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화칼럼] ‘묻지마 범죄’와 조현병
[김영화칼럼] ‘묻지마 범죄’와 조현병
  • 온라인팀
  • 승인 2016.06.15 2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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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화 강동소아청소년정신건강의학과 원장

 

“선생님 이건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비밀인데요, 선생님만 알고 계셔야 해요. 사실 저는 전직 대통령이 숨겨둔 딸이랍니다. 북한의 남파 공작원들이 나를 해칠까봐 신분을 감추고 살고 있어요.”

누가 엿듣기라도 하듯 속삭이는 낮은 목소리로 이런 말을 해준 사람은 제가 정신과 전문의가 되어 병동에서 만난 정신분열증 환자였습니다. 30년이 지난 지금은 아무리 피해의식이 많은 환자라고 해도 대통령 딸이나 간첩을 이야기하는 환자를 만나기는 어렵습니다.

저는 그 환자를 통해 당시의 사회구성원들이 함께 생각하고 두려워하는 내용이 환자의 무의식에서 피해망상의 주제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환자의 망상도 그 사회의 영향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정신분열증은 2011년부터 조현병이라 불립니다. 환자의 상태가 조율되지 못한 현악기의 불협화음과 비슷하여 ‘조현(調絃)’이란 표현을 쓰기로 한 것입니다.

지난달 17일 강남역 인근 화장실에서 발생한 여성 살인 사건은 조현병 환자에 의한 ‘묻지마 범죄’인 것으로 판명됐습니다. 

강남역 사건의 피의자이자 조현병 환자인 김씨는 “여자들이 나를 무시하고 괴롭혔다”, “나에게 담배꽁초를 던지고 나를 지각하게 만들었다”고 하면서 여성에 대한 상당한 피해의식을 드러냈습니다. 

하지만 조현병 환자가 “누군가 나를 해치려 한다”는 망상으로 ‘묻지마 범죄’를 쉽게 일으키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조현병 환자들은 일반인에 비해 범죄율이 낮게 나타납니다. 개중에는 병과 싸우면서 뛰어난 업적을 이룬 사람들도 있습니다.

정신분열증에 시달리면서도 수학과 경제학에서 뛰어난 업적을 이룩하여 게임이론으로 1994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천재 수학자인 존 내쉬가 그런 경우입니다. 내쉬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뷰티풀 마인드’는 2002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4개 부문을 석권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습니다. 

천재 작가인 ‘버지니아 울프’도 마찬가지입니다. 20세기 영국 작가인 그녀는 평생 심한 신경쇠약과 우울증에 시달려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했지만 투병 중에서도 모더니즘의 시조라 할 만큼 독창적이고 통찰력 넘치는 글들을 많이 남겼습니다. 

조현병은 청소년기에 발병된다

조현병의 가장 큰 특징은 현실감을 잃고 본인이 만든 상상의 세계인 망상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상상을 합니다. 상상하고 공상하며 이야기를 꾸며내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놀이입니다.

하지만 TV에서 내 이야기를 한다고 생각하거나, 사람들이 자신의 행동을 엿보기 위해 가는 곳마다 감시 카메라를 설치했다고 믿는 것은 가상의 세상에서 상상놀이를 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조현병은 심각한 뇌장애입니다. 조현병이 가장 흔하게 나타나는 시기는 15세에서 35세 사이고 특히 청소년기에 많이 나타납니다. 청소년기는 아동기를 거쳐 성인이 되는 또 다른 세상을 맞이하는 시기인데, 이 새로운 세상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현실감을 상실하면 조현병이 생깁니다.

청소년기의 조현병은 매우 극적이고 갑작스럽게 나타납니다. 조현병이 있는 청소년들은 이런 망상과 환청이 있는 상태를 두려워하고 혼란스러워 합니다. 머릿속에서 들리는 환청을 통제하지 못하기 때문에 극심한 고통을 느끼는 경우도 많습니다. 

뇌에서 너무 많이 분비되는 도파민이 원인

지금은 보기 어렵지만 20년 전 만해도 조현병은 귀신들린 병이라며 치유를 위해 용한 무당을 찾아 굿을 했다고 하는 환자들이 있었습니다. 조현병은 귀신들린 병이 아니라 심각한 뇌기능 장애입니다. 

조현병은 다른 뇌 질환들과 마찬가지로 뇌에 지나치게 많이 분비되는 ‘도파민 과잉’ 때문에 생깁니다. 따라서 가장 중요하고 효과적인 치료는 약물치료입니다. 조현병을 가진 청소년들은 소량의 약물치료에도 매우 효과가 좋습니다.

다른 병과 마찬가지로 발병 초기에 곧바로 치료를 받는 경우 효과가 더 좋습니다. 최근 개발된 신약 덕분에 부작용 없이 사회생활을 잘 할 수 있는 환자들도 많이 늘어났습니다.

부모의 잘못으로 자녀에게 조현병이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이에게 너무 심한 스트레스를 줬어요”, “어렸을 때 다른 아이를 돌보느라 그 아이에게 사랑을 제대로 주지 못 했어요.” 

부모들은 자녀에게 조현병이 있다는 진단을 받으면 충격을 받고 자신의 탓으로 돌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부모의 생각과는 상관없이 조현병은 부모가 잘못해서 생기는 병은 아닙니다. 오히려 부모가 알아야 할 사실은 조현병이란 당뇨병이나 천식과 같이 완전히 치유되기보다는 평생 관리해 나가야 하는 병이라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아이 스스로 약물치료를 할 수 있도록 지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아이가 잘 한 부분은 칭찬해서 자신감을 심어 주는 것도 중요합니다. 부모를 비롯한 가족들이 아이를 지나치게 비판하거나 야단치거나, 간섭하면 재발하기 쉽습니다. 

부모 자신이 조현병에 대한 편견을 버리지 못하면 아이를 과잉보호하거나 아이를 비난할 수도 있습니다. 아이에게서 얻은 스트레스를 잘 푸는 것도 중요합니다. 해결되지 못한 부모의 스트레스는 다시 아이에게 향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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