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경석의 길] 여행 중 만난 음악 - 생명의 양식
[정경석의 길] 여행 중 만난 음악 - 생명의 양식
  • 송지숙
  • 승인 2017.10.23 11:1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정경석 여행작가

 

1997년 당시 10년째 합창을 같이 하고 있었던 부부합창단에서 추석 연휴에 KBS유럽 총국의 초대로 프랑스 파리와 독일의 프랑크푸르트에서 공연을 하고 오스트리아와 체코를 관광하기로 했다.

노래를 좋아하는 부부들이니 관광 중에도 어디를 가든 노래를 불렀다. 특히 관광차 성당 안에 들어가면 우리는 공명이 잘 되는 곳이라며 즉석에서 아름다운 성가와 가곡들을 무반주 4부 합창으로 부르기도 했다. 

우리를 태운 단체 버스가 슬로바키아를 지나 체코에 도착해 비가 조금씩 내리는 프라하로 들어섰다. 우리는 호텔에 여장을 풀자마자 시간이 아까워 쉴 새도 없이 프라하의 밤거리로 쏟아져 나갔다.

시내로 가기 위해 다리를 건넌 후 갑자기 탁 트인 시야에 광장이 한눈에 들어왔다. 광장 주위에는 커다란 성이 있고 많은 관광객들이 몰려 있었다. 

광장의 한 가운데는 계단이 있는 조각품이 있었는데 누군가의 제안으로 우리의 즉흥 연주가 펼쳐졌다. 계단에 무대대형으로 서고 유럽 사람들이 흔히 아는 노래를 부르니 멀찌감치 서있던 관광객들이 우리 쪽으로 몰려와 우리의 노래를 같이 부르며 즐겼다.  

▲ 프라하 찰스 다리 (사진=Lubos Houska)

 


노래를 몇 곡 부른 후 다시 광장으로 내려와 관광객들이 물결처럼 흘러가는 어느 길을 따라 가다가 우리는 어디선가 들려오는 소프라노의 노래 소리에 발길을 멈췄다. 

골목이 꺾이는 곳에 문이 닫힌 가게 앞에서 까만 정장 드레스를 입고 손에는 빨간 꽃 한 송이와 악보인 듯한 책을 든 여자 한 명이 서서 노래를 부르고 있다. 자세히 보니 여자의 뒤에는 휠체어가 있어 눈이 안 보이는 듯했고 다리가 불편한 장애인인 것 같았다.  
 
우리가 그냥 지나치지 못 하고 서서 듣고 있으니 그 여인은 우리의 존재를 아는지 모르는지 잠시 숨을 가다듬고 나더니 다음 곡으로 ‘Panis Angelicus(생명의 양식)’이라는 유명한 노래를 불렀다. 

이 노래는 이전에 루치아노 파바로티가 그의 아버지와 돌림노래로 불러 유명해졌고 대부분의 교회에서도 돌림노래로 합창곡이 편곡되어 있어 성만찬식 할 때 찬양대에서 자주 불리는 노래다. 대부분이 교회에서 찬양대원인 우리 일행은 이 노래를 익히 알고 있었기에, 여인의 멜로디 라인에 조심스럽게 돌림노래로 작은 허밍을 넣었다. 

그러자 여인은 갑자기 노래를 중단하더니 어쩔 줄 몰라 하며 노래의 다음 마디를 이어가지 못했다. 우리가 손짓과 영어로 계속하라고 청하니 여인은 노래를 처음부터 다시 하고 우리도 계속 화음을 넣어 노래를 했다. 노래를 하는 여인의 목소리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고 울음마저 섞여있었다. 여인은 노래를 제대로 끝내지도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우리는 모두 힘찬 응원의 박수를 보내고 지갑을 털어 앞에 놓인 빈 바이올린 케이스 안에 사랑을 투척했다. 그리고는 모두 뿌듯하고 흐뭇한 마음으로 다음 골목으로 돌아갔는데 우리 중에 국내 유명 음악대학에서 성악을 전공한 여자 대원 한 명이 도무지 그냥 가는 것이 아쉬웠던지 혼자 되돌아가 그 분과 같이 노래를 했다는 후문을 들었다.

음악은 여행을 풍성하게 만든다. 고성 옆을 지날 때 바이올린으로 헨델이나 모차르트의 바로크 음악이 들린다면 누구나 몇 백 년 전 시대로 돌아가는 기분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스페인 그라나다의 알함브라 궁전으로 가는 골목길에는 유명한 타레가 작곡의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을 마치 세계적인 연주자인 세고비아나 줄리안 브림과 같이 기막히게 기타 연주를 하는 버스커들을 만날 수 있었고, 포르투갈의 리스본 바닷가에는 첼리스트가 오케스트라 반주를 MR로 틀어놓고 마치 개인 콘서트하듯이 연주하는 모습을 보기도 했다. 

여행을 하는 이들은 거리에서 좋은 음악을 들으면 마음을 열고 받아들인다. 그래서 최근에 모 TV에서 국내 유명가수들이 한국 사람들이 별로 없는 유럽 국가에서 버스킹을 하는 프로그램이 관심을 받은 바 있다.

여행은 보는 것만이 아니다. 사람의 오감 중 가장 쉽게 받아들이는 것은 자연스럽게 들리는 음악이다. 우연히 고성으로 들어가는 골목길에서 들리는 소프라노 음성의 ‘생명의 양식’은 메마른 도시인들에게 들려주는 감성의 비타민인 것이다.

<정경석 프로필>

- 여행작가
- 저서
* 길을 걸으면 내가 보인다(2012)
* 산티아고 까미노 파라다이스(2016)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