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철칼럼] 불안한 안보
[김동철칼럼] 불안한 안보
  • 김동철
  • 승인 2017.07.12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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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동철 베이비타임즈 주필·교육학 박사 / ‘환생 이순신, 다시 쓰는 징비록’ 저자

 

우리는 절체절명의 운명선(運命線) 두 개를 가지고 있다. 하나는 남해를 통해 태평양으로 뻗어나가는 해상로이고, 다른 하나는 북한과 맞닿은 155마일 DMZ와 동-서 NLL 해상경계선이다. 

남해 해상로가 수출입 화물선과 원유 등 에너지 수입루트인 생명의 젖줄이라면 북쪽 라인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일촉즉발(一觸卽發)의 죽음이 예고되는 데드라인(dead line)이다. 이 데드라인에서 이념과 체제가 다른 동족상잔(同族相殘)의 비극은 여전하다. 

2015년 8월 4일 발생한 DMZ 북한지뢰도발로 우리 측 하사 두 명이 다리가 잘리고 발목이 절단되는 치명상을 당했다. 또 13년 전인 2002년 6월 29일, 월드컵으로 온 국민이 ‘오 필승 코리아!’를 외칠 때 서해 북방한계선(NLL)에서 북한 경비정이 넘어와 이를 차단하던 우리 고속정 357호에 선제 포격을 가해 고속정은 격침되고 6명의 전사자와 19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이렇듯 천인공노(天人共怒)할 북한의 대남적화전술은 현재 진행형이다. 여기에 북한의 핵개발과 미사일 발사 등을 합치면 대한민국은 위험천만한 화약고(火藥庫)이다. 한반도는 1953년 6·25 한국전쟁 이후 지금껏 휴전(休戰) 상황이다. 그래서 안보 컨트롤 타워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북한 핵미사일 활동 동결 시 미국 전략무기 전진배치와 한미 합동군사훈련 축소 가능’이란 제목의 문정인 대통령통일외교안보 특보가 미국에 가서 한 말을 곱씹어보면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는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는 안보뿐 아니라 민주주의와 민생이란 축으로도 살펴야 한다”며 “대통령이 사드 때문에 민주주의와 민생이 희생되는지 살피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했다. 이어 “북한의 비핵화가 없으면 대화할 수 없다는 미국의 조건을 한국 입장에서는 수용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또 “키리졸브 연습과 독수리 훈련에 항공모함과 핵잠수함 등 전략자산을 전개할 필요는 없다. 2010년 연평도 포격사건 이후 전진 배치된 전략무기를 하향조정해 그 이전처럼 하면 위기가 완화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나중에 이 발언이 문제가 되자 대학교수로서 한 개인발언이라고 했지만, 한반도 안보가 세계 초미의 관심사가 된 마당에 말조심, 또 말조심을 해야 할 것 같다.

1976년 8월 18일 판문점에서 미군 장교 두 명(보니파스 대위, 배럿 중위)이 북한군에게 도끼로 맞아죽은 사건이 발생했다. 이른바 ‘8·18 판문점 도끼만행사건’이다. 이날 미군 측 4명과 우리 장병 4명 등도 중경상을 입었다.

미국은 즉시 북한을 쓸어버릴 태세로 본토와 해외주둔 군사력을 한반도로 집결시켰다. 6·25 전쟁 후 처음으로 전투준비태세인 ‘데프콘 3’가 발령된 일촉즉발(一觸卽發)의 위기상황이었다. 

우리 특전사 장병들은 문제의 미루나무 제거작전에 긴급 투입됐고 주변에 불법으로 설치된 북한군 초소 4개를 깡그리 부숴버렸다. 화들짝 놀란 김일성은 긴급 ‘사과성명’을 발표해 북한 정권이 지구상에서 사라지는 궤멸 상황을 막았다.  

만만하게 보이면 계속 집적거리고 강하게 나가면 꼬리를 내려 호시탐탐 훗날을 노리는 게 북한의 화전양면(和戰兩面) 전술이다.

1999년 6월 7일 연평도 서북쪽 10㎞ 해상에서 북한 경비정 3척이 어선 보호 미명 아래 NLL 북방한계선을 3.5㎞ 침범했다. 다음날에도 경비정 4척과 어선 10척을 북방한계선 남쪽 9㎞까지 침범시켰다. 

이에 대한민국 해군은 고속정을 접근시켜 교전규칙과 국제법에 의해 퇴각을 강력하게 요구하였다. 그러나 북한은 경비정 3척을 추가 투입했고 6월 9일에는 북한 고속정이 대한민국 해군의 고속정을 충돌해 손상을 입히기도 했다. 

그러자 해군은 6월 11일 북한 경비정 4척에 대해 선체 뒷부분을 부딪치는 ‘함미(艦尾) 충돌작전’을 실시했다. 6월 15일 북한 경비정 7척이 대한민국 해군 고속정에 접근해 충돌공격을 실시하고, 양측 간에 혼전이 벌어지던 중 오전 9시 28분 북한 함정이 먼저 사격을 가해오자 해군은 자위권 차원에서 즉각 대응사격을 가하였다. 

쌍방 간의 교전은 약 14분간 진행되었고 그 결과 북한은 어뢰정 1척이 격침되고 5척이 크게 파손 당하여 북으로 도주하였다. 반면에 대한민국 해군은 고속정 5척이 경미한 손상을 입었다. 이른바 제1차 연평해전이다. 

제1차 연평해전이 벌어진 지 3년 후인 2002년 6월 29일 2002 한일월드컵이 막바지에 이른 시점에서 북한은 다시 북방한계선을 침범해 무력 충돌을 일으켰다. 이날 북방한계선을 넘기 시작한 북한 경비정들은 근접차단을 실시하던 해군 참수리 357호에 대해 집중사격을 가했다. 

이에 대한민국 해군도 참수리 357호와 358호가 대응사격을 개시하는 한편 인근의 제천-진해함(PCC)과 참수리급 경비정 4척을 투입해 격파사격을 실시했다. 교전은 31분간 진행됐고 북한 SO 1급 초계정 등산곶 684호가 반파된 채 북으로 퇴각함으로써 종결됐다. 

해군은 북한 경비정으로부터 기습 공격을 받은 참수리급 고속정 357호가 침몰되고, 정장인 윤영하 소령을 비롯해 한상국 상사 및 조천형, 황도현, 서후원 중사, 박동혁 병장 등 6명의 전사자와 19명의 부상자를 낳았다. 이른바 제2연평해전이다. 

이 제2연평해전이 있기 전 대북통신감청부대에서는 북의 공격 기도를 감청해 국방부에 보고했지만 감감 무소식이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2000년 남북정상회담을 한 뒤 “이젠 전쟁 걱정이 없어졌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햇볕정책으로 남북화해 무드가 조성되어 있는 상황에서 우리 군은 북한이 NLL을 침범해도 먼저 쏘아서는 안 되는, 이상한(?) 교전수칙을 지켜야 했다. 그 결과 우리 해군용사들은 피투성이가 되도록 당했다.    

6명의 해군영웅의 영결식장에는 대통령, 국무총리, 국방부장관, 합참의장 중 어느 한 명도 참석하지 않은 채 해군장(海軍葬)으로 조용히 치러졌다. 연평해전에서 희생된 영웅들은 전사자 대우도 못 받고 순직자로 처리됐다. 당시 군인연금법에 전사자가 법률로 명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3,000만~5,000만원의 사망 보상금만 받았다. 

해군은 연평해전을 계기로 교전규칙을 소극적 대응에서 적극적인 응전 개념으로 수정했다. 이에 따라 북한 경비정의 북방한계선 침범시 경고방송-시위기동-차단기동(밀어내기 작전)-경고사격-조준격파사격의 5단계 대응에서 시위기동-경고사격-조준격파사격의 3단계 대응으로 개정됐다.

이후 2010년 3월 26일, 백령도 근처 해상에서 초계중이던 해군 초계함 PCC-772 천안함이 피격되어 침몰한 ‘천안함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으로 해군 장병 40명이 사망했으며 6명이 실종되었다.

정부는 천안함의 침몰 원인을 규명할 민간-군인 합동조사단을 구성했고, 조사단은 같은 해 5월 20일 천안함이 북한의 어뢰공격으로 침몰한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 조사 결과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안건으로 회부됐다. 

안보리는 “북한이 천안함을 공격했다는 조사결과에 비추어 우려를 표명한다. 공격을 규탄한다.”는 내용의 의장성명을 채택했다. 북한은 ‘특대형 모략극’이라며 펄쩍 뛰었다. 

또 김정은의 3대 세습을 본격화한 북한이 2010년 11월 23일 서해 연평도 해병 부대와 민간인 마을에 해안포와 곡사포 포탄 100여 발을 발사해 해병대원 2명이 사망하고 16명이 중경상을 입었으며, 민간인 2명이 사망하고 10명이 부상당한 ‘연평도 포격사건’이 있었다.

1953년 군사분계선 설정 당시 육상경계선에 대한 양측 합의는 이루어졌으나, 동서 해안의 해상경계선인 NLL에 대해서는 남북한 사이에 명시적인 합의가 없었다. 

이에 유엔군은 서해상에 당시 국제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영해 기준 3해리를 고려하고 연평도, 백령도 등 5개 도서와 북한지역과 개략적인 중간선을 기준으로 북방한계선을 설정했다. 그러나 북한은 이를 유엔군의 일방적 조치라며 그 효력을 부인하고 있다. 이러한 입장 때문에 전후에 해상에서 긴장은 계속되고 있다.   

“부부일심지대하(桴腐日深之大厦), 기국비국(其國非國)이라.(나라가 나날이 썩어가는 큰 집의 대들보와 같으니, 이건 정말 나라도 아니다)” 

‘10만 양병설(養兵說)’을 주장했던 율곡 이이(李珥) 선생이 1582년 왜란의 조짐이 있는데도 국론이 엇갈려 유비무환(有備無患) 정신이 사라진 조정 상황을 상소문 ‘만언봉사(萬言封事)’에서 이렇게 탄식했다. 역사는 반복되는가.  

<김동철 주필 약력> 

- 교육학 박사
- 이순신 인성리더십 포럼 대표
- 성결대 파이데이아 칼리지 겸임교수
- 문화체육관광부 인생멘토 1기 (부모교육, 청소년상담)
- 전 중앙일보 기자, 전 월간중앙 기획위원
- 저서 : ‘이순신이 다시 쓰는 징비록’ ‘무너진 학교’ ‘밥상머리 부모교육’ ‘환생 이순신, 다시 쓰는 징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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