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철칼럼] 무항산(無恒産) 무항심(無恒心)
[김동철칼럼] 무항산(無恒産) 무항심(無恒心)
  • 김동철
  • 승인 2017.10.23 15:5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김동철 베이비타임즈 주필·교육학 박사 / ‘환생 이순신, 다시 쓰는 징비록’ 저자

 

맹자(孟子)는 제나라 선왕이 정치에 대하여 묻자 “백성들이 배부르게 먹고 따뜻하게 지내면 왕도(王道)의 길은 자연히 열리게 된다. 경제적으로 생활이 안정되지 않아도 항상 바른 마음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오직 뜻있는 선비만 가능한 일이다. 일반 백성은 경제적 안정이 없으면 항상 바른 마음을 가질 수 없다. 그렇다면 방탕하고 편벽되며 부정하고 허황되어 이미 어찌할 수가 없게 된다. 백성들이 죄를 범한 후에 법으로 그들을 처벌한다는 것은 곧 백성을 그물질하는 것과 같다”고 대답했다.

맹자의 양혜왕(梁惠王) 상편에 나오는 말로, ‘항산(恒産)이 없으면 항심(恒心)이 없다’는 무항산 무항심(無恒産 無恒心)을 말한다. 즉 생활이 안정되지 않으면 바른 마음을 견지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맹자는 항산이 없는 사람은 항심이 없기 때문에 어떤 나쁜 짓이라도 할 수 있으므로 특히 교육에 있어 도덕(道德)을 강조했다. 

조선 후기에 삼정(三政)의 문란은 극에 달했다. 삼정이란 전정(田政), 군정(軍政), 환곡(還穀) 등 세 분야의 국가 정책을 말하는데, 이 중요한 정책이 무너져 힘없는 백성들만 착취를 당해 살아갈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실학자인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이 1803년 전남 강진에 유배됐을 때 일이다. 한 남자가 “내가 이것 때문에 곤액(困厄)을 받는다”며 스스로 자신의 남근(男根)을 잘랐다. 그 아내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남근을 들고서 관아의 문을 들어가려 했지만 아전에 의해 문전박대(門前薄待) 당했다. 

사연은 이렇다. 부부는 사흘 전 아이를 낳았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이장이 핏덩이를 군적(軍籍)에 편입하고 부부의 소를 토색(討索)질해갔다. 그러자 남편은 ‘남근을 잘못 놀려 자식에게 못할 짓을 했다’며 자해한 것이다. 

이렇듯 백성들은 관아 탐관오리(貪官汚吏)의 가렴주구(苛斂誅求)에 피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야말로 ‘포악한 정치는 호랑이보다 더 무섭다.’는 가정맹어호(苛政猛於虎)의 시대였다. 오죽했으면 자신의 양물(陽物)을 잘랐을까. 

이 말을 전해들은 다산은 피가 거꾸로 솟는 분노에 지필묵을 꺼내 ‘애절양(哀絶陽)’이란 시를 지었다. 한여름 날 술을 앞에 놓고서 험한 세상인심에 눈물지었다. 하일대주(夏日對酒)에 나오는 시다.   

 종년역작고(終年力作苦) 일 년 내내 힘들여 일을 해도 
 증막비기신(曾莫庇其身) 제 몸 하나 가릴 길이 없고 
 황구출배태(黃口出胚胎) 뱃속에서 갓 태어난 어린 것도
 백골성회진(白骨成灰塵) 백골이 진토가 된 사람도
 유연신유요(猶然身有徭) 그들 몸에 요역이 다 부과되어
 처처호추민(處處號秋旻) 곳곳에서 하늘에 울부짖고
 원혹지절양(冤酷至絶陽) 양근까지 잘라버릴 정도니
 차사양비신(此事良悲辛) 그 얼마나 비참한 일인가

또 다산은 지방 벼슬아치들의 ‘갑질’을 통렬하게 비판하고 있다. 당시 강진 지방에서 탐관오리들이 백성을 수탈하는 학정(虐政)을 담은 칠언절구(七言絶句)를 남겼다. 

 면포신치설양선(棉布新治雪樣鮮) 새로 짜낸 무명이 눈결같이 고왔는데
 황두래박이방전(黃頭來博吏房錢) 이방 줄 돈이라고 황두(하급관리)가 뺏어가네
 누전독세여성화(漏田督稅如星火) 누전(장부에 미기록된 밭) 세금 독촉이 성화같이 급하구나
 삼월중순도발선(三月中旬道發船) 삼월 중순 세곡선이 한양으로 떠난다고

임금은 백성의 아버지인가? 아니었다. 공맹(孔孟)의 유학과 주자의 성리학(性理學)을 공부한 자칭 성인군자나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달달 외워 과거 급제한 벼슬아치들은 왜 백성의 고단한 삶에 눈감았나.

나라는 하루가 다르게 썩어 가는데 조정은 끼리끼리 붕당(朋黨)을 만들어 치고받고 피터지게 싸웠다. 지방의 하급관리들은 ‘굶주린 늑대’가 되어 백성의 고혈(膏血)을 짜냈다. 과다한 공물(貢物) 상납과 가렴주구(苛斂誅求)의 과도한 징세(徵稅) 등으로 백성들은 허리가 휘어지고 골이 빠질 정도였다. 기름진 음식에 호의호식을 했던 왕 중심의 전제군주제에서 백성들은 양반의 탐욕에 수탈당하는 말라비틀어진 쭉정이 ‘호구(虎口)’들이었다.     

기아와 질병으로 인구도 줄어들어 농민들의 삶은 더욱 피폐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농민들의 불만은 하늘을 찌를 듯했고 땅과 집을 잃은 일부 농민들은 도적떼가 되어 산속으로 들어갔다. 조선시대에 잦은 민란은 결국 왕과 조정의 대신들이 백성을 위한 애민(愛民)은커녕, 위민(爲民)의 정책을 제대로 시행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여하튼 먹고 사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사흘 굶어 남의 담타고 넘지 않는 자 없다’는 말처럼 목구멍에 풀칠을 하기 위해 범죄도 불사하는 상황이 비일비재했다. 그래서 ‘목구멍이 포도청’인 백성들이 많았다는 이야기다.

조정의 고민도 커졌다. 자칫 방치했다가는 ‘도적떼’들이 언제 궁궐을 향해 칼과 창을 겨누어 쳐들어올지 모를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개간을 장려했고, 토지대장에서 빠진 은결(隱結)을 찾아내 경작지에는 빠짐없이 전세(田稅)를 부과하려 하였다. 이러한 노력으로 광해군 때는 토지가 50만 결, 정조 때는 145만 결로 임진왜란 직전 상황 가까이에 이르렀다. 

임진왜란 이후 남은 전답이 별로 없자 왕실에서는 절수(折受)라는 제도를 시행했다. ‘끊어서 받는다’는 절수제도는 황무지나 버려진 땅을 신고해 개간하면 경작권과 소유권까지 가지도록 하는 것이다. 조정은 절수제도를 통해 부족한 과전(科田)문제를 해결하고 토지개간을 유도하려 했다. 

그러나 백성들은 부과된 ‘전세(田稅)’, ‘요역(徭役 부역)’과 ‘군역(軍役)’으로도 허리가 휘청거렸는데 ‘공납(貢納)’이란 괴물이 나타나 그들의 삶의 터전이 송두리째 뒤흔들렸다.

지방 특산물을 나라에 바치는 ‘공납’의 폐해는 극심했다. 큰 마을, 작은 마을 구분없이 똑같이 내야했고, 많은 토지를 소유한 양반 전주(田主)의 납부액과 송곳 꽂을 땅도 없는 소작농의 납부액이 비슷했다. 무엇보다 그 지역에 나지도 않는 물품을 바치라는 것이었다. 그러니 돈을 주면 물건을 대신 나라에 바치는 사람, 중간상인들이 나타났다. 

중간상인들은 공물을 심사하는 아전(衙前)에게 뇌물을 찔러주고 자신들의 물건이 아니면 받지 못하게 했다. 이렇게 공납을 방해한다고 해서 ‘방납(防納)’이라고 했다. 방납업자들은 원래 가격의 수십 배에서 백배까지 받고 대납을 했다고 하는데 이와 같은 협잡질의 폐해가 심했다. 방납업자와 관리가 챙기는 수수료인 인정(人情)은 공물의 두 배나 되었다. 그러다 보니 “손에는 진상품을 들고 말에는 인정물을 싣고 간다.”는 말이 유행할 정도였다.  
   
조선시대 공납제(貢納制) 전개과정에서 초기에는 유무상통(有無相通)의 편의를 위해 용인되었던 공물대납제가 1476년(성종7) 성종 때 폐지된 뒤 방납 폐해가 심해졌다. 그 원인은 제도의 미비와 수요의 증가에 있었다.

제도의 미비로는 공안(貢案)의 개정이 지연되어 불산공물(不産貢物 생산되지 않는 공물), 절산공물(絶産貢物 공급이 단절된 공물)이 발생하였지만 조정에서는 이를 무시하고 분정수납(分定收納 할당량)을 강행했다. 공물수납을 담당했던 중앙 각사의 서리 및 노복들 대부분에게 급료가 지급되지 않았으므로 공물수납을 통해 사리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 중앙 각사의 운영비 중 일부를 공물 수납의 과정에서 확보해야 함에 따라 방납행위는 묵인, 장려되었다.

또한 임진왜란 이후 국가의 재정위기를 극복하려는 과정에서 공물 수요가 급증함에 따라 공물의 인납(引納, 다음 해의 공물을 미리 상납하게 하는 것)과 가정(加定, 지방의 특산물에 대해 임시로 추가 부담을 요구하는 것)이 강행되었다.

이는 방납업자와 중간관리들만 이익을 보는 구조가 되었고 이게 돈이 되는 사업이 된다고 하자 힘깨나 쓴다는 관리와 왕실 종친들이 방납에 뛰어들었다. 재벌이 골목상권인 떡볶이, 순대집에 뛰어든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부익부빈익빈(富益富貧益貧)의 경제 구조다.  

이들 사주인과 각사 이노들은 방납의 일을 부자, 형제가 전승해 가업으로 삼았다. 또 사대부, 종실, 부상대고(富商大賈)와 연결되어 그 하수인이 되기도 했다. 이러한 것은 백성들에게 이중 부담을 강요하는 것이므로 이 폐단을 없애기 위한 노력이 일어났다.

1569년 선조는 공납제를 폐지하고 전결(田結)을 단위로 하여 쌀로 부과징수하는 대동법(大同法), 즉 ‘대공수미법(代貢收米法)’을 실시했다. 그러나 기득권세력의 반대와 걷힌 쌀이 조금이고 쌀이 아닌 물건으로 받을 때가 많아서 채 1년도 안 돼 흐지부지됐다.

임진왜란 중 명나라 군대의 군량을 책임졌던 ‘전시재상’ 류성룡(柳成龍)은 선조에게 대동법과 같은 작미법(作米法)의 확실한 시행을 건의했다. 마침내 광해군이 즉위한 해인 1608년 5월 방납인들 때문에 공물가격이 폭등하자 당시 영의정 이원익(李元翼)이 대동법을 시행해야 한다며 자신의 정치생명을 내놓고 주장했다.

또 인조 때 김육(金堉)은 그 이전에 10년 동안 시골에서 농사를 지은 경험이 있었다. 그래서 벼슬에 나간 뒤에 백성들의 세금을 줄여 달라고 여러 차례 상소를 올려  마침내 대동법이 전국적으로 시행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조선 중기 이후 정말 한심할 정도로 부실한 왕조가 계속 이어져 갈 수 있었던 것은 몇몇 위인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1569년 율곡 이이(李珥)가 공물방납의 폐해를 지적한 동호문답(東湖問答)을 선조에게 올렸고 이후 류성룡(柳成龍), 이원익(李元翼), 김육(金堉) 같은 애민정신을 가진 충신들이 그 맥을 이었다.

<김동철 주필 약력> 

- 교육학 박사
- 이순신 인성리더십 포럼 대표
- 성결대 파이데이아 칼리지 겸임교수
- 문화체육관광부 인생멘토 1기 (부모교육, 청소년상담)
- 전 중앙일보 기자, 전 월간중앙 기획위원
- 저서 : ‘이순신이 다시 쓰는 징비록’ ‘무너진 학교’ ‘밥상머리 부모교육’ ‘환생 이순신, 다시 쓰는 징비록’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