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철칼럼] 이순신과 원균의 명암
[김동철칼럼] 이순신과 원균의 명암
  • 김동철
  • 승인 2018.03.20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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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동철 베이비타임즈 주필·교육학 박사 / ‘환생 이순신, 다시 쓰는 징비록’ 저자

 

세상만사 아무리 생각해 봐도 결국 사람이 답인 것 같다. 그러나 열길 물속보다 더 깊은 사람의 속을 어찌 알 것이며 드러나는 신언서판(身言書判)만으로 어찌 사람을 제대로 고를 수 있다는 말인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이순신(李舜臣)은 차례를 뛰어넘어 유능한 무관을 선발하는 무신불차탁용(武臣不次擢用)에 의해 우의정 이산해(李山海), 병조판서 정언신(鄭彦信) 등의 추천을 받았다. 곧 이어 인사권을 쥔 이조판서 류성룡(柳成龍)은 이순신을 정읍현감(종6품)에서 전라좌수사(정3품)로 발령 냈다.

이 파격적인 결정은 결국 역사적으로 옳았음이 입증됐다. 류성룡의 사람 보는 눈이 탁월했다는 지인지감(知人之鑑)과 인재를 알아본 입현무방(立賢無方) 정신에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다.

이순신이 동인 세력에 의해 추천을 받자 자연히 정철(鄭澈)과 윤두수(尹斗壽) 등 서인세력은 원균(元均)을 밀기 시작했다.

원균은 이순신이 7년 동안 쓴 난중일기에 120여 차례나 언급됐다. 연도별로 보면 계사년(1593년)에 49회, 갑오년(1594년)에 46차례나 집중되어 있다. 이때는 임진왜란 초기 3년 연간이다. 대부분 원균의 떳떳하지 못하고 치졸한 모습에 대한 비난과 분노가 주를 이룬다.

진도(珍島)의 지휘선이 왜적에게 포위된 것을 눈앞에서 뻔히 보고도 못 본 척 하는 경상 좌위장과 우부장에 대한 비난과 함께 경상수사(원균)를 원망하고 있다. 또 죽은 왜적의 수급(首級)을 거두려고 적이 가득한 섬 사이를 들락거리는 경상수사의 군관과 가덕첨사의 사후선(伺候船 정찰탐색선)을 잡아 보냈더니 이순신에게 화를 내더라는 기록이 있다. 

이순신에게 날이 밝는 대로 나가 왜적과 싸우자고 공문을 보내놓고 다음 날 이순신이 왜적을 토벌하는 문제에 대해 공문을 써서 보내자 취기에 정신없다고 핑계를 대며 답하지 않았다. 이순신에게는 복병을 동시에 보내자고 해놓고 자신이 먼저 보내기도 했다. 

또한 도원수 권율(權慄)의 질책 앞에서 머리도 들지 못하는 원균의 모습을 두고 우습다고 비웃거나 매도(罵倒)에 가까운 비난을 숨기지 않는다. 심지어 어머니의 상을 당했을 때 문상을 보낸 것과 관련, “음흉한 원균이 편지를 보내 조문한다만 이는 도원수의 명이다.”라고 표현할 정도로 원균에 대한 감정의 골은 깊었다.

1593년 4월 20일 파천(播遷)했던 선조가 한양으로 돌아오기 전 이순신이 원균에 대해서 장계를 올린 적이 있었다. 원균은 이순신에게 구원병을 요청해 옥포해전에서 적을 물리친 후 이순신에게 두 사람 이름으로 장계를 올리자고 했다. 이순신은 “급할 게 없으니 천천히 올리자.”고 말하고는 밤에 혼자 장계를 올렸다. 

이순신이 이같이 혼자 행동한 것은 지휘체계의 혼선을 막기 위해서였다. 원균은 겨우 4척의 판옥선으로 참전해 다수의 전력을 움직이는 이순신의 지휘를 받아야 했다. 이순신은 장계에서 “원균이 군사를 잃어 의지할 데가 없었고 적을 공격할 때도 이렇다 할 공이 없었다.”라고 썼다. 장계마저도 서로 견제하면서 써야하는 불신의 상황이었다. 이때 원균 또한 이순신에게 적의를 품기 시작했다.   

1594년 1월 18일 맑음  “새벽에 출발하였는데 역풍이 크게 일었다. …(중략)… 전윤이 말하기를 ‘수군을 거창에서 모집해 왔는데, 이 편에 들으니 원수(권율)가 방해하려 했다고 합니다.’ 하였다. …(중략)…”

1597년 5월 8일 “元(원균)이 온갖 계략을 다 써서 나를 모함하려 하니 이 역시 운수인가. 뇌물 짐이 서울로 가는 길을 연잇고 있으며, 그러면서 날이 갈수록 나를 헐뜯으니, 그저 때를 못 만난 것이 한스러울 따름이다.” 

원균이 이순신과 비교대상이 될 때 항상 불리한 위치에 놓이는 것은 그 자신의 처신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1593년 7월 15일 전라좌수사였던 이순신은 여수(당시 순천)의 영(營)을 한산도(통영)로 옮겨왔다. 이순신은 그곳에 운주당(運籌堂)이란 작전통제소를 지었다. 운주당은 운주유악(運籌帷幄), 즉 ‘장막 안에서 작전을 계획한다’는 뜻에서 따온 이름이다. 

이순신은 운주당의 문을 활짝 열어 소통을 했다. 졸병이라도 군사에 대해서 자기 의견을 자유롭게 말하게 했다. 전투에 앞서서는 반드시 부하 장수들과 충분히 토론하고 작전을 짰기 때문에 실패확률이 그만큼 적었다. 이른바 선승구전(先勝求戰) 전략으로 미리 이기는 전투 환경을 만든 다음에 싸움에 임하니 질 수가 없었다. 

그러나 원균은 그렇지 않았다. 서애 류성룡(柳成龍)의 징비록(懲毖錄)에 나오는 대목이다. 

 “원균은 좋아하는 첩을 데려다가 그 집(운주당)에서 살며, 이중으로 울타리를 하여 안팎을 막아 놓아서 여러 장수들도 그의 얼굴을 보는 일이 드물었다. 그는 술 마시기를 좋아하여 날마다 술주정과 성내는 것을 일삼았고, 형벌에 법도가 없었으므로 군중에서 수군거리기를, ‘만일 왜적을 만난다면 오직 도망가는 수가 있을 뿐이다’라고 여러 장수들은 몰래 그를 비웃었고, 또한 다시 품의하거나 두려워하지도 않았으므로 호령(號令)이 행해지지 않았다.”

부하들의 신망을 받지 못하는 원균은 현장 지휘관으로서 체통과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상하좌우 혼연일체가 되어도 힘겨운 마당에 당연히 패전(敗戰)은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영내 엄정한 군기유지와 휘하 장졸들에 대한 신상필벌(信賞必罰)을 원칙대로 행한 이순신 군영은 ‘준비된 병영’이었다. 그런데 원균은 운주당에 첩을 데려와 살았다. 

그는 도원수 권율(權慄)에게도 밉게 보였던 모양이다. 권율은 1597년 7월 11일 부산포 공격을 주저하는 원균을 불러다가 곤장을 쳤다. 도원수는 현역 군 최고봉인 합참의장이고 원균은 삼도수군통제사, 즉 해군참모총장인데 곤장형을 가했다. 선조의 압박을 받은 도원수의 무리한 리더십이 발동된 것이다.  

이순신과 원균은 서로 다른 점이 많았다. 그 출신과 성격의 차이점은 갈등의 원인이 되었다. 우선 출신성분부터 달랐다. 나이로 보면 원균이 5살이나 많았고 무과급제도 11년이나 빠른 대선배였다. 게다가 원균의 아버지는 병마절도사를 지낸 원준량(元俊良)으로 무인 집안이었지만 이순신의 할아버지 이백록(李百祿)은 1519년 조광조(趙光祖)의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역적(逆賊) 집안’이란 꼬리표를 달고 살았다. 그래서 아버지 이정(李貞)은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초야에 묻혀 칩거했다. 

1592년 7월 15일 한산대첩을 이룬 이순신은 승승장구, 그 이듬해 8월 15일에는 삼도수군통제사(종2품)로 임명됐다. 그때 원균은 이순신 휘하의 경상우수사(정3품)였다. 사사건건 마찰이 있자 선조와 조정은 원균을 육군인 충청병마사 또 다시 전라우병사로 전출시켜 떼어놓았다.

성격도 완전히 딴판이었다. 이순신이 정보탐색전으로 적의 상황을 면밀히 살핀 뒤 전투에 임하는 선승구전(先勝求戰)의 햄릿형 전략가였다면 원균은 앞뒤 안 가리고 뛰어드는 용장(勇將)이었다.

‘용장(勇將)’ 원균은 용장으로서 분기충천함이 지나쳐 때론 좌충우돌의 맹장으로 기억될 뿐이다. 섶을 지고 불속에 뛰어드는 그의 분노는 자신뿐 아니라 부하들의 목숨을 빼앗은 결과를 만들었다. 1597년 7월 16일 칠천량 패전이 그 대표적인 예다.  

이순신은 호모이성(好謨而成), 계책을 꼼꼼히 짠 다음에 작전에 돌입하기 때문에 실패확률이 거의 없었다. 그가 23전 23승이란 불멸의 기록을 세운 것도 바로 이 전술의 결과이다.  

통영의 한산섬은 필자가 매년 탐방루트로 삼아 가는 곳이다. 그 길목에 견내량이 저 멀리 보인다.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가 이끄는 왜군 함대가 지나쳤던 곳이다. 와키자카 함대를 유인해서 너른 한산 앞바다로 끌고 나와 학익진(鶴翼陣)으로 에워싼 뒤 총통을 발사해 분멸시키는 장면이 눈에 선하다. 

또 다른 광경. 정유년 1597년 7월 16일 견내량에서 그리 멀지않은 칠천도 부근에서 원균의 조선수군함대는 와키자카 야스하루 등 왜수군 함대에 의해 전멸되었다. 두 장수의 운명을 가른 곳을 바라보며 야릇한 생각에 잠기곤 한다. 

<김동철 주필 약력>  

- 교육학 박사
- 이순신 인성리더십 포럼 대표
- 성결대 파이데이아 칼리지 겸임교수
- 문화체육관광부 인생멘토 1기 (부모교육, 청소년상담)
- 전 중앙일보 기자, 전 월간중앙 기획위원
- 저서 : ‘이순신이 다시 쓰는 징비록’ ‘무너진 학교’ ‘밥상머리 부모교육’ ‘환생 이순신, 다시 쓰는 징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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