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경석의 길] 자연에서 삶으로 들어가는 길–제주 올레길
[정경석의 길] 자연에서 삶으로 들어가는 길–제주 올레길
  • 송지숙
  • 승인 2017.06.16 1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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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경석 여행작가

 

수백만 년 전이었을까? 아니면 그보다 오랜 수억 년 전이었을까? 큰 대륙의 줄기 같은 작은 대지에서 지각변동이 생겨 끝부분이 떨어져 나갔고 그 곳에서 거대한 화산이 터졌다. 붉게 녹은 바위들이 바다로 쏟아져 들어가고 거센 파도와 수억만 번 부딪혀 서로 필사적으로 방어하기를 반복한 후 결국 조물주도 감탄할 만한 예술품을 만들어 내었다. 그 여파로 360여 개의 작은 봉우리들이 생긴 것도 의도된 결과일 것이다.

여자들은 뜨거워진 불로 멸균되고 정화된 바닷속 깊이 들어가 고기를 잡고 어패류를 주워가며 생활했고, 남자들은 화산재가 변해 고운 흙으로 다져진 땅을 일구어 농사를 지었다. 그리고 종일 바다와 밭에서 일을 하기 위해 마을로 들고 나는 좁은 길을 올레라고 불렀다. 올레는 그들의 고된 삶을 대변하는 발자국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다. 

그 땅에서 태어난 한 여인이 먼 길을 떠났다. 스페인의 산티아고 까미노 800km. 그 거룩한 길에서 감동받고는 내 고향에도 이런 길을 만들어보자고 생각해 바닷가의 마을사람들이 다니던 길과 중간 중간 솟아 오른 오름들을 적절히 배분해 약 360km의 길을 산티아고 까미노풍으로 만들었다. 이 뜻 깊은 일에 제주의 민관군이 협력했고 ‘올레길’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올레꾼들은 마을 구석구석을 다니며 탑돌이를 하듯 등산화와 배낭을 메고 말을 형상화한 간세들과 파랗고 노란 이정표와 리본을 따라 길을 걸었다. 이들은 낯선 사람들끼리 여행 이야기로 어울릴 수 있는 저렴한 게스트하우스들을 좋아하며 제주도민들이 즐기는 맛집을 찾아다녔고, 장기 체류하며 제주의 매력에 흠뻑 빠졌다. 또한 도보여행자들뿐 만이 아니라 자전거로 여행하는 사람들도 부쩍 늘었다. 

대체적으로 올레길은 해변으로 코스가 편성되어 있지만 대개 코스마다 해변에 가까이 있는 오름을 하나 정도 포함하여 디자인을 했다. 계절마다 오름에 피어 있는 수많은 야생화와 가을이면 은빛 억새들의 군무 속에서 가슴을 펴고 바다를 보는 즐거움과 높은 곳에 올라가 산 아래 마을들을 바라보는 정겨움으로 걷는 육체의 고단함을 말끔하게 씻어내고 있다. 

▲ 제주도 올레길에 있는 간세 이정표.

 


제주도의 동쪽 성산일출봉 근처인 시흥초등학교에서 올레길 1코스가 시작되어 올레꾼들은 성산일출봉 방향으로 걷기 시작한다. 비록 성산일출봉으로 올라가는 코스는 올레길에 포함되어 있지 않지만 일출봉과 옥빛 바다를 보며 걷는 기분이 장쾌하다.

내륙으로 이어지는 2코스는 계절만 잘 맞추면 걷는 내내 끝없는 감귤밭을 지나게 되고 혹시 근처에 일하는 주민이나 무인판매대에서 귤을 아주 저렴한 가격에 푸짐하게 사서 간식으로 즐길 수 있다. 

굳이 올레길 3코스가 아니라도 가봐야 할 곳인 김영갑갤러리가 있는 두모악. 그는 바람과 찰나의 순간들을 사진으로 담았다. 루게릭병에 걸린 이후 죽기 전까지도 카메라의 셔터를 놓지 않고 제주도의 망부석이 되었다. 갤러리 안에 한참 머물며 묵상에 잠겨보는 것도 좋다.

표선에서 시작되는 4코스는 올레길 중 가장 긴 코스로 23km가 넘고 바닷가길이 지루하지만 걷는 내내 밀려오는 파도와 하얀 포말에 취할 수 있다. 내가 5코스와 6코스를 걸을 때는 비가 정말 많이 내렸다. 제주도의 특성상 올레길에서 비를 맞는 것은 각오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도 좋아하는 사람들과 같이 있으면 좋은 추억으로 남는다.

7코스와 8코스는 고급 호텔들과 국제회의장이 있어 관광객들이 올레길의 맛을 보기 위해 짧은 거리를 걷느라 유난히 사람이 많다. 특히 조금 불편하다 싶은 곳은 여지없이 나무데크로 덮어 놓아 걷기 불편한 사람들도 이곳을 찾는다. 날씨 좋은 날은 한라산 배경으로 멋진 사진도 가능하다.

▲ 제주 올레길 전경

 


둥근 모자 같은 산방산을 끼고 걷는 9코스를 걷고 탄산온천게스트하우스에 묵으면 온천 입장료는 무료다. 10코스에는 절벽 위의 송악산을 걸으며 멀리 가파도를 볼 수 있고 정상에서 승마체험도 가능하다.

제주도에만 존재하는 곶자왈이라는 이름의 야생의 숲이 있어 11코스 중간쯤에 평평하고 긴 숲길에 작은 나무들이 하늘을 가릴 정도로 우거져 있다. 12코스와 13코스는 내륙으로 걷는 코스라 조금 지루한 면도 있지만 저녁 즈음에는 아름다운 노을을 볼 수 있다. 

14코스가 시작되는 저지오름은 올레길의 오름 중 가장 경관이 뛰어난 곳이다. 멀리 한라산과 바다풍경이 360도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잠시 바다로 나와 한림항을 지나친 15코스에는 다시 내륙으로 들어가 시간대만 맞으면 선운정사에 들어가 점심공양을 할 수 있다.

16코스에 들어서면 크루즈를 타고 거대한 대양을 항해하는 듯한 기분이 들 정도로 바다풍경이 좋다. 17코스에는 바다가 아닌 하천으로 또 한 번 자연의 무한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발아래 제주항 터미널이 있는 18코스의 사라봉을 넘어 가면서 이런 곳이라면 아무리 걸어도 지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19코스부터 이어지는 은모래 해변길과 해수욕장은 젊은이들이 주로 찾는 곳으로 예쁜 카페가 많으니 커플들이 많고 이어지는 20코스와 21코스는 주로 바닷가를 걸으며 조용히 올레길을 마무리한다.

▲ 제주에서 이어지는 추자도 올레길.

 


올레길은 제주도의 인근 섬으로 이어진다. 우도와 가파도 그리고 추자도의 3개 번외 코스들이 있다. 우도는 관광객들이 많아 조금 불편하지만 추자도는 한적한 섬마을이 좋고 깎아지른 절벽에 길을 낸 나바론하늘길을 걸으면서 뉴질랜드 같은 외국에 나와 있는 듯 기분이 좋다.

무엇보다도 올레길의 장점은 야생의 자연을 여유롭게 즐길 수 있는 곳이다. 요즘은 지방으로 여행하는 것보다 저가항공을 이용해서 제주로 떠나는 비용이 훨씬 저렴한 것은 그만큼 인프라가 잘 되어 있기 때문이다. 뜨거운 여름이 오기 전에 제주로 날아가 걸어 보기를 권한다.

길을 걸으면 내가 보인다.

<정경석 프로필>

- 여행작가
- 저서
* 길을 걸으면 내가 보인다(2012)
* 산티아고 까미노 파라다이스(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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