남매의 서로 다른 애착지도
쌍둥이지만 세아는 체격이 크고 발달이 빠르다. 반면 은유는 자주 병치레를 하고 발달이 좀 늦돼 같은 걸 가르쳐도 세아보다 배우는 속도가 느리다. 그러다 보니 세아가 은유보다 칭찬을 받는 경우가 훨씬 더 많았다. 또 기특한 행동으로 부모를 웃게 만드는 것도 대부분 세아다.

지금 두 아이의 마음에는 서로 다른 애착지도가 만들어지고 있다. 세아의 마음속의 부모는 나를 보면 행복해하고 내 행동을 수용해주며 힘들거나 아플 때면 돌봐주는 대상이다. 필요하다고 요청했을 때 항상 부모가 반응을 보여주었다는 정보가 충분히 쌓여 있는 세아는 유치원에 와서도 안정감을 느낀다. 필요하다고 하면 누군가 반드시 나를 도와줄 거라는 밑그림이 뚜렷하게 그려졌기 때문이다.

반면 은유는 세아와 다른 밑그림을 갖고 있다. 부모는 항상 근심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다. 그 얼굴을 보면 무언가 무서운 일이 생긴 것 같기도 하고, 어디가 아픈 것 같기도 하다. 사실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은유는 그렇게 느껴진다.

부모의 반응을 토대로 그려진 은유의 밑그림은 이제 아이가 만나는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동일하게 적용되고 있다. 새로운 세상과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서 유치원에 왔지만 은유에게는 오로지 선생님만 눈에 보인다.

엄마, 아빠에게 충족되지 못한 애착욕구가 이제는 선생님에게 투사된 것이다. 나만 바라보았으면 하는 마음에 선생님을 바라보지만 그 눈길이 다른 아이에게 머물면 세아를 칭찬하는 부모의 그림과 겹쳐져 실망감이 든다. 수업 내용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이제 은유에게는 유치원은 더 이상 안전한 공간이 아니기 때문.

부모는 아이들이 살아가야 할 세상의 이정표가 되는 지도의 주인공이다. 아이의 요구를 알아차리고 민감하게 반응해주는 지도의 주인공을 가진 아이는 세상이 안전하다고 느낀다. 누구에게 가야 안전한지 스스로 판단할 수 있고, 어떻게 갈 수 있는지도 어렵지 않게 배운다.

밑그림이 탄탄해야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있다. 잘못 그려진 밑그림은 시간이 지날수록 고치기 어렵다. 아이들의 지도에는 부모가 준 장난감이나 놀이동산이 그려져 있지 않다. 내가 다가갔을 때 어떻게 반응 했는지가 담겨져 있을 뿐이다. 그래서 무엇을 해줄지가 아니라 어떻게 반응할지를 고민해야 한다.

애착관계 속에서 겪는 시련과 좌절
배가 고프거나 어딘가 불편하게 느낄 때 아기는 울음소리로 엄마를 부른다. 아이가가 울면 대부분 엄마는 반사적으로 달려가 아기를 돌본다. 이처럼 요구에 즉각적으로 반응해주고 불편함을 바로 해소해주는 엄마의 존재를 아기들은 자기 자신이라고 여긴다. 이는 아직 ‘타인’이라는 개념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충족시켜야 할 욕구나 결핍이 생기면 끊임없이 엄마에게 요구한다.

필요에 반응해주고 감정을 이해해주는 부모는 아이에게 좋은 애착지도를 만들어준다. 그렇지만 아이가 필요로 할 때 부모가 언제나 달려와 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아이들이 엄마를 떠나 유치원이라는 새로운 세상으로 가면 혼자 신발을 벗어야 하고, 밥을 먹기 위해서는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한다. 필요한 것과 불편한 것은 대부분 혼자 해결하거나 참아야 하는 시간이 점차 길어진다.

어린아이들은 자기와 남의 구별이 분명치 않고 현실과 공상 간의 차이를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래서 부모가 나를 위해 무언가를 해줄 때 보이지 않는 손을 자기 것이라고 여기고 자신을 전지전능한 존재라고 믿는다. 이런 아이가 자라면서 스스로 무언가를 해야 할 때 ‘보이지 않는 손’은 더 이상 내 손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척척 신겨지던 양말도, 옷 입는 것도 힘들어지게 된다. 뭐든지 다 할 수 있는 줄 알았는데 그렇지 못한 현실은 아이의 세계를 고통스럽게 한다.

아이들은 이때의 좌절을 다양한 방법으로 표현한다. 앞뒤 없이 무조건 울고 떼쓰기, 말도 안 되는 걸 원래대로 되돌려놓으라고 고집부리기 등을 해달라고 하기 일쑤다.

이때 부모가 나서서 원하는 것을 대신해 문제를 해결해주면 아이는 ‘스스로를 전지전능하다고 느끼는 미성숙한 상태’를 유지하게 된다. 이런 아이는 성장하면서 타인의 감정이나 입장을 배려할 줄 모르고, 자기중심적이고 미숙한 인격을 지니게 된다.

한편 모든 것을 다해주는 부모가 나라는 생각할 때 아이들은 행복하다. 그러나 환상의 공생관계는 2년을 넘지 못한다. 아이들은 미약한 존재로서 자기를 자각하고, 역량을 갖추는 길고 험난한 발달의 과정을 밟아가야 한다. 이런 시련과 좌절은 오히려 아이를 성숙시킨다.

아주대 정신건강의학과 조선미 교수는 “부모는 아이를 공생관계로 퇴행시켜서는 안 된다”며 “대신 아이 곁에서 새로운 시도를 하는 아이에게 뿌듯한 미소를 보내주고, 성패에 상관없이 사랑의 눈길을 보내주면 아이는 자신감과 자기가치에 대한 확신감이 가질 수 있다“고 밝혔다.

이어 그는 “이때 부모는 아이의 연장이자 수단으로서의 존재가 아니라 친밀감의 대상으로서 좋은 타인으로 자리 잡는다”고 설명했다.

신뢰와 불신의 균형
우리는 매일 사람을 만나고 그들과 관계를 맺는다. 신뢰의 대상은 남과 이 세상에 대한 것이지만 신뢰감을 갖는 것은 나를 위한 것이다. 믿음에 기반하지 않은 행동은 곧 적개심을 수반한 불신으로 바뀌거나 인지부조화를 일으켜 심리적 혼란을 야기한다.

발달심리학자 에릭 에릭슨은 “기본적 신뢰감의 형성을 발달의 여덟 단계 중 첫 번째다”라고 말했다. 즉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가장 먼저 마음속에 갖춰야 하는 것이 신뢰감이라는 것.

또한 그는 “기본적 신뢰감의 형성이 곧 전적인 신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라며 “신뢰감과 불신감의 비율이 적절하게 발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으며, 믿을 만한 사람이 있는 것처럼 믿기 어려운 사람도 있다. 따라서 내 믿음과는 상반된 행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상처받지 않고 세상을 살아가고 현명한 판단을 내릴 수 있다.

부모가 항상 완전해야 할 필요는 없다. 부르면 대부분 달려오지만 하던 일을 마치고 오느라 늦을 때도 있고, 그런 건 안 된다고 거절할 때도 있다.

무한한 신뢰, 결함 없는 희생은 현실에서 가능하지 않은 것이다. 때로는 이런 자각이 아이를 고통스럽게 할 수 있지만 그 고통을 딛고 나서야 아이는 비로소 역동적이지만 불완전한 세상에 대한 이해의 첫걸음을 내디딜 수 있게 된다.

도움말 : 『영혼이 강한 아이로 키워라,(쌤앤파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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