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철칼럼] 얼레빗과 참빗
[김동철칼럼] 얼레빗과 참빗
  • 김동철
  • 승인 2017.11.21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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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동철 베이비타임즈 주필·교육학 박사 / ‘환생 이순신, 다시 쓰는 징비록’ 저자

 

1594년부터 1596년까지 약 3년 동안 명나라와 일본과의 강화교섭으로 휴전 중이었다. 남해안의 각 왜성(倭城)에서는 왜장들이 다도회(茶道會)를 열어 차를 마시고 공놀이, 일본과 중국인의 볼거리 쇼 등을 하면서 유유자작 세월을 보냈다.

명나라는 임진왜란 때 다 꺼져가는 풍전등화(風前燈火)의 조선을 다시 살려준 은혜를 내려준 천자(天子)의 나라, 즉 제후국(諸侯國)으로서 자만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 중화(中華)의 자만심은 주변국을 각각 동이(東夷), 서융(西戎), 남만(南蠻), 북적(北狄)의 미개한 오랑캐 민족으로 구분했다. 

명은 동쪽에 있는 번방(藩邦)인 조선을 구원해준 은혜, 재조지은(再造之恩)을 강조했고 조정에서도 이에 절대 순응했다. 그러다보니 명나라 군사는 동쪽 오랑캐인 조선백성을 한 수 아래, 아니 발톱의 때만큼도 여기지 않았다.  

임진왜란 때 명은 항왜원조(抗倭援朝), 왜에 대항해 조선을 돕는다는 명분으로 압록강을 건넜다. 명나라 군사들은 조선 사람을 사람 취급하기는커녕, 노예만도 못하게 대했다. 토색질을 일삼아 조선의 땅을 너무나 피폐하게 만들었다. 못된 점령군 행세를 했다는 이야기다.  

역사적으로 당(唐)나라, 원(元)나라, 명(明)나라, 청(淸)나라 등 중국이 우리에게 저지른 작태와 횡포를 개략적으로 보더라도 약소국의 비애(悲哀)를 실감할 수 있다. 아니 그것은 천추(千秋)의 한(恨)이 되어 뼛속 깊이 각인되었다. 현재는 동북공정(東北工程)이란 미명 아래 고구려의 모든 유적과 기록들을 자신들의 역사로 만들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우리 외교부는 당당하게 말 한마디 못하고 그저 바라만 보고 있다. 

중국 사신이 류성룡(柳成龍)에게 “조선 백성들이 ‘왜놈은 얼레빗, 되놈은 참빗’이라고 한다던데 그게 사실이냐”고 물은 대화가 징비록에 나온다. 정작 침략군인 왜군보다 도와주러 왔다는 명군이 우리 백성들에게 식량약탈은 기본이고 무고한 인명살상, 부녀자 겁탈, 특유의 대국인체 하는 거만함 등으로 비난의 화살을 받았다. ‘되놈의 참빗’으로 말하자면 빗살이 굵고 성긴 얼레빗에 비해 대나무 참빗은 무척 가늘고 촘촘하여 한 번 빗으면 남는 게 없어 명군의 수탈이 심했다는 이야기다. 

얼레빗과 참빗에 관해 조선 중기 문인이자 관리였던 어우당(於于堂) 유몽인(柳夢寅1559~1623)의 어우야담(於于野談) 중 빗에 대한 노래, 詠梳(영소)가 있다.    

 木梳梳了竹梳梳(목소소료죽소소) 얼레빗으로 먼저 빗고, 다음에 참빗으로 빗어내니
 亂髮初分蝨自除(난발초분슬자제) 엉킨 머리카락이 정리되면서 숨었던 이가 다 떨어지네
 安得大梳千萬丈(안득대소천만장) 어찌 해야 천만척 되는 큰 빗을 구하여 
 一梳黔首蝨無餘(일소검수슬무여) 백성 머릿속에 숨어있는 몹쓸 이를 모두 없앨까 

권력에 기생하여 위로 아부하고 아래로 군림하여, 백성의 고혈을 빠는 간악한 관리를 슬관(蝨官)이라 한다. 예나 지금이나 탐욕 많고 부정을 일삼는 벼슬아치인 탐관오리가 가장 큰 공적(公敵)이다. 왜놈이나 되놈이나 몹쓸 관리들의 행태를 꼬집은 해학시(諧謔詩)다. 

이 땅을 짓밟은 왜군과 명군들은 서로 백성들의 물건을 약탈하는 토색질 경쟁을 벌였다. 평시에 아전(衙前)들에게 녹아나다가 전시가 되자 왜군과 명나라 군대에게 싹쓸이를 당하는 모양새가 비일비재했다.  

왜군이 지나간 곳에는 그래도 먹을 것이 조금이나마 남았지만, 명나라 군대는 도와준답시고 와서는 온갖 행패를 다 부렸다. 아녀자 겁탈은 다반사였고, 금, 은비녀 탈취에 식량, 이불, 옷가지, 세숫대야, 사발, 숟가락, 젓가락 등 온갖 생필품을 다 빼앗아갔다. 

명군이 조선군을 학대하고 무지막지하게 대하기 시작한 것은 1593년 4월 8일 왜와 용산 강화회담을 시작하고 나서부터다. 그 후 명군은 조선군이 왜를 공격하기만 하면 장군이든 졸병이든 잡아가 온갖 고문을 일삼았다. 조선군은 명의 허락을 받지 않고는 왜적을 맘대로 공격할 수 없었다. 때리는 시어미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미운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1593년 4월 20일 왜는 한양에서 철수해서 남쪽으로 내려갔고 명군이 한양에 도착했다. 그날 밤 명군 야불수(정찰병) 두 명이 와서 권율(權慄)을 잡아갔다. 전라순찰사 겸 감사였던 권율은 파주에 주둔하고 있었다. 두 달 전 행주산성에서 왜군의 공격을 막아내 행주대첩을 이뤘는데 명의 허가를 받지 않고 왜와 전투를 벌였다는 이유였다. 권율은 제독 이여송(李如松) 앞으로 끌려갔다. 이여송은 힐문하고 따져 물었다. 참으로 기가 막히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다음날 순변사 이빈(李頻)과 방어사 고언백(高彦伯)이 류성룡에게 급보를 전했다. 명군이 한강변에 벌려 서서 순변사 이빈의 중위(中衛) 선봉장 변양준을 쇠사슬로 목을 붙들어 매어 땅바닥에 끌고 다녀 입에서 피를 토하게 했다는 것이다. 

이빈도 구속하여 강변에 붙들어놓고 고언백도 명군 총병 사대수(査大受)가 불러 화를 내고 트집을 잡으며 꾸짖으며 구속했다는 것이다. 심지어 류성룡의 군관 사평(司評 정6품) 이충도 왜병을 총격해 사살했다고 해서 사대수에게 얻어맞아 중상을 입었다고 했다. 

1594년 3월 7일 명나라 선유도사 담종인(譚宗仁)이 보낸 ‘금토패문(禁討牌文)’에 대해서 이순신 장군은 항의서한을 보냈다. 답서의 내용 가운데 왜군의 약탈 부분이 기술되어 있다.

 “원래 왜놈들이란 그 속임수가 천변만화하여 헤아리기 어렵기 때문에 예로부터 신의를 지켰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습니다. 흉악하고 교활한 적도들이 아직도 그 패악한 행동을 그치지 아니하고 바닷가에 진을 치고 있으면서 해가 지나도 물러가지 않고 여러 곳을 멧돼지처럼 쳐들어와서 사람을 죽이고 재물을 약탈하기를 전일보다 곱절이나 더 한데 무기를 거두어 바다를 건너 돌아가려는 생각이 어디에 있다는 것입니까?”

왜군은 국보급 국가문서와 문화재 약탈에 열을 올렸다. 그리고 도자기 제조 도공과 활자를 다루는 인쇄 기술자를 집중적으로 잡아갔다. 이것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특명이기도 했다. 조선 도자기를 유독 좋아했던 히데요시는 “조선의 남녀노소의 모든 씨를 말려도 좋지만 도공과 활자 기술자만은 살려서 데려오라”는 엄명을 내렸다. 

왜군은 남해안 일대에 성을 쌓고 웅거하면서 조선인 부역자 등을 동원해서 농사를 짓거나 물고기를 잡아먹었다. 그러나 명군은 조선 조정이 대주는 식량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백성들의 목구멍에 풀칠할 땟거리마저 빼앗아 갔다. 그야말로 벼룩의 간을 빼먹는 격이었다. 

명나라 사신(使臣)의 횡포가 심해진 것은 임란 때 원병(援兵)을 보낸 이후부터였다. 명나라가 전쟁터로 바뀌는 것을 꺼려해 원병을 보내 놓고서도 조선을 위기에서 구했다는 ‘재조지은(再造之恩)’을 강조하면서 내정간섭은 물론, 사신들은 온갖 뇌물을 요구했다.

1602년 명의 황태자 책봉 사실을 반포하려고 조선에 왔던 명나라 사신 고천준(顧天峻)과 최정건(崔挺健)의 탐욕과 횡포는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문신 윤국형(尹國馨)은 ‘갑진만록(甲辰漫錄)’에서 “고천준의 탐욕이 비길 데가 없어 음식과 공장(供帳)의 작은 물건들까지 모두 내다 팔아 은(銀)으로 바꾸었다”면서 “말하면 입이 더러워진다(言之汚口).”고 비판했다. 

선조실록에서도 “의주에서 서울에 이르는 수천리에 은과 인삼이 한 줌도 남지 않았고, 조선 전체가 전쟁을 치르는 것 같았다. 서방(西方, 평안도와 황해도)의 민력(民力)이 다해져 나라의 근본이 뿌리 뽑혀 근근이 지내왔다”고 했다. 

15~16세기 중반 명나라는 조선인 출신 환관(宦官)을 사신으로 보냈는데 선조는 (天子가 보낸) 이들에게 먼저 절을 하고 맞이했다. 그리고 정승급 조정 신료들은 사신 일행의 시중을 드는 접반사(接伴使) 역할을 도맡았다. 특히 조선출신 환관 사신들은 은을 좋아해 한 번에 수만냥씩 거둬가 조정의 재정을 휘청거리게 만들었다. 모두가 백성의 고혈(膏血)을 쥐어짠 결과로 볼 수밖에 없다. 

1597년 정유재란 때 명나라 총병관 진린(陳璘)은 사로병진작전(四路竝進作戰)에 따라 수로군(水路軍) 대장으로 1598년 7월 16일 전남 완도의 고금도에 도착하여 이순신의 수군과 합류했다. 진린의 임무는 통제사 이순신과 함께 서로군(西路軍) 대장 유정(劉綎) 제독과 도원수 권율(權慄)의 육군과 연합하여 순천왜성에 웅거하고 있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를 사로잡는 것이었다. 포학한 성품의 진린을 두고 류성룡(柳成龍)은 징비록(懲毖錄)에서 다음과 같이 소회를 밝히고 있다. 

 “상(上)이 청파(靑坡)까지 나와서 진린을 전송하였다. 진린의 군사가 수령을 때리고 욕하기를 함부로 하고 노끈으로 찰방 이상규(李尙規)의 목을 매어 끌어서 얼굴에 피투성이가 된 것을 보고 역관(譯官)을 시켜 말렸으나 듣지 않았다. 나는 같이 앉아 있던 재상들에게 ‘안타깝게도 이순신의 군사가 장차 패하겠구나’ 진린과 함께 군중(軍中)에 있으면 행동에 견제를 당할 것이고 또 의견이 서로 맞지 않아 반드시 장수의 권한을 빼앗고 군사들을 학대할 것이다. 이것을 제지하면 더욱 화를 낼 것이고 그대로 두면 한정이 없을 것이다. 이순신의 군사가 어찌 패전을 면할 수 있겠는가?’하니 여러 사람들이 동의하고 탄식할 뿐이었다.”  

진린이 고금도에 내려온 지 3일만에 벌인 절이도 해전에서 그의 본색이 나왔다.  이순신이 처음 겪은 진린에 대한 장계가 선조실록 1598년 8월 13일자에 기록되어 있다.   

 “지난번 해전에서 아군이 총포를 일제히 발사하여 적선을 쳐부수자 적의 시체가 바다에 가득했는데 급한 나머지 끌어다 수급을 다 베지 못하고 70여급만 베었습니다. 명나라 군대는 멀리서 적선을 바라보고는 원양(遠洋)으로 피해 들어가 하나도 포획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우리 군사들이 참획한 수급(首級)을 보고 진(陳) 도독(都督)이 뱃전에 서서 발을 동동 구르면서 그 관하(管下)를 꾸짖어 물리쳤습니다. 게다가 신 등에게 공갈 협박을 가하여 못하는 짓이 없었습니다. 신이 마지못해 40여급을 나눠 보내습니다. 계유격(季遊擊)도 가정(家丁)을 보내어 수급을 구하기에 신이 5급을 보냈는데 모두들 작첩(作帖)하여 사례하였습니다.”  

고금도에 진을 치고 있던 조명연합군 중 이순신의 수군은 덕동에, 진린의 수군은 묘당도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런데 명군이 우리 수군에게 행패를 부리고 백성들에게는 약탈을 일삼았다.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이순신은 진린에게 “우리 작은 나라 군사와 백성들은 명나라 장수가 온다는 말을 듣고 부모를 기다리듯 했는데, 오히려 귀국의 군사들은 행패와 약탈을 일삼고 있으니 백성들은 도저히 견딜 수 없어 모두 피난가려 한다. 그래서 나도 같이 여기를 떠나려고 한다”고 하자 진린은 깜짝 놀라 이순신을 만류했다. 

이순신은 여세를 몰아 “귀국의 군사들이 나를 속국의 장수라 하여 조금도 거리낌이 없다. 그러니 내게 그들을 처벌할 수 있는 권한을 허락해준다면 서로 보존할 도리가 있지 않겠느냐.”라고 하여 진린의 승낙을 얻어냈다. 

진린에게 왜군의 수급을 적당히 건네주고 조선의 치안 자치권을 확보한 이순신의 고육책(苦肉策), 주고 받기식 외교술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김동철 주필 약력>  

- 교육학 박사
- 이순신 인성리더십 포럼 대표
- 성결대 파이데이아 칼리지 겸임교수
- 문화체육관광부 인생멘토 1기 (부모교육, 청소년상담)
- 전 중앙일보 기자, 전 월간중앙 기획위원
- 저서 : ‘이순신이 다시 쓰는 징비록’ ‘무너진 학교’ ‘밥상머리 부모교육’ ‘환생 이순신, 다시 쓰는 징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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