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철칼럼] 조선 주력함선 판옥선
[김동철칼럼] 조선 주력함선 판옥선
  • 김동철
  • 승인 2017.08.31 11:29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김동철 베이비타임즈 주필·교육학 박사 / ‘환생 이순신, 다시 쓰는 징비록’ 저자

 

임진왜란 때 조선수군의 주력함선은 판옥선(板屋船)이었다. 판옥선의 판옥(板屋)은 ‘판자로 만든 집’이란 뜻이다. 판옥선 이전의 주력 군함인 맹선(猛船)은 갑판 위가 평평한 평선형(平船型)인데 판옥선은 갑판 위에 다시 상갑판이 추가되어 장대(將臺)가 설치되어 있다.

1544년(중종 39) 병조판서를 지낸 판중추부사 송흠은 “전라도 지역에 침입하는 중국 해적선이 백여 명이 탑승할 수 있을 정도로 매우 크고, 판자를 사용하여 배 위에 집을 만들었으며(以板爲屋), 나무판자로써 방패를 세웠다(用板爲障)”며 우리도 이렇게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2층 구조의 판옥선은 1층에는 노를 젓는 격군(格軍)이 탑승하고 2층 갑판에 전투요원(사부, 포수, 화포장)이 탑승한다. 활을 쏘는 사부 15명, 화약 병기를 다루는 포수 24명, 화포장 10명, 키와 닻을 다루는 타료정수(舵繚碇手) 9명, 노를 젓는 능노군(能櫓軍) 42명, 포도관(捕盜官) 2명 등 168명이 승선했다.
 
임진왜란 종전 직후인 광해군대(1608~1623) 판옥선 배밑판(저판, 본판) 크기 기록이 남아있다. 배밑판 길이는 대선이 70척(19.7~21.2m)이다. 배의 구조상 배밑판 길이는 배 전체 길이보다는 짧다. 이러한 구조를 고려한다면 배밑판 70척의 대선을 기준으로 선체길이는 대략 80~90척, 전체 배 길이는 대략 90~110척(약 28~34m) 탑승인원 160명, 노 16자루 정도로 추정된다.

이 정도 크기는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 이하 수사급 지휘관이 탑승한 판옥선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기타 수군장이 탑승한 판옥선은 조금 작은데, 저판장 50~55척(15.2~16.6m), 탑승인원 125명, 노 12~14자루로 추정된다. 

또 판옥선은 바닥이 평편한 평저선(平底船)으로 끝이 뾰족한 첨저선(尖底線)인 왜수군의 군선보다 속력은 느렸으나 조수간만의 차가 큰 연안지역에 적합하게 만들어졌다. 

또한 천자, 지자, 현자, 황자 총통 20문을 탑재해서 쏘고 난 뒤 그 반동을 흡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첨저선인 왜수군 함선은 총통은 없었지만 있다 해도 그 반동을 흡수할 만큼 견고하지 못했다. 

판옥선은 뱃머리가 평편하고 가로목인 버팀목을 사용해 흘수가 낮고 조류가 심한 곳이나 수심이 얕은 갯벌, 모래톱에서 그대로 정박할 수 있다. 운항속도는 느리지만 회전반경이 작아 그만큼 활동성이 뛰어나 한쪽에서 총통을 방포하고 배를 돌려 다른 쪽의 총통을 발사하기에 적합한 구조였다. 

하지만 끝이 뾰족한 첨저선인 왜 함선은 운항속도는 빠르나 회전반경이 크다. 그리고 모래톱이나 펄에 박히면 그대로 좌초된다. 첨저선은 수심이 깊은 곳이나 먼 바다의 외양작전에 유리하게 설계된 배다. 또한 판옥선은 나무못을 사용해 물에 젖으면 불어나 더욱 조이게 되지만, 쇠못으로 고정한 왜함선은 소금물에 삭아서 결국 떨어지는 취약점을 가진다. 

1592년 4월 13일 왜수군은 총 1,000여척의 군선을 동원, 순차적으로 15만 8천여명의 병력을 실어 날랐다. 당시 조선수군의 판옥선 수는 왜수군에 비해 훨씬 적었다. 경상우수사였던 원균이 1593년 7월 15일 올린 장계에서 “삼도의 판옥선은 120여척뿐.”이라고 했다. 

이순신은 판옥선 건조를 서둘렀다. 전라좌수사 겸 삼도수군통제사 임무를 맡은 뒤 1593년 9월 10일 올린 장계를 보면, “전라우수영 90척, 전라좌수영 60척, 충청수영 60척, 경상우수영 40척 등 모두 250척을 만들겠다.”고 보고했다. 3개월 후 윤 11월 17일 올린 보고서에는 최종적으로 180여척이 만들어졌다고 밝히고 있다. 

판옥선은 명장 정걸이 만든 것으로 알려졌다. 경상우도, 전라좌우도 수군절도사를 지낸 백전노장 정걸은 1591년 이순신이 전라좌수사가 되자 77세의 노령임에도 불구하고 ‘까마득한 후배’ 이순신의 청을 흔쾌히 받아들여 그 휘하 조방장으로 임명되었다.  

1799년 정조 때 편찬된 호남절의록(湖南節義錄 / 임진왜란, 갑자란, 정묘호란, 병자호란, 1728년 무신란 등 5란의 사적(事蹟) 중 호남의 충의열사들만을 가려 엮은 책) 기록에 판옥선 건조와 관련된 기록이 나온다.  

 “훗날 암행어사 이이장(李彝章)이 판옥선은 그 운용이 어려우니 폐하자고 장계하자 영조가 ‘그것은 명장 정걸이 창제한 것’이니 폐할 수 없다.”고 했다. 

흥양(고흥) 출신 정걸은 1555년 을묘왜변 때 달량성(達梁城 영암)에서 왜군을 무찌른 공으로 남도포(南桃浦) 만호가 되었다. 이듬해 부안현감을 거쳐 1561년 온성도호부사, 1568년(선조 1) 종성부사로 있으면서 여진 정벌과 국경 수비에 공을 세웠다. 

그 뒤 1572년 경상우도 수군절도사, 1577년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1578년 경상우도 수군절도사, 1581년 절충장군, 1583년 전라도 병마절도사, 1584년 창원부사, 1587년 전라우도 수군절도사 등 수군의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1591년에는 전라좌수영 경장(조방장)으로 임명받고 조선 수군의 주력 전선인 판옥선을 만들었다. 또 화전(火箭 불화살), 철령전 등 여러 가지 무기도 만들었다. 이듬해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순신과 함께 각종 해전에 참가해 많은 공을 세웠다. 

특히 1592년 5월 7일 이순신 함대의 첫 해전인 옥포해전에서 전공을 세웠고 7월 8일 한산도대첩에 이어, 9월 1일의 부산포해전에서도 큰 공을 세웠다.

일본 수군함선보다 능력이 뛰어난 판옥선의 개발은 아이러니컬하게도 13~14세기 초 왜구들이 득세하면서 그 방비책으로 개발된 신형 전함이었다. 그 역사를 보면 다음과 같다. 

1510년(중종 5) 삼포왜란이 일어났다. 삼포는 부산포(동래), 제포(창원), 염포(울산)인데 왜인과 대마도주가 합세하여 병선 수백척을 몰고 들어와 부산포 첨사를 살해하고, 제포를 점령했다. 당시 조선 군선인 맹선은 이렇다 할 역할을 하지 못했고 1512년 임신조약이 체결돼 제포를 개방했다. 

1522~23년(중종 17, 18)에는 왜구들이 전라도와 황해도에 왜선 10여척으로 침입했다. 이어 1544년(중종 39) 4월 사량왜변이 일어났다. 화포로 무장한 왜선 20여척이 통영 사량진에 침입했다. 1547년(명종 2)에 정미약조가 체결되고 일본과 국교를 재개했다. 1555년(명종 10) 을묘왜변이 발발, 왜선 70여척이 해남군 달량포에 침입, 전라병사와 장흥병사를 살해하고 영암까지 상륙했다. 

왜적 침입 초기에는 조운(漕運) 겸용선인 맹선으로 대처하여 어느 정도 효과를 보았다. 그러나 왜구들이 중국의 조선술과 화포를 들여와 전력이 크게 강화되자 조선에서도 이에 대응하기 위한 새로운 전함을 개발할 필요성이 생겼다. 이는 판옥선이 탄생하게 된 계기가 됐다. 

1521년(중종 16) 중종실록에서 서후(徐厚)는 “지금 수준에서는 소선만을 쓰고 있지만 소선은 아무리 민첩하더라도 접전에서는 쓸모가 없고 적이 칼을 빼어들고 뛰어들 수 없는 고준(高埈)한 대함(大艦)을 가지고 적을 내려다보며 제압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을묘왜변 직후인 1555년 9월 16일 명종실록에 “임금이 조정 대신 여럿을 데리고 한강이 바라보이는 망원정에 올랐다. 새로 만들었다는 배를 직접 보기 위해서 였다.”라고 기록됐다. 드디어 판옥선이 개발된 것이다. 

견후장대(堅厚壯大)한 판옥선은 소나무 재질로 만들어져 삼나무로 만들어진 왜수군의 전선과 부딪혀도 끄떡없었다. 오히려 왜전선은 용골(龍骨)이 없어 선체를 지탱하는 힘이 모자랐기 때문에 판옥선과 부딪히면 그대로 박살이 났다. 

한편, 거북선 창제에 일등공신인 조선차관(造船差官) 나대용은 1606년(선조 39) 임진왜란 후 수군의 운영난을 통감하여 자신이 고안한 창선(柶船)의 사용을 다음과 같이 상소하고 있다. 

선조실록 1606년 12월 무자. 

 “거북선이 비록 싸움에 쓰기에 이로우나 사격(射格)의 수가 판옥선의 125인보다 적지 아니하고, 사부(射夫) 또한 불편한 연고로 각 영에 한 척씩만 두고 더 만들지 않습니다. 신이 항상 격군(格軍 노꾼)을 줄이는 방책을 생각해 왔는데, 판옥선도 아니고 거북선도 아닌 다른 모양으로 만들어 검과 창을 숲처럼 꽂아 이름 지어 창선이라 하였고, 격군 42인을 나누어 실어 바다에서 노 젓는 시험을 하니 빠르기가 나는 듯 하였습니다.”

창의실용정신을 가진 자들에 의해서 거북선과 판옥선은 이렇게 진화하고 있었다. 

<김동철 주필 약력> 

- 교육학 박사
- 이순신 인성리더십 포럼 대표
- 성결대 파이데이아 칼리지 겸임교수
- 문화체육관광부 인생멘토 1기 (부모교육, 청소년상담)
- 전 중앙일보 기자, 전 월간중앙 기획위원
- 저서 : ‘이순신이 다시 쓰는 징비록’ ‘무너진 학교’ ‘밥상머리 부모교육’ ‘환생 이순신, 다시 쓰는 징비록’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