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철칼럼]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사옵니다”
[김동철칼럼]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사옵니다”
  • 김동철
  • 승인 2017.02.16 1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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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동철 베이비타임즈 주필·교육학 박사 / ‘환생 이순신, 다시 쓰는 징비록’ 저자

 

1597년 9월 16일(양력 10월 28일) 명량(鳴梁)해전이 전라도 남쪽 바다 끝 해남과 진도 사이 울돌목에서 벌어졌다. 아군의 상황은 미미하기 이를 데 없었다. 바로 두 달 전 원균(元均)이 지휘하던 조선수군 함대가 거제도 칠천량 해전에서 궤멸되었기 때문이었다.

이순신 장군은 칠천량 해전에 참전했다가 도망친 경상우수사 배설(裴楔)이 숨겨놓았던 판옥선 12척을 8월 19일 회령포에서 찾아냈다. 그리고 또 한 척을 보태서 도합 13척의 판옥선을 끌어 모을 수 있었다.

칠천량 해전에서 패한 패잔병들은 왜군이 다시 쳐들어온다는데 공포감을 가지고 있었다. 전쟁공포증, 이른바 워 포비아(war phobia)에 사로잡힌 군졸들은 싸우기도 전에 ‘백전백패’라며 낙담하고 있었다. 배설은 해남 전라우수영에 도착하자마자 몸이 아프다면서 배에서 내려 곧바로 도망쳤으니 군기가 땅에 떨어졌음을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

장군은 7월 18일 백의종군의 몸으로 도원수 권율(權慄) 진영인 초계에 머무르고 있을 때 원균(元均)이 칠천량 해전에서 궤멸 당했다는 청천벽력(靑天霹靂)같은 소식을 들어야 했다. 그러자 선조는 또다시 장군을 부랴부랴 찾았다.

8월 3일 아침 일찍 선전관 양호(梁護)가 삼도수군통제사 재임명 교지와 선조의 편지를 가지고 왔다. 

 “그대의 직함을 갈고 그대로 하여금 백의종군하도록 하였던 것은 역시 이 사람의 모책이 어질지 못함에서 생긴 일이었거니와 그리하여 오늘 이 같이 패전의 욕됨을 만나게 된 것이라 무슨 할 말이 있으리오.”

선조와 조정은 풍전등화, 누란(累卵)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비책으로 이순신을 다시 기용할 수밖에 없었다.

장군은 교지에 사은숙배(謝恩肅拜)하고 직함 외에 아무것도 없는 3도 수군통제사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곧바로 길을 나섰다. 왜군은 남원성을 공격하기 위해 섬진강을 따라 구례까지 올라왔다. 다행히 단 하루 차이로 장군과 조우(遭遇)는 없었다.

군량과 화살, 총통 등 군기 및 병사를 모으려 남행(南行)할 때 이전에 휘하에 있던 수군장수와 지방관들이 장군을 만나러 왔다. 그런데 8월 15일 보성군에서 선전관 박천봉(朴天鳳)이 가져온 선조의 편지에는 “지난 칠천량 해전에서 패한 결과로 해전이 불가능할 경우 육지에 올라 도원수 권율(權慄)을 돕도록 하라.”는 명이 있었다.

수군을 폐지하려는 선조의 변화무쌍한 변심(變心)에 장군은 화급히 장계를 올렸다. 

금신전선 상유십이(今臣戰船 尙有十二)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전선이 있사옵니다.
전선수과 (戰船雖寡) 전선의 수가 절대 부족하지만
미신불사즉 (微臣不死則) 보잘 것 없는 신이 살아 있는 한
불감모아의 (不敢侮我矣) 감히 적은 조선의 바다를 넘보지 못할 것입니다.

일편단심, 우국충정을 담은 장군의 비범한 의지를 담은 위의 글은 ‘금신전선 상유십이(今臣戰船 尙有十二), 출사력거전즉 유가위야(出死力拒戰則 猶可爲也)’, ‘죽을힘을 다해 싸운다면 오히려 승산이 있습니다’로 해석되기도 한다.  

13척의 전선으로 133척의 일본 수군 함대를 막아냈다는 믿을 수 없는 기적이자 신화(神話)이다. 물목이 좁고 험한 울돌목을 이용한 장군의 선승구전(先勝求戰) 전략이 먹혔기 때문이었다.

며칠 사이에 왜 수군이 나타났다는 소식을 들은 장졸들은 동요하고 있었다. 아니 장군마저도 중과부적의 절체절명의 상황을 어떻게 대비해야할까를 놓고 고심하고 또 고민했을 것이다.

이때 장군은 장졸들에게 “병법에서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必死卽生, 必生卽死)’고 했다. 또 ‘한 명이 길목을 지키면 천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一夫當逕, 足懼千夫)’고 했는데, 이는 오늘의 우리를 두고 하는 말이다. 너희 장수들이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긴다면 즉시 군율로 다스려 한 치도 용서치 않을 것.”이라며 거듭 엄하게 약속했다. 중과부적의 상황에서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음을 알고는 배수진(背水陣)을 친 것이다.

장군의 주특기인 탐망 정보전은 곧 선승구전(先勝求戰)의 환경을 만들었다.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불태(百戰不殆)!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

원균을 칠천량에서 궤멸시킨 일본수군은 그 여세를 몰아 조선수군의 씨를 말리려고 전라도 끝까지 총력전으로 밀고 들어왔다. 이순신 장군이 확보한 전선은 판옥선 13척과 초탐선(哨探船) 32척이 전부였다. 나중에 민간 어선 100여척이 후방에서 지원세력처럼 가장하고 나타났다. 이른바 군세를 과시하는 의병(疑兵) 전술이다. 

9월 16일 이른 아침 와키자카 야스히로(脇坂安治), 가토 요시아키(加藤嘉明), 도도 다카도라(藤堂高虎), 쿠루시마 미치후사(來島通總) 등 내로라하는 쟁쟁한 일본 수군장수들이 이끄는  함대 300여 척이 명량 협수로로 접근했다.

여기에 혼슈(本州) 남부 제1 항로인 세토내해(內海) 지역을 장악한 전국 다이묘(戰國大名)인 모리 테루모토(毛利輝元)도 참전했다. 모리는 임진왜란 때 제7군(직속 병력 3만명) 대장으로 참전했다가 정유재란 때 또 다시 바다를 건너왔다.

일본 수군은 선발대 31척을 먼저 보냈다. 명량수로는 길이가 약 2km, 가장 좁은 곳은 폭이 300m, 최저수심은 1.9m, 시속은 11노트(초속 6m)로 장군은 지형지세와 조류를 이용해서 진을 쳤다.

10대 1의 초라한 전력인 이순신 함대의 맨 앞에는 기함인 이순신 장군이 위치했다. 장군은 태산 같은 자세로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가장 먼저 맞서 싸웠다. 동시에 부하들을 향해 다음과 같이 독려했다. 

 “적선이 비록 많기는 하지만 곧바로 덤벼들기는 어렵다. 조금도 흔들리지 말고 마음과 힘을 다해서 적을 쏘고 또 살아라!”

그러나 장군의 당부에도 불구하고 장수들은 공포에 떨며 도망칠 생각만 하고 있었다. 선봉에 선 대장선이 포위를 당하는데도 겁을 먹은 장수들이 1마장(약 450m) 뒤쪽에서 관망하고 있었다.

그래서 장군은 나각(螺角)을 불게하고 중군선에 명령을 내리는 대장기와 함대를 부르는 초요기(招搖旗)를 올리는 깃발신호로 적진을 향해 진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제야 거제현령 안위(安衛)와 중군장(中軍將)인 미조항 첨사 김응함(金應緘)의 배가 다가왔다. 

 “안위야, 군법에 죽고 싶으냐? 도망가서 산다면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또한 김응함을 불러 말했다. 

 “너는 중군(中軍)인데도 멀리 피해 대장(大將)을 구하지 않으니 그 죄를 어떻게 면할 수 있겠느냐? 당장 처형하고 싶지만 적의 상황이 또한 급하니 일단 공을 세우라.”

이리하여 두 전선이 먼저 적진으로 쳐들어가자 적장이 휘하 배 2척에 명령을 내려 안위의 배에 개미처럼 달라붙어 앞 다투어 기어 올라가도록 했다. 이에 맞서 안위와 배위의 수군들은 사력을 다해 몽둥이와 긴 창 혹은 수마석(水磨石)으로 정신없이 적들을 내리쳤다.

수군들의 힘이 다해갈 무렵 장군은 뱃머리를 돌려 곧바로 20문의 천자총통(사정거리 약 900보, 약 1km)을 우레와 같이 연이어 발사하고 불화살을 빗발치듯 쏘아 적의 배를 하나 둘씩 분멸시켜 나갔다. 검푸른 바다는 타오르는 불꽃, 검은 연기와 매캐한 화약 냄새 및 양쪽 함성으로 뒤덮여 아비규환을 방불케 했다.

적선 3척이 거의 뒤집어졌을 때 녹도 만호 송여종(宋汝悰)과 평산포 대장 정응두의 전선이 합류하여 가세했다. 일자진(一字陣)을 편 조선수군이 천자, 지자총통을 연이어 작열시키자 왜군 아타케부네(安宅船)와 세키부네(關船)는 맥없이 격파됐다.

불화살을 맞은 일본 군선은 분멸되었고 일본군들은 추풍낙엽처럼 바다로 떨어졌다. 조선수군이 강했던 것은 판옥선에 총통을 싣고 화력을 집중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선수군은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을 비롯 전라우수사 김억추, 미조항첨사 김응함, 녹도만호 송여종, 영등포만호 조계종, 강진현감 이극신, 거제현령 안위, 평산포대장 정응두, 순천감목관 김탁 등 1,000여명이었고 일본수군은 도도 다카도라, 가토 요시아키, 와키자카 야스하루, 구루시마 미치우사 등 1만4,000여명이었다.

3시간 정도 치열한 접전이 펼쳐진 뒤 왜 군선 31척이 모두 격파되었다. 이때 대장선에 타고 있던 준사(俊沙)라는 항왜(降倭 항복한 왜군)가 바다에 빠진 적장을 가리키며 “저자가 마다시(馬多時)!”라고 소리쳤다.

준사는 안골포 해전 때 투항해 일본수군장을 잘 알고 있었다. 마다시는 안골포 해전에서 적장이었던 쿠루시마 미치후사였다. 이순신 장군은 김돌손을 시켜 쿠루시마를 갈고리로 끌어올려 목을 친 뒤 뱃머리에 효수했다.

이를 본 일본군은 우왕좌왕하며 전의(戰意)를 상실해갔다. 이 전투에서 도도 다카도라는 중상을 입었고 모리 테루모토는 바다에 빠졌으나 가까스로 구조되었다. 죽거나 다친 왜군은 8,000여명에 이르렀다. 완벽한 조선수군의 승리였다.   
 
이날 왜수군은 오전 6시30분 정조(停潮)때 발진했다. 조선수군은 9시 밀물 때 출전했다. 10시 10분 최대 유속은 4m/s였다. 10시 30분 왜수군의 공세가 시작됐고 12시 21분 정조가 되었다. 13시 쯤 썰물, 조류가 남동류로 바뀌자 조선수군에 유리한 형세가 되었다. 이때 총공세를 폈다.

14시40분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고 16시30분 조류에 휩쓸린 일본수군이 후퇴하기 시작했다. 조선수군은 18시30분 추격을 중지하고 18시56분 다시 정조를 맞았다. 19시에는 당사도로 후진했다. 부유물로 어지럽던 바다는 이내 고요해졌다. 천우신조의 도움으로 일본수군 함대 300여척은 모두 격퇴되었고 다시는 이곳에 나타나지 못했다. 

 “천행천행(天幸天幸), 차실천행(此實天幸)이다.” 이순신 장군은 그렇게 난중일기에 썼다.

요즘 대한민국의 운명을 결정짓는 선거철을 맞아 대선전에 뛰어든 잠룡들은 언필칭(言必稱) ‘금신전선 상유십이’를 입에 달고 사는 것 같다. 그런데 잠룡들이 머릿속에서 계산하는 것과 이순신 장군이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상황에서 나라와 백성이라는 대의를 위해 한판 승부를 벌인 것은 엄연한 차이가 있을 것이다.

나는 한반도 땅 끝 해남에서, 또 진도대교 건너 이순신장군전첩비가 세워진 벽파진 언덕에서 울돌목을 바라다보았다. 흰 거품의 거센 소용돌이 물길은 여전히 변함없지만 400여년 전 이순신 장군의 고군분투 상황을 떠올리니 그 처연함을 느낄 수 있었다.

서해와 남해의 바닷물이 만나는 명량은 물 우는 소리가 20리 바깥까지 들렸다고 한다. 맥주 거품처럼 치솟는 저 울돌의 물결 울음은 그 옛날 함성을 들려주는 듯하다. 명량의 물은 오늘도 여전하건만 사람들은 자기 잇속에 따라 금신전선 상유십이를 말끝마다 입에 달고 다닌다. 누군가 닦아놓은 그 길을 제발 훼손시키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마침 눈이 많이 내렸다. 임진왜란 때 승군장(僧軍將)으로 활약했고 전란 후 포로 송환 차 일본을 방문했던 서산대사(西山大師 1520~1604)의 선시가 떠올랐다. 

 답설야중거(踏雪野中去) 
 눈 내린 들판을 밟아갈 적에는
 불수호란행(不須胡亂行)
 그 발걸음을 어지러이 걷지 말라
 금일아행적(今日我行跡)
 오늘 걸어가는 나의 발자국은
 수작후인정(遂作後人程)
 뒤에 오는 사람의 이정표가 되리니

<김동철 주필 약력>

- 교육학 박사
- 이순신 인성리더십 포럼 대표
- 성결대 파이데이아 칼리지 겸임교수
- 문화체육관광부 인생멘토 1기 (부모교육, 청소년상담)
- 전 중앙일보 기자, 전 월간중앙 기획위원
- 저서 : ‘이순신이 다시 쓰는 징비록’ ‘무너진 학교’ ‘밥상머리 부모교육’ ‘환생 이순신, 다시 쓰는 징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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