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철칼럼] 순왜(順倭)와 세작(細作)
[김동철칼럼] 순왜(順倭)와 세작(細作)
  • 김동철
  • 승인 2018.03.02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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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동철 베이비타임즈 주필·교육학 박사 / ‘환생 이순신, 다시 쓰는 징비록’ 저자

 

임진왜란, 정유재란 등 7년 전쟁이 지루하게 펼쳐짐으로써 피아(彼我)를 확실하게 구분하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세작(細作)의 활동이 왕성해진 것이다. 세작은 간첩(間諜)을 일컫는데 그 은밀한 탐망, 척후 활동으로 상대의 전력을 파악하여 아군에게 이롭게 하려는 정보원이다.

이기는 전투를 주도했던 이순신 장군의 경우도 전투를 하기 전에는 항상 탐망선(探望船)을 띄우거나 탐망꾼을 적진으로 보내 적의 상황과 동태를 먼저 파악했다. 그럼으로써 전투준비에 만전을 기했고 선승구전(先勝求戰)의 ‘이기는 전투’를 할 수 있었다.
임진왜란 당시 간첩의 세작행위를 이해하기 위해서 다음 몇 가지 유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순왜(順倭)는 왜군을 위해 부역(附逆)하는 행위자로 매국노(賣國奴)를 가리킨다. 또 항왜(抗倭)는 귀순하여 왜군과 싸운 일본인을 말하고, 항왜(降倭)는 단순히 귀순한 왜군을 말한다.

이때 당시 이중간첩이 등장해 양쪽 진영을 번갈아 가면서 각각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며 전황을 뒤흔들어 놓았다. 그 대표적인 자가 요시라(要矢羅)로 일본명은 가케하시 시치다유(梯七太夫)다.

‘이중간첩’ 요시라는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통사(通詞 통역사)인 동시에 첩자였다. 당시 조선 정부는 요시라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으면서도 그에게 관직이나 은자(銀子 은돈)를 주면서까지 왜군의 정보 수집에 열심이었다. 

요시라는 오히려 이를 역이용해 자신의 입지를 강화시켰다. 때때로 왜군의 상황을 흘리는 척함으로써 조선 진영을 이간시키는 반간계(反間計)를 획책했다. 그 희생양(犧牲洋)은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李舜臣) 장군이었다. 요시라의 간계(奸計)가 조정에 먹힘으로써 장군은 전혀 예상치 못한 고초를 겪게 된다.

그 단초는 요시라가 1597년 경상우병사 김응서(金應瑞)에게 고니시 유키나가의 밀지(密旨)를 전하면서부터다. 선조실록 1597년 1월 19일자 기록이다.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7천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4일에 이미 대마도에 도착하였는데 순풍이 불면 곧 바다를 건널 것이며, 그가 오면 바다에 가까운 지역을 틀림없이 약탈할 것이니 사전에 예방하여 간사한 계교를 부리지 못하게 해야 한다. …(중략)… 지금 대마도에 와있으니 만약 조선에서 차단한다는 기별을 들으면 즉시 바다를 건너지 못할 것이다. …(중략)…”

이렇게 고니시로부터의 밀지를 조선에 알린 요시라에 대해서 선조는 첨지(僉知 중추원의 정3품 무관)라는 실직을 주었다. 또한 선조는 요시라의 계책에 따를 것을 명했다. 

그리하여 1597년 1월 21일 도원수 권율(權慄)이 직접 한산도 삼도수군 통제사 진영으로 가서 이순신에게 요시라의 첩보대로 출동 대기하라는 선조의 명을 전했다. 그러나 이순신은 그것이 왜군의 간계(奸計)임을 확신했기 때문에 출동하지 않았다. 

‘한낱 일개 간첩의 세치 혀에 놀아나서는 분명 안 될 것이다.’ 장군의 생각은 굳건했다. 그러나 이런 처사는 왕의 명령을 어긴 무군지죄(無君之罪)로 사형감이었다. 그래서 이순신은 왕명을 거역한 죄목으로 2월 26일 한양으로 압송됐다. 

그러나 결국 이중간첩 요시라의 말로는 비참했다. 무술년 1598년 9월에 대마도 측에서 요시라를 사신으로 삼아 한양으로 파견했는데, 칠천량 전투로 인해 이미 요시라에게 이를 갈고 있던 조선 측에서 요시라를 잡아다 요동으로 압송하였고, 명나라로 끌려간 요시라는 그곳에서 처형당했다. 

한편, 순왜(順倭)는 왜군에 달라붙은 매국노(賣國奴)이다. 순왜는 주로 조선 조정에 반감을 품었거나 왜군에게 포로가 되어 잡혀갔다가 부역한 사람들이다. 이들 가운데는 왜군의 길잡이 역할을 해주고 조선의 지도와 각종 정보를 제공했다. 나아가 왜군과 합세해 조선 총통을 발사하는 등 조선군을 공격하는데 앞장서기도 했다. 

1587년 2월 정해왜변(丁亥倭變)이 일어났다. 왜구(倭寇)들이 열여덟 척의 왜선으로 전라도 남해안 손죽도를 침범한 사건이다. 왜구들은 흥양땅과 가리포까지 확대하여 병선 4척을 빼앗아 도주하였다. 

이때 일본군의 앞잡이로 활약한 자가 진도출신 평민 사화동(沙火同 사을화동)이었다. 3년 뒤인 1590년 음력 2월 28일 선조는 조선 통신사를 일본에 파견하는 조건으로 사을화동과 함께 왜구 두목들인 신사부로, 긴지로, 마고지로를 조선으로 송환, 모두 처형했다.

함경도로 피난 와 있던 임해군(臨海君)과 순화군(順和君) 두 왕자를 포박하여 가토 기요마사(加籐淸正)에게 넘겨줬던 국경인(鞠景仁)과 김수량 등도 순왜이다. 

국경인은 이 공으로 가토 기요마사에 의하여 판형사제북로(判刑使制北路)로 봉해지고 회령을 통치하면서 횡포를 자행하다가 북평사(北評事) 정문부(鄭文孚)의 격문을 받은 유생 신세준(申世俊)과 오윤적(吳允迪)의 유인으로 붙잡혀 암살되었다.

한편, 이문욱(李文彧)은 왜로 잡혀갔다가 도망쳐 조선에 다시 돌아온 사람이었다. 

1597년(선조30) 선조실록 4월 25일자에는 이문욱은 왜군이 쳐들어오자, 포로가 되어 일본으로 끌려갔는데 글을 잘하고 용맹이 있어 관백(關伯)인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가 재주를 시험해보고는 양자로 삼았다고 한다. 수길(秀吉)을 시해하려는 무리를 막아낸 공으로, 더욱 수길의 총애를 받으니 시기하는 무리가 생겨났으며, 수길은 이문욱을 행장(小西行長)의 부장으로 삼고 공을 세우고 돌아오라고 하며 부산으로 보냈다. 이후 그는 왜군 진영에서 나와 이순신 휘하에 들어갔다고 되어 있다.

1598년 9월 23일자에는 전라도 방어사 원신(元愼)의 보고서다. “남해의 적에 빌붙었던 유학(幼學) 이문욱이 적의 진중으로부터 나와 적정을 알려 왔습니다.”라고 하였다. 즉 이문욱은 이순신 수하에 있던 남해 왜적 출신이라는 손문욱(孫文彧)과 동일한 인물로 묘사된다.

11월 27일 좌의정 이덕형(李德馨)의 보고에 관한 사관의 논(論)에 “이순신이 가슴에 적탄을 맞아 운명할 때 그의 아들이 곡을 하려 하는데, 이문욱이 곡을 그치게 하고 옷으로 시신을 덮었다.”고 되어 있다. 이 내용도 손문욱과 동일하다는 정황 판단이 가능한 부분이다.

한편, ‘이중간첩’ 요시라와는 달리 왜군 장수로서 임진왜란 초 조선군에 투항해 왜군과 당당히 맞서 싸운 사람이 있었다. 항왜(降倭)인 사야가(沙也可 1571~1642)라는 인물이다.

1592년 4월 중순 제2군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우선봉장으로 동래에 상륙한 사야가는  “이 침략전쟁은 명분이 없다.”면서 조선군에 투항할 뜻을 품었다. 당시 그의 나이는 21세로 혈기왕성한 때였다. 

그는 휘하 3천명의 군졸을 데리고 투항 후 조선군에게 조총 제조법을 전수했고 이순신 장군에게 “이미 조총을 개발하여 훈련하고 있다.”는 서신을 보냈다. 선조는 이를 가상히 여겨 성과 이름을 하사했는데 ‘김충선(金忠善)’이라고 했다. ‘조선인’ 김충선으로 다시 태어난 사야가는 진주목사의 딸과 결혼을 했다.       

김충선 장군은 곽재우(郭再祐) 등 경상도 의병과 연합전투를 벌였고 1597년 정유재란 때는 울산성 전투에서 한때 ‘주장(主將)’이었던 가토 기요마사군의 섬멸에 앞장섰다. 선조는 그에게 정2품 자헌대부의 품계를 내렸다. 

사야가는 임진왜란이 끝난 뒤 1624년(인조2) 이괄(李适)의 난 진압 때 활약했고 1636년 병자호란 때는 청나라 군사 수급 500여개를 베었다. 인조가 청태종 앞에서 치욕스럽게 무릎을 꿇고 삼배구두고(三拜九頭叩)를 올렸다는 소식을 들은 김충선은 대구 녹리(우록면)로 들어가 칩거했다. 

정유재란 400주년인 1997년 오사카와 교토에서 열린 한일 역사학자 심포지엄(‘왜 또다시 사야가인가’)에서 양국 교과서에 사야가 이야기를 싣자고 합의했다. 그의 후손들은 대구시 달성군 가창면 우록리에 집성촌을 이뤄 현재 40여 가구가 살고 있다. 2013년 한일우호관이 들어섰고 일본 방문객들이 매년 이곳을 찾는 명소가 됐다. 

문무(文武)를 겸비한 김충선 장군은 자신이 남긴 모하당 문집(暮夏堂 文集)에서 남다른 처지를 탄식했다. 남풍유감(南風有感)의 내용이다.  

 남쪽에서 바람이 불어오니 행여나 고향소식을 전해주지 않을까 괜한 생각에 잠기네
 생전에 부모님 소식 알 길 없는데 내 신세가 한탄스럽구나 


자신의 조국을 배반하고 조선을 위해 싸웠던 사야가, 앞으로 한일 선린외교(善隣外交)의 주역으로 등장해도 충분할만한 인물인 것 같다.                   

<김동철 주필 약력>  

- 교육학 박사
- 이순신 인성리더십 포럼 대표
- 성결대 파이데이아 칼리지 겸임교수
- 문화체육관광부 인생멘토 1기 (부모교육, 청소년상담)
- 전 중앙일보 기자, 전 월간중앙 기획위원
- 저서 : ‘이순신이 다시 쓰는 징비록’ ‘무너진 학교’ ‘밥상머리 부모교육’ ‘환생 이순신, 다시 쓰는 징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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