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철칼럼] 아타케부네, 세키부네, 명나라 군선
[김동철칼럼] 아타케부네, 세키부네, 명나라 군선
  • 김동철
  • 승인 2017.09.15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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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동철 베이비타임즈 주필·교육학 박사 / ‘환생 이순신, 다시 쓰는 징비록’ 저자

 

임진왜란 당시 왜군은 대형선인 아타케 부네(安宅船 안택선)를 운영했다. 유명 다이묘들이 타는 배로, 한자 그대로 매우 튼튼하고 안전하다는 뜻이다. 일본 전통 배의 권위자인 석정겸치(石井謙治)에 의하면, 아타케란 ‘적을 두려워하지 않고 마구 날뛰는 배’라는 설명이다. 
 
갑판에 3층 기와집인 천수각이 있고 배에는 청라장(靑羅帳)을 두르고 새털휘장인 우보와 홍기와 가문의 깃발인 가문치(家紋幟)를 화려하게 꽂아놓았다. 배의 노는 50개이고 약 300명이 승선했다. 최고 수장의 지휘선으로 임진왜란 때 부산포 왜성의 일본호(日本丸), 안골포 왜성의 삼국호(三國丸), 순천왜성의 소사환(小寺丸) 등 소수에 불과했다.

아타케에는 크게 두 종류가 있는데 첫 번째는 이른바 이세형(伊勢船型)이며, 두 번째는 후다나리형(二成船型)이다. 이세형은 이물(船首)이 우리나라 전통 배처럼 평평한 것이 특징이다. 일본에서도 그 실체를 두고 논란이 많은 니혼마루(日本丸)도 이세형 아타케이며, 악명 높은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배나, 명량해전에 참전한 하치스카 이에마사(蜂須賀家政)의 배도 이세형 아타케였다. 

후다나리형은 다른 일본 전통 배와 마찬가지로 이물이 뾰족한 구조로 되어 있다. 이세형의 상조(箱造)에 대비되는 구조로 상치(箱置)라고 부른다. 후다나리형은 주로 세토나이카이(瀨戶內海)나 규슈 지역에서 발전된 양식이다. 방패판 중에 일부는 경첩이 달린 특수 구조로 되어 있어, 밖으로 넘어뜨리면 다른 배로 건너갈 수 있는 다리 역할을 한다.

일반적인 아타케라 하면 30명의 조총병을 포함해서 대략 60명 정도의 전투요원이 승선했던 것 같다. 80개의 노(櫓)를 가진 후다나리형 아타케라면 수부(水夫)도 80여명 정도가 승선하게 된다. 이 정도 인원이라면 소형 판옥선과 거의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크기도 저판 길이가 43자(尺)부터 큰 것은 93자까지 되는 것이 있었다. 이충무공전서의 거북선 저판 길이는 64.8자이고, 광해군 7년 경의 판옥선 저판 길이가 47.5~70자 정도, 조선 후기의 통영상선(통제영 기함)의 저판 길이가 90자 정도이므로 아타케와 판옥선의 크기는 거의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아타케는 일본에서 흔히 야마토형 군선의 대표적 존재로 간주하고 있다. 1609년 도쿠가와 바쿠후(德川幕府)에서 제후들의 아타케 소유를 금지했기 때문에, 17세기에는 제후들의 어좌선(御座船)도 아타케 대신 세키부네(關船)로 만들게 되었다. 이 때문에 17세기 이후 세키부네의 크기가 조금씩 커졌다.

왜수군의 주력함대는 세키부네였다. 노는 20~40개이고 약 100여명이 승선했다. 또 소형군선인 고바야부네(小早船)는 36개의 노를 가진 급행 파발선으로 히갹센(飛脚船)이라고 불렀다. 세키부네를 관선(關船)이라 부르는 것은 중세 해적들이 수로의 요소에 관소(關所)를 설치하고 통행세를 받은 데서 비롯된다. 

세키부네는 뾰족한 선수를 가지고 있다. 배 길이를 폭으로 나눈 값을 장폭비(長幅比 L/B)라고 하는데 세키부네는 아타케에 비해 장폭비가 커, 길고 폭이 좁은 날렵한 선체 모형이다. 

첨저선인 세키부네는 속도가 빠르고 흘수가 높아 복원력이 크므로 파도가 센 대한해협 등 원양항해에 유리하다. 기동력은 있지만 쇠못을 사용하고 가로목이 따로 없어 함포적재는 불가능하다. 물론 당시 왜수군은 함포를 확보하지 못해서 천자, 지자, 현자, 황자 총통을 탑재한 조선수군에 비해서 전력상 크게 뒤처졌다. 

크기는 여러 종류가 있으나 임진왜란 당시에는 길이 36~46자(尺), 폭 12~16자 정도였다. 노가 40개 정도라면 비전투요원인 수부가 40명 정도 타게 되며, 조총병 20명을 포함해서 대략 30명 정도의 전투요원이 승선하게 된다. 경우에 따라 대포(大筒) 1문 정도를 탑재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대부분의 세키부네에는 대포를 탑재하지 않았다.

세키부네의 노를 젓는 요원들은 하층갑판에 있고 전투요원은 상층갑판에 위치하게 된다. 그러나 세키부네는 판옥선처럼 하층갑판 위에 같은 크기의 상층갑판을 덮은 구조가 아니라, 높이가 다른 몇 개의 상층갑판을 복합적으로 설치해 놓은 구조이다. 

세키부네나 고바야의 경우 예외 없이 돛대가 1개인 단범(單帆)이지만, 아타케의 경우 돛대가 2개인 쌍범(雙帆)인 경우도 많다. 

고바야(小早)는 ‘작은 세키부네’란 뜻이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보통 노가 30개 이하 17세기 이후는 40개 이하이다. 좌우에 방패판이 없는 등 방어력이 약한 편이다. 또 선수(船首)에 장대(將臺) 형태의 간단한 망루가 있을 뿐, 그 외 갑판은 기본적으로 1층으로 되어있다. 

노가 20개인 임진왜란 당시의 고바야라면, 비전투요원인 수부가 대략 20명 정도 타게 되고, 전투요원은 8명의 조총병을 포함해서 10명 정도가 탑승한다. 임진왜란 당시의 고바야는 대략 길이가 36자(尺) 미만이었다.

그러면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수군의 전투함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난중일기의 여백에 사선(沙船) 25척, 호선(號船) 77척, 비해선 17척, 잔선 9척이라는 메모가 적혀 있는데, 명나라 수군도독 진린(陳璘)이 이끌었던 명수군의 전력으로 보인다.   

 무술년 1598년 10월3일(乙卯) 맑음. 
 “진린(陳璘) 도독이 유정(劉綎) 제독의 비밀 서신을 받고 초저녁에 나가 싸워 자정에 이르기까지 적을 쳐부수었다. 그러나 명나라의 배인 사선(沙船) 19척, 호선(號船) 20여 척이 불탔다. 도독이 엎어지고 자빠지던 모습은 이루 다 형언할 수가 없다. 안골포 만호 우수(禹壽)도 탄환에 맞았다.”

명나라 초기 정화(鄭和 1371~1433)의 남해 원정 때 동원된 보선(寶船)은 길이가 137m 폭이 56m에 돛이 9개나 달린 대형함선이었지만 진린의 수군에서 그런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다. 

조선에 온 명나라 수군의 군선은 사선(沙船)과 호선(虎船)이 대표적이다. 평저선인 사선은 길이 15~20m에 탑승인원 60~80명 정도이고 호선은 길이 10m 정도에 탑승인원 20~30명 정도의 소형군선이다. 호선은 말할 것도 없고 사선도 단층으로 지어진 작은 배이다. 조선의 판옥선은 물론이고 일본의 아타케나 세키부네에 비해서도 훨씬 작다. 불량기 같은 중형 화포는 탑재가 불가능하고 호준포란 소형 화포만 탑재했다.  

1598년 11월 노량해전 당시 도독 진린(陳璘)과 등자룡(鄧子龍)은 조선의 판옥선을 빌어 타고 참전했는데 등자룡의 판옥선에서 화재가 발생하는 바람에 등자룡이 죽었다. 진린 역시 다도해 지역의 물길 사정에 어두운데다 혼자 공을 세우겠다고 욕심을 부리다가 그만 왜군에게 잡혀 죽을 뻔했다.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본 이순신(李舜臣) 장군은 작전지휘권한이 없었기 때문에 그저 속으로 분을 삭일 수밖에 없었다. 이순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은 16세기 당시 최강의 전력을 갖추고 있었다.

<김동철 주필 약력> 

- 교육학 박사
- 이순신 인성리더십 포럼 대표
- 성결대 파이데이아 칼리지 겸임교수
- 문화체육관광부 인생멘토 1기 (부모교육, 청소년상담)
- 전 중앙일보 기자, 전 월간중앙 기획위원
- 저서 : ‘이순신이 다시 쓰는 징비록’ ‘무너진 학교’ ‘밥상머리 부모교육’ ‘환생 이순신, 다시 쓰는 징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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