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철칼럼] 화약무기 총통(銃筒)
[김동철칼럼] 화약무기 총통(銃筒)
  • 김동철
  • 승인 2017.09.28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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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동철 베이비타임즈 주필·교육학 박사 / ‘환생 이순신, 다시 쓰는 징비록’ 저자

 

1592년 임진왜란 때 조선군은 일본군의 조총(鳥銃) 앞에서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조선군은 평시에는 농사를 짓다가 난리가 났을 때 소집되는 병농일치의 둔전병으로서 이렇다 할 체계적인 훈련이 없었기 때문에 오합지졸의 약체였다.

조총을 앞세운 일본군은 4월 13일 부산포에 상륙한 이후 파죽지세로 20여일만인 5월 3일 한성에 무혈 입성했다는 사실만으로 일본군의 위력을 실감하고도 남는다. 서울과 부산의 거리가 400여km라면 하루에 20여km를 폭풍 돌진했다는 계산이 나온다. 
 
천지를 뒤흔드는 조총 발사 소리에 조선군은 혼비백산, 도망치기에 급급했다. 조선 땅을 일순간에 무인지경으로 만든 조총의 위력 앞에 조선군은 속수무책, 그냥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남해안 이순신(李舜臣)의 수전(水戰)에서는 천자, 지자, 현자, 황자총통 등이 불을 뿜으면서 일본 수군은 연전연패, 번번이 깨지고 불탔으며 바닷속으로 수장되었다. 

이 막강한 위력을 가진 총통을 육전(陸戰)에서 활용했더라면 조선군은 일본군의 군세에 그렇게까지 밀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모든 게 유비무환(有備無患)의 정신이 부족해서 당한 자승자박의 비극이었다.   

조선 수군에게 화약무기인 총통이 있었음은 하늘이 내린 은혜였다. 그 중심에 고려말 무장인 최무선(崔茂宣 1325~1395)이라는 인물이 있다. 1395년 4월 19일 태조실록에 실린 최무선 졸기(卒記)에 따르면, 젊은 시절 그가 항상 되뇌는 말이 있었다. “왜구를 막는 데는 화약만한 것이 없으나, 국내에는 아는 사람이 없다.” 

최무선은 고려인으로서 최초로 화약제조법을 발명했다. 그는 고려 말 극성을 부리던 왜구의 노략질을 막는데 이성계(李成桂)와 함께 했다. 최무선은 원나라 출신 염초장(焰硝匠) 이원(李元)에게서 화약 제조 비법을 배워 1377년 결국 화통도감(火筒都監) 설치 허락을 받아 화약을 만들기 시작했다. 

1380년 가을 왜구의 두목인 아지발도(阿只拔都)가 5백여 척의 군선과 2만여 명의 졸개를 데리고 전라도 진포(금강 하구 군산)에 침입했을 때 최무선은 화포로 무장한 군선 40여 척으로 왜구의 군선 전부를 궤멸시켰다. 진포 전투 이후 왜구의 침략은 점차 사라졌고 백성들은 생업에 종사할 수 있었다.

세계 해전사에서 한 획을 긋는 함포의 사용은 레판토 해전(1571년 10월 7일 베네치아, 교황청, 에스파냐 등 신성동맹 함대가 투르크(터키) 함대를 격파한 해전)에서 스페인 함대에 의해 처음 등장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실제로 우리나라가 서양에 비해 약 200년 앞서 함포를 사용했다.  
 
화통도감에서 제조된 각종 화기들은 모두 18가지로 총포로는 대장군(大將軍), 이장군(二將軍), 삼장군(三將軍), 육화석포(六火石砲 완구의 일종), 화포(火砲), 신포(信砲), 화통(火筒) 등이다. 

또 발사물로는 화전(火箭), 철령전(鐵翎箭), 피령전(皮翎箭) 등이고 그 밖에 질려포(疾藜砲), 철탄자(鐵彈子), 천산오룡전(穿山五龍箭), 유화(流火), 촉천화(觸天火)와 로켓무기로 주화(走火)가 있었다.

화약의 필요성을 절감한 최무선은 독자적인 기술개발에 들어가 각고의 노력 끝에 숯과 초석 그리고 유황을 사용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아내었다. 숯은 지천에 널려있고 황은 유황의 중요성을 알지 못했던 왜로부터 수입할 수 있었지만, 초석 즉 질산칼륨(KNO3)을 얻는 것이 문제였다. 

1375년 최무선은 20년 동안의 연구 끝에 마침내 자신만의 초석제조법을 개발하는데 성공하였다.  

 “오래된 집의 부뚜막이나 마루, 또는 온돌 밑에서 채취한 흙을 사람과 가축의 오줌 그리고 나뭇재와 섞은 후 비에 맞지 않게 쌓아 둔다. 그리고 그 위를 말똥으로 덮고 불을 지피고 나면 흰 이끼가 생기는데, 4~5개월 지난 다음 물로 씻어내고 졸이면 거친 초석이 얻어진다. 이 초석을 다시 물에 녹인 후 정제하면 화약에 사용할 수 있는 초석이 생긴다.” 

이순신은 임진왜란 당시 늘 화약이 부족함을 느꼈고 자체조달하기 위해서 태종실록, 세종실록 등에서 화약 개발에 대한 자료를 찾았다. 바로 최무선이 연구 개발한 비법을 알아낸 것이다. 계사년 1593년 1월 26일 이순신이 올린 장계이다.  

 “화약에 대해서는 백번 생각해도 달리 구할 길이 없고 다만 본영에서 구워 쓸 수밖에 없는데, 마침 신의 군관 이봉수(李鳳壽)가 그것을 제조하는 법을 알아 석 달 동안에 염초(焰硝) 1천근을 구워 내었기에 그것을 본영과 각 관포에 나누어 저장했습니다. 그러나 다만 석유황이 날 데가 없어 한 백여 근쯤 내려 보내주시기를 바랍니다.”  

이순신은 또 화약전문 기술자였던 감관(監官) 조효남(趙孝南)과 작전회의를 했는데 훈련도감 소속인 그는 충청도 서산 남양에서 바다흙으로 염초를 만드는 일을 관리한 경험이 있었다.  

총통과 관련 문헌상으로는 1425년(세종 7) 전라감사가 천자철탄자(天字鐵彈子) 1,140개를 새로 주조하여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 태종 때 지자총통(地字銃筒)과 현자총통(玄字銃筒)이 이미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총통은 포의 크기와 화약의 중량 그리고 사정거리에 따라 천, 지, 현, 황의 순으로 명칭을 붙였다. 천자(天字) 총통은 지자(地字), 현자(玄字), 황자(黃字) 총통보다 크다. 포구에 장전한 포탄에 화승(화약심지)으로 인화하여 발사하는 방식으로, 동차(童車)라는 포가(砲架)에 장착하여 사용했다.

현존하는 천자총통은 2점이 있다. 1555년(명종 10)에 제작된 가정을묘명천자총통(嘉靖乙卯銘天字銃筒)은 전체길이 1.31m, 통길이 1.16m, 포구 지름 12.8㎝, 무게 296㎏이다. 1813년 박종경(朴宗慶)이 훈련도감에서 편집, 간행한 군사기술에 관한 책인 융원필비(戎垣必備)에 따르면, 발사물로 사용하는 대장군전의 무게는 50근(약 30㎏)이며, 사정거리는 1200보(약 2.16㎞)이다. 보물 제647호로 지정되었으며, 국립진주박물관과 아산 현충사에 소장되어 있다.

또 지자총통은 조선시대 사용되었던 유통식(有筒式) 화포로 길이 890mm, 내경 105mm,  외경 172mm, 무게 92kg이다. 1969년 경남 창원에서 채석작업 중 발견되어 1986년 보물 제863호로 지정되었고 동아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지자총통은 임진왜란 때 거북선과 판옥선 등 전선(戰船)의 주포(主砲)로 사용되었다. 발사장치는 포구장전탄에 화승으로 불을 댕겨 발화 폭발하게 되었는데, 여기에 쓰이는 것은 장군전(將軍箭)이라는 쇠화살과 수철연의환탄(水鐵鉛衣丸彈)이라는 탄환이다.

또한 현자총통은 1984년 6월 경남 거제군 신현읍 고현리 고현만 수중 준설작업 중 물 속에서 건진 것으로, 1986년 11월 29일 보물 제885호로 지정되었다. 전체 길이 79cm(통신 길이 58.7cm, 약실 길이 20.3cm), 입지름 7.5cm로 진품이 국립진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구조는 통신과 약실로 구분되며, 통신에 대나무와 같은 마디 8조(條)가 있고, 따로 총구에 구연대(口緣帶)가 있다. 이 화기는 임진왜란 때 사용한 화기류 중 가장 많이 사용한 것으로, 화약 4냥과 격목(檄木)의 힘으로 길이 6자 3치 7푼(약 2m), 무게 7근에 이르는 차대전(次大箭)을 발사하면 사정거리가 약 1,600m에 이른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황자총통은 1587년(선조 20)에 주조한 것으로 총통길이 50.4cm(통신길이 36.2cm, 약실길이 14.2cm), 구경 4cm이다. 보물 제886호로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있다.

임진왜란 때 사용한 화기의 하나로, 총이라기보다는 중화기에 가까우며 화약 3냥과 격목(檄木)의 힘으로 길이 6자 3치(약 2m), 무게 2.28kg에 이르는 피령전(皮翎箭 가죽날개를 단 큰 화살)을 발사하면 사정거리가 약 1,100m에 이른다고 한다. 약통 뒤에 나무 막대기를 넣을 수 있는 손잡이와 포귀(砲耳)가 있어 조준사격을 할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한편, 승자총통은 위의 천지현황자총통과 달리 휴대용 개인 화기이다. 화약을 1냥 쓰고, 철환 15개를 발사하며 사거리는 600보에 이른다. 철환을 발사할 때는 화약과 철환 사이에 토격을 넣는다. 피령목전을 발사하기도 한다.

승자총통이 처음 문헌 기록에 나타나는 것은 1583년(선조 16) 여진족 니탕개의 난 때이다. 이때 함경도 온성부사 신립(申砬)이 총통과 철환을 비 쏟아지듯 퍼부어 오랑캐를 퇴주시켜 그 공으로 임란 때까지 최고의 명장으로 이름을 날렸다. 그런데 이때 사용된 총통은 전라좌수사와 경상병사를 역임한 김지(金漬)가 만든 것이었다. 이 승자총통은 이순신의 장계와 일기에서도 나타나는데 남쪽 바다 수군진영에도 널리 보급되었다가 광해군 이후 사라졌다.

이순신은 고군분투 끝에 일본군 조총의 위력을 누를 수 있는 정철총통(正鐵銃筒)이라는 개인용 화승 무기를 만드는데 성공했다.  

 “신이 여러 번 큰 전투를 겪어 왜군의 소총을 얻은 것이 많사온데, 항상 눈앞에 두고 그 묘법을 실험한바 총신이 길기 때문에 총구멍이 깊고, 또 깊기 때문에 위력이 강하여 맞기만 하면 파손이 되는데, 우리의 승자(勝字)나 쌍혈총통(雙穴銃筒)은 총신이 짧고 총구멍이 얕아서 그 위력이 조총보다 못하고 그 소리도 크지 못하므로 항시 조총을 만들고자 하였던 바, 신의 군관 정사준(鄭思竣)이 그 묘법을 알아내어 낙안수군 이필종(李必從), 순천에 사는 종 안성(安成), 김해 절종 동지(同志), 거제 절종 언복(彦福) 등을 데리고 정철(正鐵)을 두둘겨 만들었습니다. 총알이 나가는 힘이 조총과 같습니다.”

계사년 1593년 8월 선조임금께 정철총통을 개발한 내용의 장계와 함께 다섯 자루를 봉하여 올려 보냈다. 그러나 선조는 이 정철총통을 군기시 창고에 보내고 왜군으로부터 노획한 조총을 올려 보내라는 명을 내렸다.

이순신은 직접 화약무기 제조기술을 일본에서 귀화한 김충선(金忠善 사야가)에게 구체적으로 보고하도록 지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조선의 조총 제작기술은 만족할 만한 것이 못 되었으며 1624년(인조 2) 일본에서 조총 수천 자루를 수입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꾸준히 조총의 성능 개선과 양산에 힘썼으며, 1655년(효종 7)에는 제주도에 표착한 하멜 일행을 서울로 압송하여 훈련도감에 배속시킨 뒤 새로운 조총 제조에 참여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조선에서 제작한 조총의 우수성이 대외적으로도 알려져 1657년(효종 9)에는 청나라에서 조총을 무역해줄 것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한편 호준포(虎蹲砲)는 길이 60~70cm, 무게 20~25kg으로 명나라 장군 척계광(戚繼光)이 발명한 소형 대포이다. 앞부분의 다리 두개에 포신이 끼어 있는 모습이 마치 호랑이가 앉아 있는 모습과 닮았다고 하여 ‘호준포’라는 이름이 붙었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 군대에 의해 전래된 것으로 호준포는 다른 화포에 비해 크기가 작고 무게가 가벼워 쉽게 옮길 수 있었다. 그러나 조준 사격이 불가능하고, 사거리가 짧으며 명중률도 높지 않았다. 그래서 조선 후기에는 신호용 화포로만 사용되었다. 아산 현충사 충무공이순신기념관에 소장되어 있다.

<김동철 주필 약력> 

- 교육학 박사
- 이순신 인성리더십 포럼 대표
- 성결대 파이데이아 칼리지 겸임교수
- 문화체육관광부 인생멘토 1기 (부모교육, 청소년상담)
- 전 중앙일보 기자, 전 월간중앙 기획위원
- 저서 : ‘이순신이 다시 쓰는 징비록’ ‘무너진 학교’ ‘밥상머리 부모교육’ ‘환생 이순신, 다시 쓰는 징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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