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철칼럼] 여수의 충무공, 통영의 충무공, Admiral Yi Soon Shin
[김동철칼럼] 여수의 충무공, 통영의 충무공, Admiral Yi Soon Shin
  • 김동철
  • 승인 2017.01.24 12:04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김동철 베이비타임즈 주필·교육학 박사 / ‘환생 이순신, 다시 쓰는 징비록’ 저자

 

1591년 2월 13일 이순신(李舜臣)은 정읍현감(종6품)에서 무려 7단계나 뛰어올라 전라좌도수군절도사(정3품)로 영전해 여수 좌수영 본영인 진해루(鎭海樓)에 부임했다.
 
오늘날 여수의 진남관(鎭南館 국보 제304호)은 임진왜란이 끝난 다음해인 1599년 4대 통제사 겸 전라좌수사인 이시언(李時彦)이 정유재란 때 불에 탄 진해루 자리에 다시 지은 것이다.

이순신 제독은 전라좌수사로 부임한 뒤 관할 5관 5포의 군사훈련, 군기, 군량, 군선 등 전투준비태세를 점검했다. 5관은 지금의 5개 지자체인 여수, 순천, 광양, 흥양(고흥), 보성이고 5포는 수군진으로 여수 방답진과 고흥 사도진, 여도진, 녹도진, 발포진이다.

이곳 수장들은 임진왜란-정유재란 7년 내내 이순신 제독과 함께 동고동락하며 전투에 참여했다. 전라좌수영은 그래서 구국(救國)의 성지(聖地)라고 불린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바로 하루 전인 1592년 4월 12일 난중일기에는 “거북선에서 지자, 현자총통을 발사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4월 13일 왜군 1군대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1만 8천여 명이 부산포에 기습상륙하자 경상좌도수군절도사 박홍(朴泓)과 경상우도수군절도사 원균(元均)은 각 진의 병선(兵船)을 바다에 침몰시키고 총통을 땅에 파묻은 뒤 허겁지겁 줄행랑을 쳤다.

이른바 청야(淸野) 작전이다. 원균은 화급하게 이순신 제독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이순신 제독은 여수 진해루에서 휘하 장수들과 함께 ‘경상도(慶尙道) 부원(赴援)’, 즉 경상도로 진출해 도와주는 문제에 대해 토론한 뒤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때 녹도 만호 정운(鄭運)과 군관 송희립(宋希立)이 “적을 토벌하는데 우리 도(道)와 남의 도(道)가 따로 있느냐. 당장 나아가자.”고 역설하자, 이순신 제독은 조정의 출전명령을 받은 뒤 5월 7일 거제도로 진출, 옥포에서 첫 해전을 벌여 서전(緖戰)을 승리로 장식했다.

이날은 선조의 피난행렬이 개성을 거쳐 평양성에 입성한 날이다. 이순신 함대는 본영인 여수 앞바다에서 판옥선(板屋船) 24척, 협선(挾船) 15척, 포작선(鮑作船 고기잡이 어선) 46척 등 모두 85척으로 출전했다. 고성 당포 앞바다에서 원균의 판옥선 4척, 협선 2척과 합세했다.

물령망동(勿令妄動) 정중여산(靜重如山)! 이순신 제독은 휘하 장졸들에게 “허튼 행동을 일체 하지 말고 산처럼 무겁고 신중하게 대처하라.”고 명령했다.  

이때 옥포에는 도도 다카도라(藤堂高虎)가 지휘하는 왜선 30여 척이 홍백기를 달고 해안에 있었고, 왜적들은 상륙해 민가의 재물을 노략질하고 있었다. 조선 수군의 천자, 지자, 현자, 황자총통이 일제히 불을 뿜었고 불화살은 우레와 같이 날아가 왜선 26척을 순식간에 분멸시켰다.

또 달아나는 왜적을 추격해 거제 장목면 영등포(永登浦)를 거쳐 창원 합포(合浦)에서 5척, 다음 날 고성 적진포(赤珍浦)에서 11척을 각각 불태우고 9일 전라좌수영 본영인 여수로 돌아왔다. 제1차 출동에서 적의 함선 44척을 격침 또는 분멸시킨 것이다.

5월 말에야 이순신의 승첩을 접한 선조는 이 전공으로 이순신에게 가선대부(嘉善大夫 종2품 둘째등급)의 품계를 내렸다.

이어 이순신 제독은 제2차 출동을 감행, 5월 29일 거북선을 사천해전에 처음으로 출격시켜 적진을 교란시키며 닥치는 대로 적선을 격파했다. 그 와중에 제독은 왜군의 조총에 맞아 관통상을 당했다.

이어 당포, 당항포, 율포해전에서 적선 67척을 격침시키는 등 연승행진을 했다. 6월 22일 의주에 도착한 선조는 제2차 출동의 승첩을 받고 매우 기뻐했다. 이에 자헌대부(資憲大夫 정2품 하계)로 올리는 유서(諭書)를 내려 보냈다.  

한껏 승기가 오른 이순신 제독은 여세를 몰아 제3차 출동을 했다. 7월 7일 당포에 머물 때 목동 김천손(金千孫)으로부터 일본의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가 함대 73척(대선 36척, 중선 24척, 소선 13척)을 이끌고 거제 견내량(見乃梁)에 정박해 있다는 정보를 접했다.

바로 후방에는 해적출신 구키 요시다카(九鬼嘉隆), 가토 요시아키(加藤嘉明) 등 후속 함대가 대기하고 있었다.

이순신 제독은 전라우수사 이억기(李億祺) 함대와 합세해 전선 48척, 노량에서 경상우수사 원균의 전선 7척을 합쳐 도합 55척의 조선 수군연합함대를 갖추고 왜수군장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73척을 맞아 47척을 불사르고 12척을 나포하는 대승을 거뒀다.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패잔선 14척을 이끌고 김해방면으로 꽁무니를 뺐다. 남겨진 왜병 400여 명은 당황하여 한산섬으로 상륙했다가 먹을 것이 없자 뗏목을 만들어 뒷날 겨우 탈출했다.

마나베 사마노조(眞鍋左馬允)는 이때 자신의 아타게 부네(安宅船)가 소각되자 섬에서 할복하였다. 이 7월 8일의 한산대첩은 육전에서 쓰는 학익진(鶴翼陣) 전술을 해상작전에 응용한 것으로 세계 해전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다.

한산대첩은 도원수 권율(權慄)의 행주대첩, 진주목사 김시민(金時敏)의 진주성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 대첩의 하나로 꼽힌다. 이순신 제독은 그 공으로 정헌대부(正憲大夫 정2품 상계), 이억기와 원균은 가의대부(嘉義大夫 종2품 상계)로 승서(陞敍)되었다.

이순신 제독은 제4차 출전에 나서 9월 1일 부산포의 왜군 본진을 공격해 120여척의 적선을 분멸시켰다. 이와 같이 이순신 제독은 임진왜란 첫해인 1592년 4차례 출전을 감행, 남해안의 제해권을 장악함으로써 여수의 전라좌수영은 연전연승을 기록한 전략기지가 되었다.

이순신 제독은 다음해인 1593년 7월 15일 경상도 지역인 한산도로 진을 전진 배치했다. 8월 15일에는 선조로부터 전라좌수사 겸 삼도수군통제사(종2품)의 임명교지를 받았다.

한산도에 객사인 운주당(運籌堂 후에 제승당이 됨)을 짓고 왜병(倭兵)을 깨뜨리는 전략을 짰으며 군사에 관한한 상하의 의견을 모두 듣는 소통의 장소로 만들었다. 1597년 2월 26일 한양으로 압송될 때까지 3년 7개월 동안 한산도 진영에서 삼군통제사로서 근무했다.

사실 이 기간은 명-일간 강화협상 시기로 전쟁이 소강상태였기에 웅포, 당항포, 장문포 수륙합동작전을 빼놓고 이렇다 할 큰 전투는 없었다. 이 동안 이순신 제독은 한산도에서 진중 무과를 실시했고, 남해안 곳곳에서 피난민을 활용한 둔전(屯田)을 일궜으며 염전과 고기잡이를 해서 군량의 자급자족 체계를 세웠다.

현재 통영의 세병관(洗兵館 국보 제305호)은 임진왜란이 끝난 뒤 1605년 6대 통제사겸 경상우도수군절도사 이경준(李慶濬)이 지은 것으로 이순신 제독은 아쉽게도 이곳을 밟지 못했다.

필자는 400여년 전 이런 역사적 배경을 가진 남해안 전적지를 수년째 취재를 하면서 한 가지 풀리지 않는 의문점을 가지게 되었다. ‘여수와 통영은 왜 이순신 제독을 자신들의 울타리 안에 가둬두고 있는가?’하는 것이었다. 

또 이순신 제독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서울, 아산, 부산, 사천, 고성, 진해, 명량대첩의 해남과 진도군, 최후의 노량해전 현장인 하동과 남해군 등지에서도 이순신 제독은 각 지자체에 의해 ‘쪼개진 군신(軍神)’으로 존재했다.

통영의 문화마당에는 3척의 거북선(한강, 통제영, 전라좌수영)이 바다위에 떠있다. 그런데 2012년 제작된 통제영 거북선 지붕에는 못과 칼 등 철침(鐵針)이 없는 밋밋한 판자 형태로 관광객을 맞고 있다. 거북선의 특징이 사라진 거북선을 보면서 고개가 갸우뚱해졌다.  

이순신 제독은 여수와 통영을 훨씬 넘어서는 세계 해전사에 빛나는 이름이다. Admiral Yi Soon Shin, 이제 그의 살신성인의 리더십을 국민 리더십으로 승화시키는 현창작업을 서둘러야 할 때이다.

<김동철 주필 약력>


- 교육학 박사
- 이순신 인성리더십 포럼 대표
- 성결대 파이데이아 칼리지 겸임교수
- 문화체육관광부 인생멘토 1기 (부모교육, 청소년상담)
- 전 중앙일보 기자, 전 월간중앙 기획위원
- 저서 : ‘이순신이 다시 쓰는 징비록’ ‘무너진 학교’ ‘밥상머리 부모교육’ ‘환생 이순신, 다시 쓰는 징비록’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