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철칼럼] 동북아 ‘화약고(火藥庫)’ 한반도
[김동철칼럼] 동북아 ‘화약고(火藥庫)’ 한반도
  • 김동철
  • 승인 2017.05.16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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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동철 베이비타임즈 주필·교육학 박사 / ‘환생 이순신, 다시 쓰는 징비록’ 저자

 

한반도 안보가 일촉즉발의 위기 속으로 치닫고 있다. 핵을 탑재한 대륙간탄도유도탄(ICBM)이나 잠수함발진유토탄(SLBM)을 가지고 미국 본토를 위협하려는 북한의 과대망상적 행위에 전 세계가 초미의 관심을 보이고 있다.

만약 싸움이 일어난다면 1941년 일본 카미가제(神風) 특공대의 진주만 해군기지 기습공습 이후 미국은 역사상 두 번째로 외침을 받는 꼴이 된다. 미국을 기습 공격한 일본은 4년 후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각각 원자폭탄을 맞자 천황은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북한의 이같은 행동은 당랑거철(螳螂拒轍), 즉 사마귀 한 마리가 철(鐵) 수레바퀴 앞에서 수레를 멈추라고 대드는 형국으로 비쳐질 뿐이다. 북한의 속내는 핵을 가지고 미국과 직접 담판을 해서 자신들의 정권보장을 받으려는 것이다. 이른바 대한민국을 무시하고 미국과 직거래를 하겠다는 봉한통미(封韓通美)정책이다. 

이번에도 봤듯이 중국과 미국은 한반도 문제를 놓고 모종의 합의를 해나가고 있다. 우리 땅이 주 거래대상이 될 터인데 대한민국의 존재감은 찾아보기 어렵다. 이 무슨 얼토당토않은 수작(酬酌)들이란 말인가.  

6.25한국전쟁에서도 휴전당사자는 유엔(미국)과 중국, 북한이었다. 조국의 강토는 콩가루가 됐지만 정작 당사자인 대한민국의 존재감은 없었다. 

더 멀리 1592년 임진왜란(壬辰倭亂) 때도 명나라와 일본 사이에 강화협상이 이어졌다. 일차 강화협정 시도가 실패하자 일본은 1597년 다시 재침을 하는데 그것이 바로 정유재란(丁酉再亂)이다. 

조선은 이 땅에 없었고 명나라의 속국으로서 조선 왕인 선조는 투명인간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랬으니 일본이 우리를 얼마나 우습게 봤겠는가. 다만 남해 바다에서 조선수군의 우두머리인 이순신(李舜臣)을 제외하면 일본군의 눈에는 조선의 왕도, 조정대신도, 장수도 보이지 않았으리라. 

반도국가인 우리는 대륙과 해양세력 사이에 끼여 힘이 약할 때는 강대국의 침략 발판으로 짓밟혔다. 1589년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정명가도(征明假道), 즉 명나라를 치러갈 터이니 조선은 길을 빌려달라는 주문을 해왔다. 뼛속까지 친명사대(親明事大)정신이 박혀있던 선조의 입장에서는 턱도 없는 소리였다. 

그러자 왜군 15만 여명이 상륙해서 조선 국토를 유린하고 백성들을 도륙했다. 명나라 입장에서는 전쟁을 조선반도에서 끝내고 왜군이 절대로 명나라 땅을 밟지 못하도록 하는데 힘썼다. 압록강 건너 조선을 울타리로 삼는 번방지전(藩邦之戰)의 전략을 쓴 것이다. 

섬나라 일본은 끊임없이 힘이 약한 조선의 침탈을 꿈꾸고 있었다. 그리하여 1868년 메이지유신의 기초를 만들었던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은 정한론(征韓論)을 내세워 조선을 집어삼킬 계략을 짜기에 이르렀다. 

당시 일본은 젊은이들의 서구 유학을 통해 영국으로부터 해전술(海戰術)을 습득하고 독일로부터 헌법체계를 배웠다. 또 내적으로는 천황을 중심으로 전 국민이 부국강병책을 마련하는데 동원됐다.   

칭기즈칸의 몽골족은 13세기 중국을 정복하고 두 차례(1231년, 1274년)에 걸쳐 일본을 침공하기 위해서 고려군을 동원했다. 이른바 여몽연합군인데 바다를 건널 배는 모두 고려에서 만들어졌다. 이 두 차례 침공은 모두 일본 앞바다에서 일어난 돌풍 때문에 실패했다. 일본은 이 돌풍을 나라를 지켜낸 신풍(神風, 카미카제)이라고 부른다.  

속내를 좀체 알 수 없는 ‘북극 곰’ 러시아는 또 어떠했나. 1905년 러일전쟁에서 패배하기 전까지 러시아는 한성에 공사관을 설치했고 고종과 태자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 사건, 아관파천(俄館播遷)의 중심에 섰던 나라였다. 
1905년 7월 미국은 러일전쟁 승리로 러시아의 남하를 막은 일본과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었다. 즉 미국과 일본이 필리핀과 대한제국에 대한 서로의 지배를 인정한 협약으로 일본이 제국주의 열강들의 승인 아래 한반도의 식민화를 노골적으로 추진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어 일본은 1905년 대한제국을 협박해서 조선의 외교권을 빼앗는 을사늑약을 맺었다. 이때 독일과 영국, 프랑스는 ‘이미 (조선 상황은) 엎질러진 물’이라고 보고 강 건너 불구경하듯 했다. 

물론 미국은 그 후 1950년 한국전쟁 때 북한정권의 기습남침과 100만 중공군의 공격에 맞서 피를 흘리며 싸운 혈맹(血盟)이 됐다. 그리고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맺어 전 세계 동맹 중에서 가장 굳건함을 자랑하고 있다. 

북한은 천안함 폭침, 목함지뢰 도발 등으로 우리와 여전히 DMZ-NLL상에서 전쟁 중이다. 때문에 미국은 우리나라에 주둔해 있는 미군을 보호하기 위해 한반도에 사드를 배치하겠다는 것이다.

일부 국회의원들이 중국에 가서 사드 배치에 관한 의견을 구하는 것을 보면서 ‘쪼개지는 민족성’을 다시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번지수를 잘못 찾아도 한참 잘못된 것이 아닌가. 

사드 문제는 중국의 눈치를 볼 문제가 아니다. 중국은 대한민국과 일본을 다 들여다보면서 사드 레이더가 중국을 들여다보는 것을 막는 것은 아직도 조공(朝貢)시대의 갑질을 의식해서 일 것이다. 

더군다나 북한의 공갈, 협박에는 더 당당하게 방어체계를 갖춰야 할 것이다. 북한과 조중(朝中)상호방위조약을 맺고 있는 중국은 어차피 북한 편이다.  

우리나라 동해는 각국 잠수함들의 ‘놀이터’가 된지 오래됐다. 한반도가 잠재적 화약고(火藥庫)가 되는 이유다. 

중국은 일본과 센카쿠 열도(중국명 다오위다오 釣魚島)를 놓고 첨예하게 대치하고 있다. 러시아는 일본의 홋카이도 서북쪽 쿠릴열도 남쪽 4개 섬의 영유권 문제를 둘러싸고 분쟁중이다. 

중국과 러시아의 ‘밀월(蜜月)관계’는 미국의 아시아-태평양 중심축(Pivot to Asia) 이동에 대한 반발과 일본을 ‘공동의 가상적(假想敵)’으로 간주한다는 포석의 일환이다. 

중국과 러시아는 조선의 지배권을 놓고 일본과 다툰 청일전쟁(1894~1895)과 러일전쟁(1904~1905)에서 각각 일본에게 전패(全敗)했다. 두 나라는 훗날 설욕(雪辱)을 다짐하며 이를 갈았다. 

중국의 덩샤오핑(鄧小平)은 1980년대 도광양회(韜光養晦), 행여 칼날의 빛이 새어나갈 새라 칼집에 감추고 어둠 속에서 힘을 길렀다. 삼국지연의에서 유비(劉備 삼국시대 촉한의 제1대 황제 재위 221∼223)가 조조(曹操 155~220)의 식객으로 있으면서 자신의 재능을 숨기고 은밀히 힘을 기른 것에 비유한 말이다. 

1990년 후진타오(胡錦濤)는 화평굴기(和平崛起)로 이웃과 친목을 다지는 외교를 표방했고 시진핑(習近平)은 노골적으로 대국굴기(大國崛起), 군사굴기(軍事崛起)를 선언했다. ‘신중화주의(新中華主義)’의 표방인데 항공모함 랴오닝호 등 최신 자국산 무기를 선보여 세계를 바짝 긴장시킨 것이다.   

오늘날 한반도의 지정학적(geo political) 상황은 구한말 일제와 서구 열강들이 한반도를 놓고 낚시질하던 서글픈 악몽(惡夢)이 다시 떠오르게 만든다. 

구한말 주일본 공사관 참사관인 청나라 외교관 황준헌(黃遵憲)은 1880년(고종 17) 자신을 찾아온 조선 수신사 김홍집(金弘集)에게 ‘사의조선책략(私擬朝鮮策略)’이란 책을 건넸다. 그는 책에서 “러시아의 남하(南下)를 막기 위해 친중국(親中國), 결일본(結日本), 연미국(聯美國)하여 조선의 자강(自强)을 도모할 것”을 주장하였다. 

힘이 약한 약소국이다 보니 여기저기 귀동냥이라도 해서 자강하려는 눈물겨운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하다. 

1950년 북한 김일성은 공산주의 종주국 소련(蘇聯 구 러시아)의 스탈린으로부터 탱크, 야포, 비행기 등 중무기를 원조 받아 중국공산당 마오쩌뚱(毛澤東)에게 보고한 뒤 6월 25일 새벽 4시 38선 일대에서 기습 남침했다. 

미군 등 유엔군과 한국군이 압록강과 두만강까지 반격했지만 11월 25일 ‘항미원조(抗美援朝)’를 내세운 중공군 50여만 명이 꽹과리를 치고 피리를 불면서 꽁꽁 언 압록강을 건너왔다. 

영화 ‘국제시장’에서 나왔던 아비규환(阿鼻叫喚)의 흥남부두 철수 장면은 바로 중공군의 공세에 동부전선 미 제10군단과 피난민들이 부산으로 해상 철수하는 처참한 모습이다. 

당시 중공군은 대한민국의 북진통일을 가로막은 ‘철천지원수(徹天之怨讎)’였다. 미군은 대한민국 방어전에서 3만2,933명의 전사자와 10만3,284명의 부상자를 냈다. 그때부터 한미동맹을 피를 나눈 ‘혈맹(血盟)’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지정학적으로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운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70년 동안 천신만고(千辛萬苦) 끝에 세계 속의 경제대국 10위 반열에 올랐다. 그 배경에는 한미상호방위조약으로 미군의 든든한 방어막이 쳐져 있었기 때문이다. 

제주도 상공과 이어도 상공은 이미 중국과 일본의 방공식별구역과 중첩된다. 또 3국이 각각 200해리 배타적 경제수역을 선포한다면 이어도는 모두 포함된다. 

만약 이어도 영유권을 놓고 중국, 일본, 우리나라 사이에 분쟁이 일어난다면? 수중 암초인 이어도는 거리 면에서 마라도로부터 149km, 중국 퉁타오(童島)에서 247km, 일본 도리시마(鳥島)에서 276km의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우리나라 수출길이자 원유 에너지 수입 길목에 있는 제주 해군기지는 ‘불침항모(不沈航母)’로서 동북아 해양분쟁의 지렛대 역할을 하는 전략적 요충지다. 

1597년 명량해전을 앞둔 이순신은 휘하 장졸들에게 ‘필사즉생(必死卽生)’ 즉 ‘죽고자 하면 살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일부당경 족구천부(一夫当逕 足懼千夫)’를 강조했다. ‘한 사람이 길목을 잘 지키면 천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지형지물을 우리에게 유리하게 잘 이용하라는 말이었다. 

<김동철 주필 약력>

- 교육학 박사
- 이순신 인성리더십 포럼 대표
- 성결대 파이데이아 칼리지 겸임교수
- 문화체육관광부 인생멘토 1기 (부모교육, 청소년상담)
- 전 중앙일보 기자, 전 월간중앙 기획위원
- 저서 : ‘이순신이 다시 쓰는 징비록’ ‘무너진 학교’ ‘밥상머리 부모교육’ ‘환생 이순신, 다시 쓰는 징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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