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철칼럼] 청렴(淸廉) 장군
[김동철칼럼] 청렴(淸廉) 장군
  • 김동철
  • 승인 2017.06.26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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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동철 베이비타임즈 주필·교육학 박사 / ‘환생 이순신, 다시 쓰는 징비록’ 저자

 

관리들의 부정부패는 우리나라의 고질병이다. 인간의 속성이 이익을 탐하고 해로움을 피하려는 호리오해(好利惡害) 존재이기는 하나, 남의 돈(국민 세금)을 마치 자기 쌈짓돈처럼 물 쓰듯 하는 관리들의 부정 이야기는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다. 

견리사의(見利思義), ‘눈앞에 이익이 보일 때 먼저 옳은 것인가를 생각하라’는 공자님  말씀을 우리는 고리타분한 잔소리로 버리고 있지 않은지 살펴볼 일이다. 아무도 안 본다고 생각하고 마구잡이로 이(利)를 찾다가 쇠고랑 찬 패가망신자들은 지금도 교도소에 차고 넘친다. 

공무원 사회에는 어디에 얼마나 썼는지 영수증을 제출하지 않아도 되는 ‘깜깜이 예산’이 있다. 이른바 특수활동비로 지난해 18개 부처에서 8,869억을 썼는데 국정원(4,860억원), 국방부(1,783억원), 경찰청(1,297억원), 법무부(285억원), 국회(80억원) 등이 사용했다. 이 깜깜이 예산은 기밀유지가 필요한 수사와 이에 준하는 국정활동에 소요되는 경비이다. 

그런데 이번에 우연찮게 법무부와 검찰 간부들 간에 ‘돈봉투 회식’ 사건이 불거지면서 수면위로 드러났다. 게다가 신임 대통령이 사적인 회식, 강아지 사료, 치약, 칫솔 구매 등을 개인 월급에서 쓰겠다고 하자 이들 기관들은 바짝 긴장하고 있다. 

그동안 깜깜이 예산은 아무도 터치하지 못했으므로 허투루 쓰였더라도 알 수가 없었다. 국가안보와 사회 공공안녕질서를 담당하는 기관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국회, 대법원,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미래창조과학부 등에서 무슨 깜깜이 예산이 필요했는지 의아할 따름이다.

병법가였던 주나라 강태공(姜太公)은 다음과 같이 일갈했다. ‘의승욕즉창 욕승의즉망(義勝欲則昌 欲勝義則亡)’, 의리가 욕심을 이기면 번창하고 욕심이 의리에 앞서면 망한다고 했다. 

또 전국시대 병법가 위료자(尉繚子)도 ‘화재어호리 해재어친소인(禍在於好利, 害在於親小人)’, 화는 이익을 좋아하는데 있고 피해는 간사한 소인 모리배(謀利輩)를 가까이 하는데 있다고 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옛말 그른 것 하나도 없다.    

1598년 10월, 순천 예교성(曳橋城)에 주둔해 있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를 협공하기 위해서 명나라 유정(劉綎) 제독과 바다의 진린(陳璘) 제독은 수륙연합작전을 계획했다. 

그런데 유정은 어쩐 일인지 약속을 어기고 작전실행에 미적거렸다. 고니시가 유정에게 뇌물로 금은보화를 보냈기 때문이었다. 진린에게도 재화를 보내 탈출구를 열어달라고 애걸했다. 고니시는 8월 18일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사망하자 철군하기 위해서 애가 타들어가는 상황이었다. 

진린은 “퇴각하는 적장의 퇴로를 열어주면 어떻겠소.”라며 이순신(李舜臣) 장군에게 물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편범불반(片帆不返), “단 한척의 왜수군을 그대로 돌려보내지 않겠다.”면서 진린에게 강력히 반발했다. 

그러자 고니시는 이순신의 환심을 사기 위해 조총과 칼 등 뇌물을 보냈다. 이에 이순신은 “나는 임진년 이후 적을 수없이 죽이고 노획한 총과 칼을 산더미처럼 가지고 있다. 이것을 다 무엇 하겠느냐”고 하자 고니시가 보낸 사자(使者)는 머쓱해져서 돌아갔다. 

진린은 “이미 적의 뇌물을 받았으니 (고니시를 놔주고)남해의 적이나 토벌하러 가자”며 다시 이순신을 설득했다. 

이순신은 “남해의 적은 포로로 잡힌 우리 백성이므로 눈앞의 적을 놔두고 우리 백성을 죽일 수는 없다”면서 “명나라 황제께서 장수를 명하여 보낸 것은 우리 소국의 인명을 구해주기 위한 것인데 어찌 남해의 우리 백성을 베어죽이겠다는 말인가. 그것은 황상(皇上)의 본의가 아닐 것이다”며 논리정연하게 진린에게 답했다. 

진린은 대국의 장수로서 이순신의 명쾌함에 그만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던지 조명연합수군함대를 결성한 뒤 11월 19일 노량해전에 참전하게 된다. 이순신 장군이 왜수군의 조총을 맞아 최후를 맞이한 바로 그 해전이다.

일찍이 율곡 이이(李珥)가 선조에게 올린 만언봉사(萬言封事) 가운데 기국비국(基國非國) 부부일심지대하(桴腐日深之大厦)라는 말이 나온다. 이는 곧 “이건 나라가 아닙니다. 나라가 나날이 썩어가는 큰 집의 대들보와 같습니다.”라는 말이다.
 
만언봉사는 1574년 선조7년 왕명의 출납을 맡는 우부승지였던 율곡이 선조에게 목숨을 걸고 올린 상소문이다. 이 글에서 율곡은 조선 조정과 사회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지적하면서 목숨을 내걸고 왕에게 직언을 서슴지 않았다.  

‘기묘사화와 을사사화 때 이루어진 나쁜 습성과 규칙을 개혁해야 한다’면서 당대 정치가 실질적인 공(功)을 얻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특히 상하(上下)의 신뢰, 관리들의 책임 소재와 책임감, 경연(經筵)의 운영, 인재 등용, 재해 대책, 백성의 복리 증진, 인심의 교화에 있어 실(實)이 없음을 밝혔다.

이어서 수신(修身)의 요체로 분발, 학문, 공정, 어진 선비를 가까이 함 등을 들었다. 또 안민(安民)의 요체로 개방적인 의견 수렴, 공안(貢案)의 개혁, 사치풍조 개혁, 선상제도(選上制度)의 개선, 군정(軍政) 개혁 등 조목을 현황과 개선책으로 논술했다. 

그러나 역성혁명의 주역, 이성계(李成桂)의 조선 창업이후 200년 간 태평성대를 거치면서 쌓였던 적폐(積弊)는 쉽사리 고쳐지지 않았다. 숭무(崇武) 정신이 실종된 가운데 얼마 안 있어 미증유(未曾有)의 난리가 일어났으니 1592년 임진왜란이다.

매사 원리원칙을 강조했던 이순신 장군의 일생은 파란만장(波瀾萬丈), 우여곡절(迂餘曲折)의 연속이었다. ‘관행’이란 명목으로 부패를 스스럼없이 저지르는 수많은 부패관료들로부터 시기와 모함을 받았다.  

1579년 훈련원 봉사(종8품) 때 병조정랑(정5품)인 서익(徐益)이 자기와 친한 사람을 차례를 뛰어넘어 참군(參軍, 정7품)으로 올리려 하자 이순신은 담당관으로서 허락하지 않았다. 병조정랑은 병조의 인사권 쥐고 있는 실력자였지만 이순신은 부당한 지시를 받지 않았다. 

1582년 1월 장군이 발포만호(종4품)로 근무하고 있을 때 서익이 군기경차관(국방부 군기검열단장)으로 발포 진영(고흥)을 찾았다. 그는 ‘군기보수불량!’이란 무고(誣告)로 이순신을 파직시켰다. 3년 전 이순신에게 인사청탁을 부탁했다가 거절당한 분풀이를 한 셈이다.  

이순신은 1582년 발포만호에서 파직되고 다시 훈련원에서 근무하게 됐다. 정승 유전(柳琠)은 이순신에게 좋은 화살통(箭筒)이 있다는 말을 듣고 그것을 자기에게 달라고 했다. 하지만 이순신은 “자칫 뇌물이 될 수 있다.”며 정중하게 거절했다. 

당시 그는 서익의 무고로 파직당한 뒤 훈련원 말단으로 복직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정승의 요구에 응한다면 정승에게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할 기회로 삼을 수 있었으나, 장군은 원칙을 고수했다. 

장군의 어릴 적 한성 건천동(마른내 골)에서 함께 자랐던 류성룡 대감이 이순신에게 다음과 같이 귀띔했다. “이조판서 율곡 이이(李珥)가 같은 성씨(덕수 이씨)인 자네를 한번 만나보길 원한다”는 것이었다. 

이순신은 이마저도 거절했다. “같은 성씨(덕수 이씨)여서 만날 수는 있지만 공직의 인사권을 가진 이조판서를 만날 수는 없다.”는 이유였다. 오늘날의 상식(?)으로 보면 이상한 처신이 아닐 수 없다.  

임진왜란 당시 전시 중에도 지방 관리들의 뇌물수수 등 부패는 끝이 없었다. 1594년 2월 16일 난중일기다.  

 수령즉엄악포계(守令則俺惡褒啓) 수령들은 뇌물 받고 비리 덮어주고 포상받게 해주었다. 
 기망천청지어차극(欺罔天廳至於此極) 국왕의 귀를 기망하니 이것이 극에 달했다.
 국사여시만무평정지리(國事如是萬無平定之理) 국사가 이러니 나라가 결코 편안할 수 없다. 
 앙옥이이(仰屋而已) 나는 그냥 천장만 바라볼 뿐이다.

오호 애재(哀哉)라!

22년 동안 무인으로서 장군의 삶은 원리원칙을 지켰다. 그렇다고 그가 벽창호(碧昌牛)처럼 고집이 세고 세상물정에 어두운 ‘깜깜이’라는 뜻은 아니다. 

극기복례(克己復禮)! 온갖 미혹에서 자신을 이기고, 길이 아니면 가지 않고 말이 아니면 듣지 않는, 인간본연에 다가가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랬기에 옳은 일에 자기 한 몸을 선뜻 바쳐 죽을 수 있는 살신성인(殺身成仁)을 할 수 있었다.  


<김동철 주필 약력>

- 교육학 박사
- 이순신 인성리더십 포럼 대표
- 성결대 파이데이아 칼리지 겸임교수
- 문화체육관광부 인생멘토 1기 (부모교육, 청소년상담)
- 전 중앙일보 기자, 전 월간중앙 기획위원
- 저서 : ‘이순신이 다시 쓰는 징비록’ ‘무너진 학교’ ‘밥상머리 부모교육’ ‘환생 이순신, 다시 쓰는 징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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