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빛나라의 LAW칼럼] ‘82년생 김지영’에 대한 고찰
[오빛나라의 LAW칼럼] ‘82년생 김지영’에 대한 고찰
  • 송지숙
  • 승인 2017.10.23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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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빛나라 ‘법률사무소 인정’ 대표변호사

 

현 시대를 살아가는 30대 여성의 보편적 이야기를 대신 말해주는 장편소설 ‘82년생 김지영’은 우리 사회에 폭발적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82년생 김지영’은 1982년에 태어나 학생, 회사원을 거쳐 서른넷 전업주부로 살아가는 김지영이라는 여성의 연대기다. 한 여성이 30년 남짓 인생을 살면서 가정과 사회에서 겪어야 했던 차별, 학교와 직장 그리고 거리에서의 성폭력·성희롱, 이에 더해 출산과 육아 문제까지, 혹여 빠진 것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빼곡히 지면을 채우고 있다. 

주인공 김지영이 겪은 이 모든 문제는 특수한 환경에 처한 누군가의 경험이 아니라는 점에서 특수하지 않지만, 비슷한 연령대의 여성 모두의 공통적 경험이라는 점에서 매우 특별하다.

‘82년생 김지영’은 특수한 인물과 특수한 사건을 통해 사회구조를 투영하는 근대문학의 일반적 구성을 따르고 있지 않고, 그렇다고 탁월한 미학적 성취가 있는 소설도 아니다. 그럼에도 이 소설이 대중적으로 성공한 것은 폭넓은 공감을 바탕으로 한 사회적 현상으로 볼 수 있다. 왜 ‘82년생 김지영’이 우리 사회에서 유효한 문제제기로 받아들여졌는지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이 소설은 차별받고 상처 입은 여성들에게 “다 잘 될거야(안되면 말고)”와 같은 값싼 위로를 건네지 않는다. 그렇다고 외부의 시선으로 여성의 삶을 객관적으로 재현하거나 섣불리 대변하려 하는 것도 아니다. 오직 여성 자신이 겪어왔던 개인적이고 일상적인 경험을 스스로 말하게 한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마침내 보편성을 획득한다. 

‘82년생 김지영’이 이토록 폭발적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던 것은 누구나 겪지만, 오히려 누구나 겪어서 그리 특별하게 회자되지 못했던 자신의 경험을 대신해서 말해주길 바라는 수많은 82년생 김지영들의 간절한 목마름이 있었기 때문이다. 

부당한 차별에 분노하지 못하고 그저 상처받은 채 묵묵히 살아가는 이토록 많은 여성에게, ‘82년생 김지영’은 단지 그들의 이야기를 꺼내어 말하게 함으로써 진정한 위로를 줄 수 있었던 것이다.

▲ 82년생 김지영 / 조남주 지음 / 민음사 출간

 


‘82년생 김지영’에 쏟아진 폭발적 공감은 여성들이 가부장제와 남성중심적 지배담론으로 억압되고 망각될 뻔한 사적 기억을 공론장 위로 끌어올려 진술함으로써 비로소 그들의 정체성과 동질감을 확인하기 시작하는 과정이다. 그리고 한발 더 나아가 남성중심적 사회의 견고한 지배구조에 균열을 내기 위해서는 여성의 사회적 지위에 관해서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사회 혹은 가족의 구성원이 된다는 것은 그 장소에 대한 권리를 가진다는 것이다. 사람은 어떤 공간에 대한 권리를 확인함으로써 그 공간에서 자신의 자리, 즉 존재나 지위 등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장소를 점유한다는 것은 물론 주체적이고 자유롭게, 그리고 안전하게 점유하는 것을 의미한다. 언제든지 모욕당할 수 있고 언제든지 부름에 응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경우에는 그 장소를 온전히 점유했다고 할 수 없다.

‘82년생 김지영’은 여전히 여성이 직장에서 상사, 동료, 거래상대방으로부터, 심지어 거리에서 일면식도 없는 남성으로부터 언제든지 모욕당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 모든 모욕을 견뎌낸 여성조차 출산과 육아 문제로 언제든지 가정으로 소환되어 유폐될 수 있고, 실제로 많은 여성이 출산을 기점으로 자연스럽게 경력단절을 겪는다. 여성의 활발한 사회진출을 보여주는 각종 객관적 수치들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사회적 자리는 여전히 매우 불안정하다.

가정으로 돌아온다고 해도 여성의 자리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어머니 세대가 그랬던 것처럼 집은 아이와 남편의 필요에 응하여 노동하는 공간일 뿐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누릴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가정으로 부름을 당했을 때 주어지는 가족의 자리 역시 어머니 세대와 비교하여 크게 개선된 점이 없는 것이다.

책의 제목은 62년생 김미숙이나 42년생 김영자가 아닌, 82년생 김지영이다. 소설은 처음부터 재현하고자 하는 특정 세대를 명확히 하고 있다. 학교와 직장에서 편견에 찬 말 한마디로, 밤길에서 직접적인 폭력으로 여성의 자리를 위협하는 사람은 대체로 남성이다. 

그러나 직장이 아닌 가족으로 들어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여기서 남성은 방관자 혹은 직무유기자로서 기능하고, 오히려 여성에 대한 직접적인 가해자는 대체로 윗세대 여성(할머니, 시어머니)이 된다. 그러나 이들은 가부장제의 가장 큰 피해자들이기도 하다. 무참한 희생과 억압의 내면화, 그리고 가슴 속 깊이 억눌려 있던 보상심리는 가장 만만한 대상, 가족이 아닌 아랫세대 여성을 향한다. 

그 대물림을 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리고 ‘엄마와 할머니 외에는 다른 무엇이 될 수 없었던’ 이들에게 건넬 수 있는 따뜻한 위로는 무엇이 있을까 고민이 깊어진다.

<오빛나라 변호사 약력>

-現 법률사무소 인정 대표변호사
-前 법무법인(유한) 현 변호사
-前 법무법인 피플 변호사
-사법시험 54회 합격
-사법연수원 44기 수료
-연세대학교 법학과 졸업
-안양외국어고등학교 영어과 졸업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노동위원회 정회원
-환경운동연합 환경법률센터 정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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