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경석의 길] 트레킹의 조건
[정경석의 길] 트레킹의 조건
  • 송지숙
  • 승인 2017.07.03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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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경석 여행작가

 

주말 이른 아침 서울의 주요 전철역을 나가보면 길가에 대형 버스들이 줄지어 서있고 버스 창가에 붙어 있는 단체의 이름은 주로 걷기모임이다. 과거 유명 등산코스를 찾아다니던 산악회들의 자리를 요즘은 걷기 좋아하는 사람들로 대체됐다.

북유럽의 국가들은 국가 재정 중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의료비 감축을 위해 국민들이 평소 운동을 많이 하고 건강을 유지할 수 있도록 인프라를 만든다. 체육시설은 물론이고 가까운 거리는 승용차 대신 자전거를 이용하도록 특정 장소에 언제 어디서든 자전거를 탈 수 있는 시설을 준비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오래 전부터 누구나 쉽게 운동할 수 있는 트레킹 코스들을 만들기 시작했다. 각 지방자치단체들은 지방의 역사, 자연, 예술인 그리고 농어민의 생활 터전을 탐방하는 코스를 개발하고 매스컴에 알렸다. 또한 개인 블로그를 통한 간접적인 홍보를 위해 걷기 동호회 사람들이나 여행작가들을 초대해서 팸투어(Familiarization Tour)로 지역의 맛집과 명승지 그리고 트레킹 코스를 묶어 소개한다.

통상 일반 여행객들은 주말을 즐기기 위해 지방의 펜션을 예약한 후 타 지역에서 산 먹을 것과 마실 것들을 승용차에 싣고 오기에 지방 경제에 도움을 주지 못한다. 이런 점을 해결하기 위해 걷기 동호회원들은 가능한 공정여행을 한다. 식사는 현지의 식당에서 해결하고 걷기 후 지역에서 생산되는 농산품을 구매한다. 일례로 어느 미디어에서는 트레킹 여행자들이 다른 일반 여행자보다 지역경제에 40% 정도 더 이바지한다는 통계를 알린 바도 있다.

지난해 정부는 국제적인 유명 트레일코스처럼 범국가적으로 전 국토를 일주하는 트레킹코스를 만들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발표했다. 우선 부산의 오륙도에서부터 고성의 통일 전망대까지 걷는 해파랑길로 한반도의 동쪽이 완성되었고 남쪽은 해안선을 따라 각 지역마다 이미 해안길을 걷도록 준비되어 있으며 서해안도 충청도와 전라도의 해안선을 따라 이어지고 있다.

 


또한 강화도에서 강원도 고성의 통일전망대까지 국토를 횡단하는 평화누리길만 완벽하게 이어지면 이 원대한 계획이 달성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또한 내륙에도 많은 코스들이 있어 선택의 폭이 넓어졌다.

현재 모 트레킹 앱의 정보를 보면 서울·경기 지역에만 약 100개가 넘는 트레킹 코스가 있는 것으로 표시돼 있다. 각 코스마다 어느 정도의 노력과 정성을 들여 만들었는지는 모르지만 이젠 어디를 가도 걸을 만한 코스가 많다.

다만 문제는 관리하지 않는 코스들이 많다는 것이다. 걷기 힘들 정도로 잡풀이 우거져 있거나 이정표가 제대로 표시되어 있지 않아 방향을 잃어 헤매거나 혹은 개발이 지속되고 있는 지역은 중간에서 길이 완전히 사라지기도 하는 등 성장통을 겪고 있는 곳들이 있다.

트레커들의 선호도에 따라 호불호가 있겠지만 매연이 있는 도심을 통과하고 무릎에 무리를 줄 수 있는 아스팔트나 시멘트 포장길을 걷는 것보다 대부분 자연 속의 흙길을 걷기 좋아한다.

자연과 하나되는 가장 좋은 방법은 흙길이다. 걷기는 특별한 기구 없이 하기 쉬운 운동이지만 자동차가 다니는 포장된 길의 인도는 위험하고 지루함을 가중할 뿐이다. 따라서 좋은 트레킹 코스는 낮은 산이나 높은 산의 7부 정도의 능선길이 있으면 최적의 조건이고, 가능하다면 들길, 숲길을 포함시켜야 한다. 어쩔 수 없이 차도의 옆길을 걷더라도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자의 길처럼 걷는 흙길을 별도로 만들어 놓을 필요가 있다.

 


필자는 우리 삶의 애환과 정서가 들어 있는 길을 주로 걷는다. 수많은 해외 여행을 다녔어도 유명한 유적지나 오래된 건물을 보는 것보다 그 시대 사람들이 살던 마을의 골목을 걸어보며 사람들의 향내를 맡기 좋아한다.

오래된 집의 벽에 써 있는 글이라던가, 문패들, 돌 벽돌 사이에 낀 이끼들 그리고 그들이 일하던 논과 밭 그리고 축사들을 지나며 동물 냄새, 분뇨나 두엄냄새 등을 맡으며 옛 선인들의 삶을 추측해 보는 것이 즐겁다.

트레킹 코스는 잘 다듬어진 평지보다 비포장된 길이라도 농어촌과 산촌 사람들이 다니던 길을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걷기는 운동을 통해 신체 건강에 당연히 도움이 되겠지만 정신적인 면도 생각한다면 걷는 사람들에게 무언가 생각하고 추억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한다.

이런 곳을 걸으면 같이 걷는 사람들과 대화가 많아서 좋다. 서로의 추억을 이야기하고 길가에 핀 야생초나 열매들을 보며 조리법에 대한 정보를 나누고 몰랐던 꽃들의 이름도 서로 물어 알아간다. 시인 김춘수의 시 ‘꽃’에서 꽃의 이름을 모르면 그저 꽃이지만 이름을 알면 내게 하나의 의미가 된다고 했듯이 길가의 모든 자연물의 이름을 안다면 자연은 우리의 좋은 친구가 될 수 있다.

이런 종류의 트레킹은 길의 지루함을 잊을 수 있어 좋다. 그렇게 도란도란 이야기를 하며 걷다 보면 지루하거나 힘들지 않아 좋고, 걷는 속도도 여유로워 다리나 무릎, 허리에 과부하가 생기지 않는다.

몇 년 전 지리산둘레길이 모 TV방송국의 연예프로그램 중 1박2일 동안 체류하는 방송을 탄 뒤 몰지각한 사람들이 관광버스를 타고 그 곳을 걸으며 농작물에 허락 없이 손대는 바람에 주민들이 피해를 많이 입었다. 지금도 그곳에 가면 단체버스로 오지 말라는 경고팻말이 붙어 있다.

길을 걸으면서 첫째로 지켜야 할 원칙이 바로 내 것이 아니면 손대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길가에 열린 야생 과일이나 야생초도 모두 그곳 주민들의 음식재료이고 생활의 수입원이다. 필요하면 주민들에게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고 구입해야 한다.

또 논밭에서 열심히 일을 하시는 주민들에게 트레킹하는 모습은 시간과 돈이 남아 여행을 다니는 도시 사람들처럼 보일 수도 있으니 위화감을 주지 않기 위해 먼저 인사를 드리고 그 분들과 짧은 대화를 나누기를 권한다. 낯선 사람들과 처음 만남은 늘 밝은 미소로 장소에 대한 칭찬을 큰 목소리로 하는 인사가 으뜸이다. 참된 트레킹은 자연과 사람을 사랑하며 걷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길을 걸으면 내가 보인다.

 


<정경석 프로필>


- 여행작가
- 저서
* 길을 걸으면 내가 보인다(2012)
* 산티아고 까미노 파라다이스(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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