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철칼럼] 당쟁(黨爭)의 역사
[김동철칼럼] 당쟁(黨爭)의 역사
  • 김동철
  • 승인 2017.03.30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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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동철 베이비타임즈 주필·교육학 박사 / ‘환생 이순신, 다시 쓰는 징비록’ 저자

 

마침내 혼용무도(昏庸無道)의 시대가 끝났다. 일개 강남 아줌마와 그 패거리들의 농간으로 나라의 지도자는 결국 쫓겨나고 말았다. 대통령 사진이 재외공관과 각 군부대에서 떼어졌다. 

‘인간의 본성은 악하다’는 성악설(性惡說)을 주장했던 중국 조나라의 순자(荀子) 말에 따르면 ‘군주민수(君舟民水)요, 수즉재주 수즉복주(水則載舟 水則覆舟)다.’ 즉, 임금은 배요 백성은 물인데 물은 배를 띄우기도 하고 배를 뒤집기도 한다는 말은 일단 맞았다. 그러면 이제 나라는 화합과 평온을 되찾고 부국강병(富國强兵)의 길로 나아갈 것인가. 

곧 이어 새로운 대통령이 나옴에 따라 너도 나도 유력자에게 줄대기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여기서도 촛불진영과 태극기 진영으로 쪼개져 반목하고 시기하고 삿대질이 오간다. 이 갈라진 불씨는 분명 망국병(亡國病)으로 이어질 것이다. ‘분열과 싸움’, ‘자기들끼리 싸움엔 귀신(鬼神)이요, 외적과의 싸움엔 등신(等神)’이라는 지적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대권을 거머쥔 자가 모든 것을 다 갖는, 승자독식(勝者獨食)의 권력구조에서 헌법이 바뀌지 않는 이상, 다음 정권에서도 별로 기대할 것은 없어 보인다.

그동안 이 눈치 저 눈치 보던 관료출신이며 군 출신들까지 대거 줄서기에 나섰다. 한번뿐인 짧은 인생, 호강 한번 해보고 가겠다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다만 염불엔 관심이 없고 잿밥에만 공들이는 아사리판이 벌어질 게 뻔해서 민망하다.

그 어느 누구도 풍전등화 안보위기에 휩싸인 대한민국을 위한 비전과 말라비틀어진 서민경제에 대한 이렇다 할 정책을 펴겠다는 리더십은 보이지 않는다. 그저 표심(票心)만을 의식한 인기 영합주의자(populist)로서 목청을 높이고 있다.

민생은 내팽개친 채 허구한 날 싸움만 해대던 여야 국회의원들은 일단 대통령 탄핵안을 발의해서 사리에 어두운 혼군(昏君)을 내치는 데는 성공했다. 하지만 그것으로 나라가 온전하리라 보는가.

그 다음 개혁의 대상은 바로 국회의원들일 것이다. 국민의 막대한 세금으로 유지되는 그들의 세비와 품위유지비, 9명의 비서와 고급 차량 제공, 여기에 이권에 손을 내밀어 뭉칫돈을 챙기는 일부 의원들을 보면 국회는 분명히 제2의 개혁대상이다.

인기몰이를 위해 사진 찍히기를 좋아하고 TV에 얼굴 내밀기를 갈망하는 사람들에 대한 국민(촛불이건 태극기건)의 준엄한 감시와 일벌백계의 사법적 잣대로 들이밀어야 할 것이다.

앞으로 두 달 동안 국민의 선택에 따라 우리나라의 운명은 결정될 것이다. 또 일단 결정되면 후회는 말아야 한다. 그것이 바로 이 나라 국민의 수준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정쟁(政爭)의 역사는 꽤 길다. 오늘날 TV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여야 정쟁은 조선 선조시대 붕당(朋黨)의 등장에서 찾아볼 수 있다. 조선의 붕당(朋黨) 대립은 이권과 자리싸움에서 시작됐다.

조선시대 당쟁이 처음부터 살육(殺戮)의 피바람을 몰고 온 것은 아니었다. 조선시대 최초의 붕당(朋黨)은 1575년(선조8),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이 등장이다. 이들이 서로 각각 붕당을 만든 것은 이조 전랑직(吏曹 銓郞職)을 둘러싼 김효원(金孝元)과 심의겸(沈義謙)의 반목이 그 시작이었다.

이조와 병조에 있는 전랑직은 정5품 정랑(正郎), 정6품 좌랑(佐郎)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그 중에서 이조 전랑 직위는 정5품, 정6품으로 낮으나 문무관의 인사권과 언론 3사인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의 청요직(淸要職)을 추천하고 재야인사에 대한 추천권을 가진 요직 중의 요직이었다.

이 자리는 판서(判書)나 국왕이 임명하는 것도 아니고, 전임자가 후임자를 추천하는 자대권(自代權)으로 보임되었다. 추천되면 공의(公議)에 부쳐서 선출하였으므로 관료들 간의 집단적인 대립의 초점이 되었다.

정3품 이상 당상관이라도 길거리에서 전랑을 만나면 말에서 내려 공손하게 인사를 할 정도이니 더 말할 필요가 없는 노른자위였다. 이처럼 인사권과 언론권을 가진 이조 전랑직을 놓고 대판 싸움이 벌어졌다.

1574년(선조7)에 퇴계 이황(李滉)의 문인인 김효원이란 선비가 이조전랑(吏曹銓郞0이라는 요직에 추천이 되자, 심의겸이 이에 반대하고 나섰다.

명종의 왕비인 인순왕후의 동생인 심의겸은, 김효원이 젊었을 때 세도가 윤원형(尹元衡 문정왕후 동생으로 세도가)의 집에서 식객(食客)으로 있었다는 점을 이유로 그가 이조전랑에 임명되는 것을 반대했다.

그러나 김효원은 심의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조전랑에 임명될 수 있었다. 그 이유는 당시 심의겸에게 실권이 없었으며 김효원은 이황(李滉)의 문하라는 좋은 학벌과 넓은 인간관계로 말미암아 많은 젊은 선비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당시의 젊은 선비들은 직접적으로 윤형원의 세도를 경험한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김효원의 젊은 시절을 관대하게 용납할 수 있었다.

이후 심의겸의 동생 심충겸(沈忠謙)이 장원급제 후 전랑 자리에 추천되자 김효원은 “외척이 등용되어서는 안 된다”며 이발(李發)을 후임으로 정했다. 결과적으로 앙숙이 된 김효원과 심의겸의 대립은 젊은 선비들과 나이 든 선비들의 대립으로 발전했다.

이 선후배 간의 갈등 와중인 1575년(선조8년) 김효원과 가까운 사간원의 허엽(許曄)이 우의정 박순(朴淳)을 부패혐의로 공격하자 박순이 사직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을 두고 조정과 선비들의 의견이 둘로 갈렸다. 김효원을 비롯한 젊은 선비들은 허엽의 공격을 지지했던 반면에, 심의겸을 비롯한 나이든 선비들은 그것을 지나친 일로 비판했다.

김효원을 중심으로 한 동인(東人)은 허엽(許曄)을 영수(領袖)로 추대했고 심의겸을 중심으로 한 서인(西人)은 박순(朴淳)을 영수로 모셔 대립양상이 본격화되었다. 허엽과 박순은 원래 다 같이 화담 서경덕徐敬德)의 제자로 동문수학한 사이였다.

이렇게 하여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이라는 붕당이 생겼다. 김효원의 집이 한양 동쪽의 건천동(乾川洞)에 있었고 심의겸의 집이 한양 서쪽의 정릉방(貞陵坊)에 있었기 때문에 동인, 서인이라 불렀다. 이 대목에서 훗날 이순신(李舜臣)은 류성룡(柳成龍)과 함께 건천동(마른내골)에서 살았기 때문에 자연히 동인세력으로 취급받게 된다.

동인에는 대체로 퇴계 이황(李滉)과 남명 조식(曺植)의 문인들로 류성룡, 우성전(禹性傳), 김성일(金誠一), 남이공(南以恭), 이발(李渤), 이산해(李山海), 이원익(李元翼), 이덕형(李德馨), 최영경(崔永慶) 등 소장파 사림들이 참여했다.

또 서인에는 율곡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의 제자들이 많았다. 정철(鄭澈), 송익필(宋翼弼), 조헌(趙憲), 이귀(李貴), 김계휘(金繼輝), 윤두수(尹斗壽), 윤근수(尹根壽), 이산보(李山甫) 등이 주축을 이루었다.

김효원과 심의겸의 동서 대립이 첨예하게 진행되자 선조는 우의정 노수신(盧守愼)의 청을 받아들여 김효원은 삼척부사로, 심의겸은 전주부윤으로 발령을 내 중앙정치에서 멀어지게 했다. 

처음에는 동인이 우세하여 서인을 공격하였으나, 동인은 다시 서인(기축옥사의 위관인 정철)의 처벌에 대한 강온(强穩) 양론으로 갈라져 강경파인 북인(北人)과 온건파인 남인(南人)으로 분파되어 1592년 임진왜란 이전에 이미 서인, 남인, 북인의 삼색(三色) 당파(黨派)가 형성되었다.

남인은 우성전, 류성룡이 중심이 되었고, 북인은 이발, 이산해 등이 중심이 되었다. 임진왜란 후 남인 류성룡은 왜와 화의(和議)를 주장하여 나라를 망쳤다는 주화오국(主和誤國)의 죄를 물은 북인 강경파 이이첨(李爾瞻)과 정인홍(鄭仁弘)으로부터 탄핵당해 삭탈관직됐다. 이후 북인 남이공이 정권을 잡게 되었고 남인은 몰락하였다.

득세한 북인은 다시 선조의 후사문제(後嗣問題)로 대북(大北)과 소북(小北)으로 갈라져 대립하다가 대북파가 옹호하는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자 정권을 장악하고, 소북파를 일소하기 위하여 영창대군(永昌大君)을 모함 살해하는 한편, 인목대비의 아버지인 외척 김제남(金悌男)과 그 일족을 처형하였다.

광해군과 대북파의 이러한 폭정(暴政)은 오랫동안 대북파에게 눌려 지내던 서인에게 집권할 기회를 주었다. 곧 능양군(陵陽君)을 왕으로 옹립한 인조반정(仁祖反正)이 바로 그것이다. 인조가 왕위에 오르자 천하는 서인의 수중으로 들어갔으며, 북인 강경파 이이첨과 정인홍 등 대북파 수십 명이 처형되고, 수백 명이 유배되었다.

정권을 잡은 서인은 정적(政敵)인 남인 세력을 ‘관제 야당’으로 지정하고 남인 영수 이원익(李元翼)을 영의정으로 모셨다. 그것은 광해군 때 대북(大北) 일당독재 체제에 대한 여론과 민심이 나빠진 것을 감안한 처사였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눈가리고 아옹’ 수준의 꼼수였다. 여튼 서인과 남인의 공존과 대립은 숙종 때까지 100여 년 동안 계속되었다.

동서분당이 일어난 1575년(선조8) 이전인 1572년(선조5) 사림의 붕당을 예견한 사람이 있었다. 동고 이준경(李浚慶)이다. 그는 명종 때 외척세도가였던 윤원형이 몰락한 뒤 영의정이 되었고 명종의 고명(顧命 왕의 유언)을 받들어 선조를 즉위시킨 주역이다.

이준경은 죽기 전 왕에게 차자(箚子 간단한 상소문)를 올려 붕당의 조짐을 알리고 그 대비책을 마련할 것을 청했다. 당시 조선은 명나라 법전인 대명률에서 규정한 대로 붕당을 절대 금했다. 이를 어겼을 때는 삼족(三族)이 죽는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면치 못했다.

이준경이 염두에 둔 사람은 인순왕후의 동생으로 척신을 대표하던 심의겸과 사림의 중망을 받던 율곡 이이(李珥)였다. 결과적으로 보면 이이는 동서 양당의 조정을 위해 노력한 사람이다. 비록 서인으로 지목되지만 논의가 공정하고 행동에 치우침이 없었다. 1581년(선조 14) 선조는 이이를 대사헌에 임명했다.

동인의 강경파 정인홍은 서인인 정철, 윤두수, 윤근수 등이 심의겸에게 아부한다며 비난하자 정철은 이이의 두둔에도 불구하고 고향으로 내려가 버렸다.

선조는 내심 심의겸을 미워하고 있었다. 16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을 때 심의겸의 누이 인순왕후가 선조에 대한 통제를 종용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이는 이런 사실도 모른 채 동인과 서인을 조정하기 위해서 심의겸을 두둔했다. 이것으로 동인의 불만을 샀고 서인의 거두(巨頭)로 지목받게 되었다.

이이가 병조판서로 있을 때 1583년 여진족 니탕개(尼蕩介)가 함경도 종성을 공격한 사건이 있었다. 상황이 급박하자 병조판서 주관으로 출전명령이 내려졌다. 이에 사헌부와 사간원에서는 이이가 병권(兵權)을 함부로 주무르고 임금을 업신여긴다고 공격했다. 그래서 이이는 사직하고자 했지만 선조는 만류했다.

동인의 공격이 더욱 거세졌다. 박근원(朴謹元), 송응개(宋應漑), 허봉(許篈) 등이 이이를 맹렬히 공격했다. 선조는 조신과 유생들의 여론에 힘입어 이 3명을 회령, 강계, 갑산으로 유배시켰다. 계미년에 세 사람을 귀양 보냈다고 해서 계미삼찬(癸未三竄)이라 부른다. 

동인은 물증이 없는 상태에서 대사간과 대사헌을 지낸 서인 윤두수(尹斗壽)를 부패혐의로 탄핵했으며, 양당의 화합을 도모했던 대학자 율곡 이이를 ‘나라를 팔아먹는 간신(奸臣)’이라고 탄핵하기도 했다. 그러나 율곡 이이는 목숨을 내놓고 선조(宣祖)에게 상소문 만언봉사(萬言封事)를 올렸던 사람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8년 전인 1574년 이이는 불길한 예감을 감지한 듯 다음과 같이 선견지명을 밝혔다. 

 “조선은 하루가 다르게 붕괴되어가는 한 채의 집, 부부일심지대하(腐朽日甚之大廈)입니다. 기국비기국(基國非基國), 지금 나라가 나라가 아닙니다”라고 충간했다. 즉 기둥을 바꾸면 서까래가 내려앉고, 지붕을 고치면 벽이 무너지는 나라, 조선의 기사회생을 간했던 이이는 “조선은 어느 대목(大木)도 손을 댈 수 없는 집”이라고 진단했다. 충신이 간신이 되는 상황에서 앞날은 기대할 수 없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2년 전인 1590년(선조22)에 일본에 통신사로 갔다 온 동인과 서인의 보고가 상반되었다. 서인인 정사(正使) 황윤길(黃允吉)은 “앞으로 반드시 전쟁이 있을 것입니다”라고 보고했던 반면에, 동인인 부사(副使) 김성일(金誠一)은 “전쟁의 기미가 없습니다”라고 보고했다. 당파적 입장에서 상반된 견해를 피력했던 것이다. 나라의 안위(安危)보다 붕당의 당리당략에 더 매달린 꼴이었다.

또 동인이 이순신(李舜臣)을 지지하자 서인은 원균(元均)을 지지하면서 억하심정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1592년 왜군에 쫓기여 의주까지 피난 간 선조가 압록강 건너 요동 땅을 바라보며 동서 당쟁에 휩싸인 조정의 분열을 한탄하면서 회한시(悔恨詩) 한 편을 읊었다.
 
 통곡관산월(痛哭關山月) 관산에 뜬 달을 보며 통곡하노라
 상심압수풍(傷心鴨水風) 압록강 바람에 마음 쓰리노라
 조신금일후(朝臣今日後) 조정 신하들은 이날 이후에도
 영복각서동(寧腹各西東) 서인, 동인 나뉘어 싸움을 계속할 것인가

이렇듯 조정이 쪼개지면서 일본군 침입에 대한 오판을 한 나머지, 시체가 산을 이루고 피가 바다처럼 흐르는 시산혈해(屍山血海)의 참극인 임진-정유재란 7년을 겪어야 했다.  

무릇 인간의 마음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천여 년 전 신라말 학자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857~?)은 고의(古意)라는 한 시에서 인간의 본성을 다음과 같이 진단하고 있다.  

 호능화미녀(狐能化美女) 여우는 능히 미인으로 변화하고
 이역작서생(狸亦作書生) 살쾡이는 글하는 선비로 변화하네
 수지이류물(誰知異類物) 그 누가 알리요 동물들이
 환혹동인형(幻惑同人形) 사람 모양을 지어 속이고 홀리는 것을

<김동철 주필 약력>
- 교육학 박사
- 이순신 인성리더십 포럼 대표
- 성결대 파이데이아 칼리지 겸임교수
- 문화체육관광부 인생멘토 1기 (부모교육, 청소년상담)
- 전 중앙일보 기자, 전 월간중앙 기획위원
- 저서 : ‘이순신이 다시 쓰는 징비록’ ‘무너진 학교’ ‘밥상머리 부모교육’ ‘환생 이순신, 다시 쓰는 징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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