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철칼럼] 류성룡의 징비(懲毖)정신
[김동철칼럼] 류성룡의 징비(懲毖)정신
  • 김동철
  • 승인 2017.03.15 18:06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김동철 베이비타임즈 주필·교육학 박사 / ‘환생 이순신, 다시 쓰는 징비록’ 저자

 

임진왜란이 터진 다음해인 1593년 6월 28일 진주성 2차 공방전 중에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강화교섭차 명나라 사신 사용재(謝用梓), 서일관(徐一貫)과 함께 일본 규슈 나고야성(名護屋城)으로 떠났다.

그곳에 머물며 전쟁을 진두지휘하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명나라 사신에게 화건 7조(和件 7條)를 제시했다. 그 중 ‘조선 8도 가운데 북4도와 한성은 조선에게 돌려주고 남4도(경기, 충청, 전라, 경상)는 일본에 할양한다.’는 조항이 들어있었다. 

당시 명나라는 황제인 신종(神宗)의 무능, 환관의 전횡, 이민족의 발호 등으로 재정이 고갈 상태에 빠져 ‘종이호랑이’에 불과했다. 따라서 이 전쟁을 빨리 끝내고자 했는데 조선 북쪽 땅을 요동방어의 울타리로 삼는 번리지전(藩籬之戰)으로 처리할 심산이었다. 일본은 전쟁을 확대하지 않고 조선 남부 4도를 할양받아 조선 지배를 확실하게 보장받는 것이었다. 

명군과 군마(軍馬)의 군량조달과 조선의 분할저지에 목숨을 걸었던 ‘전시재상’ 류성룡(柳成龍)은 “우리 강토의 땅은 한 자 한 치도 왜에게 넘겨줄 수 없다”며 땅을 치며 울부짖었다. 약소국의 비애(悲哀)였다. 

그 이전인 1593년 2월 도원수 권율(權慄)이 행주산성에서 대첩을 이루자 경략(경략군문 병부시랑) 송응창(宋應昌)은 권율에게 패문을 보내 일본과 싸워 이긴 것을 질책했다. 송응창은 명나라 2차 원군 총사령관으로서 자주 국방권이 없던 조선군을 통합 지휘하고 있었다. 

그해 6월 2차 진주성 전투에서 조선군이 참패하고 성내 살아있는 모든 생물은 도륙당했지만, 사신 심유경(沈惟敬)을 일본군 진영으로 보내 오히려 일본군의 만행을 두둔하는 발언을 하게 했을 정도다. 피아(彼我)가 구분되지 않는 이상한 전쟁이었다.  

명군의 만행(蠻行) 또한 고려 때 몽고병을 능가하고 있었다. 명군은 조선 백성들에게 식량약탈은 기본이고 무고한 인명살상(전공을 위한 수급 채취용), 부녀자 겁탈, 토색(討索)질이 다반사였다. 

징비록(懲毖錄)에는 중국 사신 사헌이 류성룡(柳成龍)에게 “조선 백성들이 ‘왜놈은 얼레빗, 되놈은 참빗’이라고 한다던데 그게 사실이냐”고 묻는 대화가 나온다. ‘되놈의 참빗’으로 말하자면 빗살이 굵고 성긴 얼레빗에 비해 대나무 참빗은 무척 가늘고 촘촘하여 한번 빗으면 남는 게 없어 명군의 수탈이 심했다는 이야기다. 

명나라는 조선을 위기에서 구했다는 ‘재조지은(再造之恩)’을 강조하면서 내정간섭은 물론, 사신들은 온갖 뇌물을 요구했다. ‘의주에서 서울에 이르는 수천리에 은과 인삼이 한 줌도 남지 않았고, 조선 전체가 전쟁을 치르는 것 같았다’고 선조실록은 전하고 있다. 

왜군이 2차 침입을 한 1597년 정유재란 때 명나라 제독 진린(陳璘)은 사로병진작전(四路竝進作戰)에 따라 수로군(水路軍) 대장으로 1598년 7월 16일 전남 완도의 고금도에 도착하여 이순신(李舜臣)의 수군과 합류했다. 

진린의 임무는 3도 수군통제사 이순신과 함께 서로군(西路軍) 대장 유정(劉綎) 제독과 도원수 권율(權慄)의 육군과 연합하여 순천왜성에 웅거하고 있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를 사로잡는 것이었다. 

그러나 고니시의 끊임없는 뇌물공세로 유정은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하다가 퇴각했고, 역시 뇌물을 받은 진린도 “퇴각로를 열어주자”고 하였다가 이순신의 간곡한 청에 마지못해 9월 16일 노량해전 때 조명연합수군 함대를 결성, 참전했다. 

이순신 장군은 이때 휘하 군졸들에게 편범불반(片帆不返), 즉 ‘한 척의 일본 배도 되돌아 갈 수 없다.’며 추상(秋霜)같은 호령을 했다. 

포학한 성품의 진린을 두고 류성룡은 징비록에서 다음과 같이 소회를 밝히고 있다. 

“상(上)이 청파(靑坡)까지 나와서 진린을 전송하였다. 진린의 군사가 수령을 때리고 욕하기를 함부로 하고 노끈으로 찰방 이상규(李尙規)의 목을 매어 끌어서 얼굴에 피투성이가 된 것을 보고 역관(譯官)을 시켜 말렸으나 듣지 않았다. 나는 같이 있던 재상들에게 ‘안타깝게도 이순신의 군사가 장차 패하겠구나. 진린과 함께 군중(軍中)에 있으면 행동에 견제를 당할 것이고 의견이 서로 맞지 않아 반드시 장수의 권한을 빼앗고 군사들을 학대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진린이 고금도(완도군)에 내려온 지 3일 만에 벌인 절이도 해전(折爾島 海戰 전라남도 고흥군 거금도)에서 이순신 장군은 전투를 벌여 왜적의 머리 71급을 베는 전과를 올렸다. 이 해전에서 진린의 패악한 본색이 나왔다. 이순신이 처음 겪은 진린에 대한 장계가 선조실록 1598년 8월 13일자에 기록되어 있다.

‘멀리서 적선을 바라보고는 원양(遠洋)으로 피해 들어간 진린은 우리 군사들이 참획한 수급(首級)을 보고 그 관하(管下)를 꾸짖어 물리치고 이순신에게 공갈 협박을 가하여 못하는 짓이 없었다. 그래서 이순신이 마지못해 40여급을 나눠 보내주었다. 또 계유격(季遊擊)에게도 5급을 보냈다.’  

진린의 명군은 조선 수군에게 행패를 부리고 백성들에게는 약탈을 일삼았다.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이순신 장군은 진린에게 “백성들과 함께 떠나겠다.”며 짐을 꾸렸다. 그러자 진린이 만류했다. 

이때 이순신 장군은 “귀국의 군사들이 나를 속국의 장수라 하여 조금도 거리낌이 없다. 그러니 내게 그들을 처벌할 수 있는 권한을 허락해준다면 서로 보존할 도리가 있지 않겠느냐.”라고 하여 진린의 승낙을 얻어냈다. 이후 명군의 횡포는 잦아들었고 이순신 군영 주변에는 수만명의 피난민들이 모여들어 상당한 마을을 형성했다. 이순신의 애민(愛民)정신이 발휘되었기 때문이다. 

류성룡(남인)의 피맺힌 절규인 망전필위(忘戰必危)! 즉, ‘전쟁을 잊으면 반드시 위태로워진다.’는 외침에도 불구하고 당색이 다른(서인) 중신들은 그의 말을 귓바퀴로 흘려보냈다. 

왜란이 끝난 뒤 우리민족 특유의 급망증(急忘症)이 도져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태평무사하다가 채 30년도 안 돼 북쪽 오랑캐인 여진으로부터 두 차례 침략(1627년 정묘호란, 1636년 병자호란)을 당하고 말았다. 

이때 끌려간 여성은 50여만명이었고 남은 백성들은 맞아죽고 굶어죽는 등 콩가루가 됐다. 300년 후 구한말 때 청나라 위안스카이(袁世凱 원세개)의 패악한 행동은 말할 것도 없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류성룡은 북인으로부터 주화오국(主和誤國), 즉 일본과 화해를 주도해서 나라를 망쳤다는 탄핵을 받고 삭탈관직당한 뒤 고향 안동에 내려와 징비록(懲毖錄)을 피와 눈물로써 집필했다. 

 예기징이비후환(豫其懲而毖後患) 미리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하고 
 지행병진(知行竝進) 알면 행하여야 하며 
 즉유비무환(卽有備無患) 그것이 곧 유비무환 정신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당색에 따라 나라의 안위는 물리친 채 당리당략으로 일삼는 정치인들을 보면서 ‘역사는 반복된다’는 사실에 등골이 오싹할 따름이다. 그리고 한 국가의 존망은 외침에 의해서라기보다는 내분과 내란에 의해서 망하고 말았다는 역사적 사실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류성룡은 한양 건천동에서 어린 시절을 함께 했던 이순신의 장재(將才)를 일찍 알아봤고 난세에 가장 ‘위대한 만남’으로 멘토-멘티 인연을 이어갔다. 그의 징비 정신은 이순신의 선공후사(先公後私), 임전무퇴(臨戰無退), 필사즉생(必死卽生) 및 백의종군 후 살신성인(殺身成仁)과 그 맥을 같이 한다. 

중국 시진핑 국가주석의 가훈은 ‘기소불욕 물시어인(己所不欲 勿施於人)’, 즉 자기가 하기 싫은 일은 남에게도 시키지 말라는 뜻이다. 북핵 견제용인 사드(THAAD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를 놓고 중국은 오늘날에도 오랫동안 한반도를 지배해왔던 타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비몽사몽(非夢似夢) 속에서 헤매고 있는 것 같다.

<김동철 주필 약력>

- 교육학 박사
- 이순신 인성리더십 포럼 대표
- 성결대 파이데이아 칼리지 겸임교수
- 문화체육관광부 인생멘토 1기 (부모교육, 청소년상담)
- 전 중앙일보 기자, 전 월간중앙 기획위원
- 저서 : ‘이순신이 다시 쓰는 징비록’ ‘무너진 학교’ ‘밥상머리 부모교육’ ‘환생 이순신, 다시 쓰는 징비록’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