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철칼럼] 이순신의 충효애민정신을 국민정신으로 승화하자
[김동철칼럼] 이순신의 충효애민정신을 국민정신으로 승화하자
  • 김동철
  • 승인 2017.04.28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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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동철 베이비타임즈 주필·교육학 박사 / ‘환생 이순신, 다시 쓰는 징비록’ 저자

 

충무공 이순신(李舜臣)은 1545년 음력 3월 8일 한양 건천동(지금의 충무로 명보아트홀 부근)에서 아버지 이정(李貞)과 어머니 초계 변씨(草溪 卞氏) 사이에 4형제 중 셋째로 태어났다. 아버지 이정은 고대 중국의 다섯 성군중 하나인 순(舜)임금에서 뛰어날 순(舜) 자를 빌려와 순신(舜臣)이라고 이름 지었다. 정말 그의 삶을 살펴보면 그는 ‘뛰어난 신하’였음을 알 수 있다.

3월 8일은 양력으로 4월 28일이 된다. 봄꽃이 만발하고 새들이 지저귀는 목멱산(木覓山 남산의 옛지명) 아래 마을에는 3살 터울 동네형인 서애 류성룡(柳成龍)이 필동(한옥마을)에 살았고 이순신과 수군통제사 자리를 놓고 싸웠던 악연의 원균(元均) 또한 이웃 형이었다. 우리에게 소설 ‘홍길동전(洪吉童傳)’ 저자로 유명한 허균(許筠)도 이곳 사람이다. 

이순신은 10대 때 어머니 고향인 충남 아산으로 거처를 옮긴 뒤 스물한 살 되던 해 전 보성군수 방진(方辰)의 무남독녀 외동딸과 결혼하면서 무관출신 장인의 권유로 무과시험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한 차례 낙방한 뒤 서른둘 나이에 여진족을 방어하는 함경도 동구비보 권관(종9품)으로 출발했다. 

십대 때 서당에서 공부한 사서삼경(四書三經) 덕에 그는 훗날 ‘한산도가’ 같은 주옥같은 27편의 진중음(陣中吟)을 남겼다. 또 난중일기(亂中日記), 임진장초(壬辰狀草), 서간첩(書簡帖) 등 전쟁문학기록물(국보 제76호)은 그에게 문재(文才)가 탁월하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난중일기는 2013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기도 했다. 그는 이렇듯 문무겸전(文武兼全)을 두루 갖춘 인재였다.  

마침 대한민국은 5월 9일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대권에 도전하는 사람들의 출사표(出師表)가 속속 드러나고 있다. 과거 적폐청산과 미래 통합이라는 키워드는 거의 공통적인데,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들의 힘겨루기와 북핵 등으로 발등에 불이 떨어진 화급한 대한민국의 안보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방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마치 망조(亡兆)가 든 구한말 상황을 연상시키는 기시감이 어른거린다.

무릇 국가 지도자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존하는 강한 울타리를 만들어서 경세제민(經世濟民)으로 백성의 먹거리를 해결하고 눈물을 닦아주어야 할 것이다. 이런 바람 앞의 촛불 상황에서 400여년 일본군의 기습침략으로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처했을 때 전라좌수사(정3품)로, 또 3도 수군통제사(종2품)로서 나라와 백성을 지켜낸 충무공 이순신의 살신성인 정신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게 그리워진다.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14개월 전인 1591년 2월 13일 이순신은 정읍현감(종6품)에서 무려 7단계나 뛰어올라 전라좌도수군절도사(정3품)로 여수 좌수영 본영에 부임했다. 

그는 부임하자마자 관할 5관 5포의 군사훈련, 군기, 군량, 군선 등 전투준비태세를 엄격한 신상필벌의 자세로 점검했다. 이곳 수장들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7년 내내 이순신과 함께 동고동락하며 전투에 참여했다. 전라좌수영은 그래서 ‘구국(救國)의 성지(聖地)’라고 불린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바로 하루 전인 1592년 4월 12일 난중일기에는 “거북선에서 지자, 현자총통을 시험 발사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의 유비무환 정신을 엿볼 수 있다. 

4월 13일 왜군 1군대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1만 8천여명이 부산포에 기습상륙하자 경상좌도수군절도사 박홍(朴泓)과 경상우도수군절도사 원균(元均)은 중과부적임을 깨닫고 각 진의 병선(兵船)을 바다에 침몰시키고 총통을 땅에 파묻은 뒤 허겁지겁 줄행랑을 쳤다. 이른바 청야(淸野) 작전이었다. 원균은 화급하게 전라좌수사인 이순신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이순신은 조정의 출전명령을 받은 뒤 5월 7일 본영인 여수 앞바다에서 판옥선(板屋船) 24척, 협선(挾船) 15척, 포작선(鮑作船 고기잡이 어선) 46척 등 85척에다 고성 당포 앞바다에서 기다리던 원균의 판옥선 4척, 협선 2척과 합세해 거제도 옥포에서 첫 해전을 벌여 도도 다카도라(藤堂高虎)가 지휘하는 왜선 30여 척 가운데 26척을 일시에 분멸시켜 서전(緖戰)을 승리로 장식했다. 이날은 선조의 피난행렬이 개성을 거쳐 평양성에 입성한 날이다.    

물령망동(勿令妄動) 정중여산(靜重如山)! 이순신은 휘하 장졸들에게 “허튼 행동을 일체 하지 말고 산처럼 무겁고 신중하게 대처하라”고 명령했다. 

5월 말에야 이순신의 승첩을 접한 선조는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이순신의 전공을 높이 사서 가선대부(嘉善大夫 종2품 하계)의 품계를 내렸다. 

이어 이순신은 제2차 출동을 감행, 5월 29일 사천해전에 ‘바다의 탱크’인 거북선을 처음으로 출격시켜 직충술(直衝術)로 적진을 교란시켰고 판옥선에서 천자, 지자, 현자, 황자 등 총통을 방포함으로써 적선을 격파해나갔다. 그 와중에 이순신은 왜군의 조총에 맞아 관통상으로 한동안 고생을 심하게 했다. 

이어 당포, 당항포, 율포해전에서 적선 67척을 격침시키는 등 연승행진을 거듭했다. 6월 22일 의주에 도착한 선조는 제2차 출동의 승첩을 받고 매우 기뻐했다. 이에 자헌대부(資憲大夫 정2품 하계)로 올리는 유서(諭書)를 내려 보냈다. 

7월 7일 당포에 머물 때 목동 김천손(金千孫)으로부터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가 이끄는 73척(대선 36척, 중선 24척, 소선 13척)의 일본함대가 거제 견내량(見乃梁)에 정박해 있다는 정보를 접했다. 

이순신은 전라우수사 이억기(李億祺) 함대와 합세해 전선 48척, 노량에서 경상우수사 원균의 전선 7척을 합쳐 도합 55척의 명실상부한 조선 수군연합함대를 갖추고 73척의 왜수군 함대를 맞아 47척을 불사르고 12척을 나포하는 대승을 거뒀다. 

이 7월 8일 한산대첩에서 이순신은 육전에서 쓰던 학익진(鶴翼陣) 전술을 해상작전에 응용했고 거북선을 맨 앞에 배치해 돌격전을 감행한 결과, 훗날 세계 해전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됐다. 이순신은 그 공으로 정헌대부(正憲大夫 정2품 상계), 이억기와 원균은 가의대부(嘉義大夫 종2품 상계)로 승서(陞敍)되었다. 

자신감을 얻은 이순신 수군은 제4차 출전에 나서 9월 1일 부산포의 왜군 본진을 공격해 120여척의 적선을 분멸시켰다. 이와 같이 이순신은 임진왜란 첫해인 1592년 4차례 출전을 감행, 남해안의 제해권을 장악함으로써 일본군의 서해진출을 막아 한성과 평양, 의주로의 상륙을 불허했다.    

이순신은 다음해인 1593년 7월 15일 경상도 지역인 한산도로 수군진을 전진 배치했다. 8월 15일에는 선조로부터 전라좌수사 겸 삼도수군통제사(종2품)의 임명교지를 받았다. 한산도에 객사인 운주당(運籌堂 후에 제승당이 됨)을 짓고 왜병(倭兵)을 깨뜨리는 전략을 짰으며 군사에 관한한 상하의 의견을 모두 듣는 소통의 장소로 만들었다. 

정유재란 때인 1597년 2월 26일에는 선발장수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왜수군을 저지하지 않았다는 누명을 쓰고 한양으로 압송될 때까지 3년 7개월 동안 한산도 진영을 지켰다.

1594~1596년 명나라와 일본의 강화협상으로 전쟁이 교착국면에 빠지자 명 황제 선유도사 담종인(譚宗仁)은 이순신에게 “왜군을 치지 말고, 조선 수군은 모두 고향으로 돌려보내라”는 명령을 보내왔다. 이에 이순신은 “고향이 바로 왜군이 주둔한 곳인데 어찌 다른 고향이 있을 수 있느냐”는 반박문을 보냈다. 

전투가 뜸해진 틈을 타서 이순신은 한산도에서 진중 무과시험을 실시했고, 남해안 곳곳에서 피난민을 활용한 둔전(屯田)을 일궜으며 염전경영과 고기잡이를 해서 피난민과 군사들의 먹거리를 자급자족했다.

충무공 이순신의 나라사랑 충심(忠心)과 부모사랑 효심(孝心 여수 자당 기거지 마련, 난중일기 107회 언급) 및 피난민과 군사들의 먹거리를 자체적으로 해결했던 애민(愛民) 정신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마침 국토부는 남해안 광역관광 활성화 발전방안으로 거제, 통영 한산도, 하동, 남해, 여수, 순천, 광양, 고흥 등을 잇는 483km의 해양뱃길을 만들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이 뱃길은 이순신 장군의 23전 23승의 전적지(戰迹地)이자 유허지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곳이다. 이순신 스토리텔링 콘텐츠를 적극 개발해서 국내외 관광객들에게 널리 알려주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 

<김동철 주필 약력>

- 교육학 박사
- 이순신 인성리더십 포럼 대표
- 성결대 파이데이아 칼리지 겸임교수
- 문화체육관광부 인생멘토 1기 (부모교육, 청소년상담)
- 전 중앙일보 기자, 전 월간중앙 기획위원
- 저서 : ‘이순신이 다시 쓰는 징비록’ ‘무너진 학교’ ‘밥상머리 부모교육’ ‘환생 이순신, 다시 쓰는 징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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