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경석의 길] 여행 중 만난 음악 - 들장미
[정경석의 길] 여행 중 만난 음악 - 들장미
  • 송지숙
  • 승인 2017.09.15 13:1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정경석 여행작가

 

확실히 후진국 항공사는 믿음이 가지 않았다. 서울에서 가루다 항공을 타고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 도착하여 업무를 보고 연이어 발리섬에서 주요 계약식 행사가 있어 다시 가루다 항공을 공항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항공편이 조금씩 지연되더니 급기야는 취소되었고 결국 몇 시간을 기다린 후에야 발리행 비행기를 탔다.

우리 일행들이 많았지만 대체 항공기를 이용하느라 분산해서 여러 비행기로 나누어 탔는데, 다행스럽게도 사장님과 임원들은 다른 편으로 가고 내가 탄 항공편에는 나만이 타게 되어 신경 쓰지 않아 마음이 편했다.

큰 프로젝트를 계약하는 세레모니는 인도네시아 사업주와 미국과 일본의 기술회사 각 1개 회사와 그리고 수주국가인 우리 회사 등 4개국의 사장들이 모여 골프 라운딩을 하면서 계약서에 사인 행사를 하기로 했다.

이 형식적인 행사에 내 직장 상관뿐만이 아니라 3개사의 거래처 사장단 일행까지 챙겨야 하는 부담감은 큰 항공기의 무게만큼이나 버거운 행사였다. 영업 담당자인 내가 따라가야 해서 그 행사를 위해 밤을 꼬박 새우며 일을 하고 자카르타를 거쳐 발리로 가는 일정이 차질이 있었지만 내 잘못은 아니었기에 나는 콧노래를 불렀다.

항공사가 예정치 않은 운항스케줄 변경으로 미안하다고 원래 이코노미석이었던 내 좌석을 비즈니스 좌석권으로 변경해 주어 처음으로 좋은 자리에 앉아 가는 호사를 누렸다. 넓은 좌석 그리고 여유있는 앞뒤 공간에 기분이 우쭐해 있으니 부탁하지 않아도 영자 신문을 가져다 준다.

넓고 편한 자리에 다리 꼬고 앉아 신문을 펴 들었는데 마침 기사 중에 내가 좋아하는 독일 성악가 ‘휘셔 디스카우’의 생일에 대한 글과 사진이 있기에 관심을 가지고 읽고 있으니 옆자리에 있던 나이 든 외국 부인이 내게 영어로 아는 체를 한다. 
 
 “여기 신문에 나온 사람을 아십니까?”
 “네. 독일가곡을 좋아해서 이 분의 음반을 자주 듣습니다.”
 “그럼 혹시 독일 노래 중 아는 것이 있나요?”

마침 그 해 내가 오래 전부터 활동하던 부부합창단의 정기공연 레퍼토리 중에 학창시절 음악교과서에도 있어 모두가 잘 알고 있는 베르너의 ‘Heidenroslein’(들장미)를 원어로 불렀기에 주저치 않고 대답했다.

 “네. 한 두 개 있습니다.”
부인의 눈이 커진다. “혹시 불러 보실 수 있어요?”

노래라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부르는 내 노래사랑 때문에 주저하지 않았지만 기내라 조그마하게 앞부분의 몇 소절을 불렀는데 갑자기 손을 들어 내 노래를 중지시키더니 주위 비즈니스 좌석의 같은 또래의 외국인 부인들을 모두 불러 모았다.

기내에서 합창을 부르다

“우리들은 모두 독일 의사들인데 지금 발리에서 세미나가 있어 가는 중입니다”라며 내게 이야기 하더니 일행들에게는 “여기 한국 사람이 우리 노래를 알고 있으니 같이 부르자”하니 모두 소녀 같은 미소를 지으며 좋다고 박수를 쳤다. 독일사람들이 합창을 무척 좋아하는 것은 잘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비행기 안에서 독일 가곡이 합창으로 울려 퍼졌다. 우리는 모두 그 자리에서 선 채로 나의 고개 끄덕임의 사인에 맞추어 독일 여의사들은 멜로디로, 나는 합창단에서 불렀던 테너 화음으로 부르니 그들의 좋아하는 표정이 우리의 행동을 이상하게 보던 승무원들에게 전달되고 이코노미석에 있던 사람들도 비즈니스석과 일반석을 구분하는 커튼을 걷어 올리고 듣고 있었다.

Sah ein Knab' ein Röslein stehn,
Röslein auf der Heiden,
War so jung und morgenschön,
Lief er schnell es nah zu sehn,
Sah's mit vielen Freuden.
Röslein, Röslein, Röslein rot,
Röslein auf der Heiden.

그 노래가 끝나니 여기저기서 앵콜이 터져 나왔다. 내 옆에 있던 부인도 내게 한 곡 더 했으면 좋겠다 하기에 ‘O! Tannenbaum’(전나무여)를 안다고 하니 모두 놀라움과 기쁨의 눈빛으로 다시 한번 서로의 호흡에 맞추어 노래를 나누었다.
 
노래를 통해서 국제적인 교류도 가졌고 인생을 살면서 경험하기 어려운 비행기 내에서의 합창의 추억도 가졌다. 비록 발리로 가는 짧은 비행시간이지만 승무원들의 서비스가 특별히 좋아졌고, 항공기가 발리의 덴파사 공항에 도착하여 내릴 준비할 때 독일 의사가 얼른 종이쪽지에 자신의 주소를 적어주고 독일에 오게 되면 연락하라고 내 손에 쥐어 주었다. 그렇게 아쉽게 헤어지고 몇 년 뒤 우리 합창단에서 독일 연주갈 때 미리 연락해서 공연 소식을 알리려 했는데 그 쪽지가 어디로 갔는지 찾지 못해 아쉬웠다.

음악은 만국공통어다. 세상의 모든 언어가 달라도 오선지 위의 ‘도레미파솔라시도’는 다른 언어로 가사를 붙여도 모두 같은 음의 소리를 낸다. 또한 인종의 피부색은 달라도 같은 악보를 가지고 있으면 소리의 색깔은 달라지지 않는다.

나이가 달라도 성별이 달라도 오선지위의 멜로디는 절대 불변이다. 때론 서로 음의 색깔이 달라야 더 멋진 화음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음악이고 합창이다. 또한 굳이 비싼 악기를 배우지 않아도 누구나 조금만 노력하면 어울릴 수 있는 음악의 장르가 합창이다.

음악은 평화의 도구다. 음악은 이해와 화합을 이루는 매개체다.

<정경석 프로필>

- 여행작가
- 저서
* 길을 걸으면 내가 보인다(2012)
* 산티아고 까미노 파라다이스(2016)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